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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독립하다!

[권혁태의 일본 읽기] <4> 질곡의 역사와 독립의 꿈

'우치난추'의 외침

지난 1970년 7월 8일 관광객으로 붐비는 도쿄의 상징 도쿄타워. 한 청년이 인질 농성 사건을 일으켰다. 청년은 "일본인들이여, 오키나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칼 두 자루를 들고 도쿄타워에 들어가 미국인 선교사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외친다.

"20세 미만 청소년은 풀어주겠다. 그리고 조선인과 오키나와 사람은 풀어주겠다. 하지만 미국인과 일본인은 풀어주지 않겠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 천황은 사죄하라!"

인질극의 주인공은 도미무라 준이치(富村順一). 193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40년에는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부, 소학교에서 쫓겨났던 사람이었다. 1954년에는 나하(那覇) 형무소 폭동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 일본열도로 건너와 각종 운동에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복역한 후에도 전쟁 때 학살된 조선인들을 위한 위령탑 건설 운동에 참여했으며, 1977년에는 황거 앞에서 천황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다 다시 체포되기도 한다. 이 사람의 일생은 근대 이후 '야마톤추'(일본인이라는 오키나와 말)와의 관계 속에서 고난에 가득 찬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의 '소리'를 전해 준다.

그러나 이 청년의 바람과는 달리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의 '은밀한 거래' 하에 1972년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미군기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에 귀속되는 속칭 '오키나와 복귀'이다. 1872년부터 개시된 소위 '오키나와 처분'에 의해 류큐(琉球) 왕국이 무너지고 일본에 편입된 지 실로 100년 만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군 점령 상태에 놓인 지 27년 만에 '다시' 일본땅으로 '귀속'된 것이다.

1987년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전국체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우치난추'가 희생된 요미탄(読谷) 마을의 소프트볼 경기장. 백스크린 메인 폴 위의 높이 12m 게양대에 올라간 한 오키나와 청년이 바람에 펄럭이던 '히노마루'를 끌어내리고 불을 붙였다. 히노마루가 불에 타오르자 관객석은 박수와 휘파람 소리로 뒤덮였다. 이 청년의 이름은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 1948년 생. 민박업과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던 평범한 오키나와 청년이었다.

'류큐독립당'의 출현

그리고 2006년 11월 19일 오키나와에서 거행된 오키나와 지사 선거.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경제 진흥 문제가 최대의 초점이었던 이 선거에서 예상대로 자민/공명 진영의 후보와 사민, 공산 등 혁신 진영의 양대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결과는 보수 진영이 근소한 승리였다. 다음 날 일본 미디어는 보수의 신승이 향후 정국에 미치는 파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류큐 독립당의 출마를 전하는 신문기사(沖縄タイムス 2006.7.19) ⓒ권혁태

그러나 겨우 6220표에 득표율 0.93% 꼴찌로 낙선한 후보에 대해 주목하는 미디어는 거의 없었다. 꼴찌 후보의 공약은 오키나와 독립, 소속정당은 류큐(오키나와의 옛 이름) 독립당이었다. 목표는 류큐 공화국의 건설이다. 1972년 일본 '복귀' 후 독립을 공약으로 내건 첫 번째 후보의 출현이었다. 물론 이 류큐 독립당이 우치난추의 정치적 지향성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독립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36년 만에 정당의 형태로 등장한 오키나와 독립의 소리는 여전히 우치나(오키나와)와 야마토(일본), 그리고 우치난추와 야마톤추(일본인) 사이의 역사적 '비틀림'의 역사를 웅변해준다.

이는 몇 가지 조사를 보면 수긍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997년 5월 <아사히TV>가 오키나와 주민 100명을 대상하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독립해야 한다"가 9.0%, "문제가 해결된다면 독립해야 한다"가 38.8%로 "독립해선 안 된다" 45%와 백중세를 이룬다.

2007년 조사를 보면 오키나와 사람이 "일본인이 아니라 오키나와 사람이다"라고 대답한 비율은 41.6%, "오키나와 독립에 찬성한다"는 20.6%에 달했다.(<류큐신포>(琉球新報), 2007년 11월 29일 보도) 조사에 따라 다소의 편차는 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조건에 갖추어진다면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한국에선 아열대 휴양지로 알려진 아름다운 곳이다. '일본 국가'의 최남단, 최서단에 자리하고 있고, 동서 1000km 남북 400km에 이르는 광대한 해역에 약 160개의 섬(유인도는 약 50개)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말까지 류큐(琉球) 왕국으로 존재했고, '야마토'(大和)와는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곳. 1872년 일본에 '편입'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곳으로 고난에 찬 삶을 강요당한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 영토' 중 유일하게 육상전을 경험, 많은 우치난추가 희생되었다.

1945년에 미국에 점령당했고, 1952년 일본은 미국의 점령에서 벗어났지만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국의 점령 상태에 놓여있었다. 1972년에 일본에 '복귀'했으나, 오키나와 전체의 약 25%를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70%에 달한다. 일본에선 가장 실업률이 높은 곳이고 소득 수준은 가장 낮다. 이렇다할만한 산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광수입과 중앙정부 보조금이 중요한 수입이다. 미군기지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은 예년에 비해 많이 낮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중요한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보면 경제적 자립의 가능성은 낮지만, 오키나와 독립은 역사적으로, 혹은 일본, 미국과의 관계를 볼 때 하나의 '당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오키나와 독립은 가능할 것인가? 독립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경로와 절차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오키나와 독립 시나리오
▲ <오키나와가 독립하는 날> 표지 ⓒ권혁태

오키나와 독립에 관한 책은 아주 많지만 이를 구체적인 시나리오로 풀어낸 책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키나와가 독립하는 날>(なんくる組編『沖縄が独立する日』夏目書房, 1996)은 다소 시간이 경과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새롭다. 지은이인 '난쿠루'(なんくる)는 오키나와 말로 "잘 될 거야", 혹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가벼운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오키나와 독립에 대해 낙관적인 최상의 시나리오를 전개한다.

1996년 오키나와 현은 미군기지 반환 프로그램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기지의 일부 축소와 경제지원을 담은 오키나와 진흥 계획을 오키나와에 제시한다. 오키나와는 이를 거부하고 기지 철거 문제에 대한 오키나와 현민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강행해 주민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기지 철거를 결정한다. 그리고 "기지 완전 철거에 대해 일본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기자회견에서 천명한다.

그 후 오키나와 분리 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하고 독립안이 다수로 통과되자 독립선언을 채택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 '류큐공화국'의 탄생이다. 그리고 미군기지의 존재근거가 되었던 미일안보조약과 미일지위협정으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한다. 류큐 주둔 미군기지 유지에 혈안이 된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 경유의 교섭을 포기하고 류큐 신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류큐 신정부를 승인한다. 류큐 공화국이 국제사회에서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후 류큐 공화국은 기존의 국가형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키나와 소재 50여개 섬을 잇는 도서 연방 형태의 신국가 설립을 지향하고 비핵·비동맹·비무장을 이념으로 주변 아시아 태평양 도서 군소국가와의 협조체제를 구축하려 한다.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열린 연성의 평화/해양'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류큐왕조가 1458년에 만든 종(鐘)에 새겨진 '만국진량'(萬國津梁, 만국에 열려있는 가교)의 뜻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이 책에 담고 있는 오키나와 독립의 메시지는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를 또 하나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의 본질인 '부국강병'이나 '폐쇄성'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피억압의 역사에서 비롯된 '희망'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독립론의 의미

현실 속에 이 희망찬 시나리오를 그대로 대입하기는 물론 힘들다. 만일 오키나와가 독립을 결정하게 되면, 이 책에서 '희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정부가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리가 없다. 미국도 간단히 미군기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자위대를 파견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을 다수 '희생'시킬 것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은 다수의 오키나와 사람들을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군대는 반드시 '국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국민'에 총구를 겨눌 수 있다. 이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극히 일반적이다. '국민의 군대'는 없는 것이다. 2000년 7월에 열린 규슈 오키나와 사미트 무렵의 일이다. 사미트 개최 반대파가 주최한 시민집회에서 '본토'(일본)에서 온 젊은이가 오키나와는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50대 우치난츄(오키나와 사람)는 "만일 오키나와가 독립하려 하면 일본 정부가 가만히 있을까요? 만일 운동이 고양되어 독립이 현실화 단계에 접어 들어도 반드시 마지막에는 자위대가 출동해 무력을 사용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희생당할까. 그 정도 각오를 하고 독립하라는 말인가? 나는 오키나와가 독립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고 말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공포를 말해주는 것이다.

오키나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오키나와 독립에 대해 동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키나와 독립론을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인 지식인들의 허황된 논리라고 하면서 이를 '술집 독립론'(居酒屋独立論) 으로 폄하한 오키나와대학 전 총장 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輝)의 주장도 있다. 혹은 1972년 오키나와 '복귀'에 반대하면서, '반복귀' 사상을 운동론으로서의 '독립론'과 구별하는 아라카와 아키라(新明川)의 주장도 있다. 혹은 위에서 말한 류큐 독립당이 무장을 전제로 한 독립론을 전개하는 것을 예로 들어, 오키나와 독립론이 구체적인 운동론 혹은 혁명론과 결합할 때, 비무장 평화노선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라는 회의론을 전개할 수도 있다.

현실 속에서 오키나와는 야마토와의 관계 속에서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일본으로의 '통합과 반역', 혹은 일본으로의 '동화와 이화(異化)', 그리고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반역, 이화, 원심력만을 가지고 독립을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립론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독립론을 전개함으로써 오키나와와 일본과의 역사적인 관계,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근대국가가 가지고 있는 숙명적인 모순을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독립론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자기해방'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근대의 완성임과 동시에 근대의 질곡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독립. 이 정치적 지향성은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역사를 일별하기만 하면 누구나가 이 독립론이 '국가 경멸론자'의 허황된, 뜬금없는 관념적 주장이 아니라 오키나와의 역사와 그 역사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오키나와의 현실과의 격투 속에서 나오게 된 하나의 사상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게 된다.

<참고문헌>

目取真俊「沖縄独立論」をめぐって」(『週刊金曜日』No.339, 2000.11.10).
なんくる組編『沖縄が独立する日』夏目書房, 1996.
新川明『沖縄・統合と反逆』筑摩書房、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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