"다행히 (1945년) 8월 15일에 (전쟁은) 끝났다.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나가사키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비참한 경험을 했지만,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끝났다, 라는 식으로 머리로 정리를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원폭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말은 2007년 6월 30일, 피폭지인 나사사키 현 선출의 국회의원인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성 장관(당시)이 대학 강연회에서 한 말이다. 사회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발언으로 알려진다. 이 발언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신문 등은 다음 날 1면 기사로 보도하거나 사설 등을 통해 '원폭에 대한 국민감정과는 거리가 있다'는 입장을 실었다. 그리고 피폭자 단체를 포함한 평화단체 등을 연일 비판과 항의의 성명서를 쏟아냈다.
좌우가 양쪽에서 이 발언에 대해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규마는 장관직을 사임하였고, 곧 이어서 벌어진 참의원 선거에서 규마가 추천한 후보가 낙선하는 등, 자민당은 참패하였다. 규마의 이런 입장은 사실 처음은 아니다. 1975년 10월 31일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당시 히로히토 천황이 원폭 투하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도, 규마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을 해 피폭자 단체가 항의 성명서를 낸 적이 있다.
일본 사회가 가지는 '핵 알레르기'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를 특징짓는 열쇠 말이다. '핵무기를 들어오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으며, 보유하지도 않는다'는 소위 '비핵3원칙'이 정치공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고 법률적 구속력이 없다고 해도, 이 원칙이 1967년에 발표된 이래 일본 사회의 '비핵의지'를 내외에 증거해주는 대표적인 제도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핵무장에 반대 여론은 NHK방송 여론조사소에 따르면, 1955년 62%, 1959년 59%, 1969년 72%, 1975년 60%, 1981년 82%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2004년 9월 16일 수도권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조사에서도, 남북한이 핵을 가졌을 경우, 일본도 핵무장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가 22.4%, 그렇지 않다가 73.6%, 기타 4%로 여전히 압도적으로 일본 핵무장에 반대하고 있다.
물론 정부 입장과 국민 여론이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경험이 일본의 비핵정책과 여론의 역사적 토양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이론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에 대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후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미국에 항의한 적이 없다. 1945년 8월 10일, 항복 선언 5일전, 히로시마 피폭 후 4일 후, 그리고 나가사키 피폭 다음 날에 이 폭탄사용을 "무차별적이며 잔혹"한 행위로 규정하고 미국 정부를 격렬하게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8월 15일 항복 선언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적은 새로 잔혹한 폭탄을 사용해 무고한 살상"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에 대해 이를 사용한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그 어떤 입장도 표명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쟁을 신속히 종결 지움으로써 많은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소위 '전쟁 조기 종결론'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미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 한 규마의 발언은 일본 정부의 '속내'를 어느 정도 반영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자폭탄을 사용한 미국을 비판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을 현재의 반핵 평화주의로 이어가려는 피폭자와 반핵평화단체의 입장과 일본 정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은 전후 어떻게 전승되었는가?
원폭 위령비, '누구'의 잘못인가?
히로시마의 비극과 비극에 대한 기억장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에 원폭위령비가 있다. 평화공원 가운데에 자리 잡은 아치형 건조물 아래에 조용하게 자리 잡은 원폭 위령비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安らかに眠って下さい
過ちは 繰り返しませぬから
그리고 그 옆에는 친절하게
Let all the souls here in peace;
For we shall not repeat the evil
라는 영문번역이 해설과 함께 곁들여져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편안하게 잠드소서.
잘못은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이 글귀를 보게 되면 묘한 감동과 함께 그 감동을 제어하는 또 다른 위화감이 밀려온다. 대상에 대한 느낌이란 대상 그 자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 글귀를 보고 무엇을 느낄까? 특히 잘못?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데?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잘못? 아니면,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잘못? 전쟁이라면 1941년 진주만 습격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1930년대 '만주' 침략을 말하는 것인가? 혹은 1910년 조선 식민지화? 혹은 1894년 청일전쟁?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가? 일본의 잘못이라 한다면, 일본의 누구 책임인가?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천황? 아니면 도쿄 재판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A급 전범들? 혹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포로 학대와 민간인 학살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1000명 가까운 BC급 전범들? 이 중에는 약 20여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다. 원폭 투하가 일본의 침략전쟁의 탓이라고 해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보통의 민간인이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가? 침략 전쟁을 막기는커녕 뒤에서 이를 응원했으니까? 주어를 둘러싼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일본어가 가지고 있는 주어 불분명의 문법구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주어 불분명의 이 문장에 히로시마가 전후 원폭의 비극을 둘러싸고 격투해온 역사와 그 한계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감동과 그 감동을 제어하는 위화감도 여기에 담겨 있다.
사실 이 원폭 위령비가 건립된 이래 제일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인도인이다. 이름은 라다 비놋 펄(Radha Binod Pal, 1886-1967). 인도의 재판관이면서 법학자인 그가 이 '주어논쟁'의 입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1946년 일본에서 열린 극동 군사재판(속칭 도쿄재판)에 인도를 대표해서 판사로 파견된 데서 비롯된다.
도쿄재판에서 '일본무죄론'을 주장해서 일본의 우파에게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던 그의 발언을 둘러싸고 최근 일본에서 '때늦은 펄 읽기'가 사회현상이 되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원폭 위령비에 대한 그의 발언만을 일단 인용해두기로 하자. 그는 1950년 11월 히로시마를 방문해 원폭위령비를 보고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전해지고 있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라니! 잘못은 누구의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이 글귀를 보는 한) 분명히 일본인이 일본인에게 사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인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인지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리는 것은 원폭희생자의 영혼인데, 일본인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투하한 쪽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납득이 간다. 이 잘못이 만일 태평양 전쟁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일본의 책임이 아니다. 전쟁의 씨앗은 서양제국이 동양침략을 위해 뿌린 것이기 때문이다."
펄 박사의 논지는 분명하다. 주어 불분명의 이 글귀를 두고, 주어는 명백히 일본인이며, 일본인이 잘못을 시인하고 있다. 하지만 원폭을 투하한 것은 미국이다. 원폭을 투하지도 않은, 일본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만일 원폭 투하가 일본의 전쟁이 일으킨 결과라고 한다 하더라도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동양을 지키기 위한 자위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탓인지, 일본에서 과거 전쟁, 원폭 투하, 도쿄 재판으로 이어지는 전전, 전쟁, 전후의 역사를 설명하는 논리로서 펄 박사의 논지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계속 인용되어왔다. 따라서 펄에 대한 일본 사회 일부의 추앙은 대단하다. 하코네에 위치한 '펄 시모나카(下中)기념관'에는 펄 애용의 의자와 책상, 그리고 법복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또 교토 료젠 호국 신사(京都霊山護国神社)에는 펄 박사의 헌창(顕彰)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쉽게 말하자면, 침략 전쟁에 대한 부의 역사를 외부의 시선을 통해 '죄닦음'하려는 일본 사회의 시선이 담겨져 있는 셈이다.
또 1963년에 '대동아전쟁긍정론'을 써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한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1903-1975)는 1969년 8월에 이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인다. 그는 위령비는 "낡은 상처를 매물로 내놔서 가련함과 베풀기를 구걸하는 거지 근성의 상징"이라면서 "일본인의 정신적 재생을 위해 이 치욕적인 기념품은 철거해야 한다. 다행히 히로시마에는 바다가 있다. 태평양까지 운반할 수고를 덜 수 있다. 원폭 돔과 위령비는 (히로시마 앞 바다인) 세토나이까이(瀬戸内海)에 가라앉혀라!"고 말한다. 하야시는 원폭 위령비와 원폭 돔을 일본 역사의 치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패배의 상징물인 셈이다. 따라서 다수의 일본인이 희생되고 일본 패배를 기억하는 이 기념물은 당연히 철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 2월에 창립된 '원폭 위령비를 바로잡는 모임'이라는 단체는 히로시마 시장에게 제출한 청원취지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 패전 점령하의 감각으로 점철된 이 굴욕의 문자가 아직도 피폭의 땅 히로시마 시에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양심에서 볼 때 부조리하다. 비문 그 자체가 잘못이다."
히로시마는 인류의 비극
이 같이 정치적 우파에 속한 사람들의 '비판'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원폭 사용국인 미국에 대해 명확한 비판을 하지 않는 일본 정부나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의 성격도 동시에 갖는다. 진주만 습격 등 일본의 침략 전쟁과 원폭 사용을 인과(因果)관계로 파악할 경우, 원폭 사용에 대한 비판이 침략전쟁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침략전쟁과 식민지화를 부정하고 일본의 가해책임을 명확히 한 다음, 미국의 원폭 사용에 대해 규탄하고, 현재의 핵무장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절대적 평화주의의 입장이 관철되기 어려운 일종의 '자기분열적인 비틀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서 있는 셈이다. 결국 이런 '비틀림'은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미국 대 일본, 혹은 일본 대 아시아라는 구도에서 한 발 비켜서 핵무기 대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볼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어 냈다.
이 원폭 위령비의 글귀를 만든 사이가 다다요시(雑賀忠義, 1894-1961) 당시 히로시마 대학 교수는 펄 판사의 견해에 대해 항의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히로시마 시민임과 동시에 세계시민인 우리들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이는 전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로 통하는 히로시마 시민의 감정이며 양심의 외침이다. '원폭 투하는 히로시마 시민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세계 시민에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 좁은 입장에 서게 되면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며, 영령 앞에서 설 자격은 없다"(1952년 11월 11일)
또 1970년 3월 야마다 세츠오(山田節男, 1898-1975) 당시 히로시마 시장은, "비문은 바꾸지 않겠다. 비문의 주어는 세계 인류이며, 인류 전체에 대한 경고, 경계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1983년 11월 3일 히로시마 시는 원폭 위령비 옆에 영문과 일문으로 된 설명문을 비치한다. 설명문은 다음과 같이 이 글귀를 해석하고 있다.
"비문 (글귀)은 모든 사람들이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빌어 전쟁이라는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글귀이다. 과거의 슬픔을 참고 증오를 넘어서 전 인류의 공존, 번영과 진정한 세계 평화의 실현을 바라는 히로시마의 마음에 여기에 새겨져 있다."
원폭 위령비 글귀를 둘러싼 '주어 논쟁'은 일단락 된 셈이다. 주어 없는 이 글귀의 주어가, 혹은 영문으로 새겨진 'we'는 역사에서 왔으되, 역사에서 '세탁'된, 탈역사화된 인류가 된 것이다. 따라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평화이념으로 보편화하려는 히로시마의 고뇌가 여기에 담겨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말한 이 위령비를 보고 느끼게 되는 '감동'의 실체는 밝혀진 셈이다. 하지만 아직 감동을 제어하는 '위화감'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는 침략과 침략전쟁이라는 가해와 원폭이라는 피해 사이에서 '갈등'해온 전후 일본 사회의 비틀림이 이 글귀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보고 "가해 사실만 강조하고 피해사실은 은폐하려 한다"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에 대해 일본 사회 자신이, 특히 피폭자 등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그 이후에도 이 위령비를 둘러싼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1996년 8월, 히로시마를 방문한 당시 자민당 국회의원 카메이 시즈카(亀井静香) 중의원 의원은 이 위령비를 보고, "이곳 평화공원에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라니!, 일본군이 원폭을 투하하지도 않았는데"고 말한다. 그리고 2005년 7월에는 27살의 우익 청년이 위령비에 새겨져 있는 "잘못"이라는 부분을 해머로 훼손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위령비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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