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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민당, 8년만에 정권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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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민당, 8년만에 정권 탈환

마잉주 압승…유엔 가입 국민투표 부결

22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후보가 셰창팅(謝長廷) 민진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로써 50여년간 대만을 통치해오다 2000년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에게 정권을 내줬던 국민당은 8년만에 정권을 탈환하게 됐다.

국민당은 지난 1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데 이어 총통 선거에서도 승리함으로써 강력한 여대야소를 바탕으로 입법과 행정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게 될 전망이다.
▲ 대만 총통에 당선된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 ⓒ로이터=뉴시스

현 정부 실정과 정쟁에 대한 심판

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최종 개표 결과 마 후보는 765만8224표를 확보, 58.4%의 득표율로 544만5239표(41.6%)를 얻은 셰 후보를 16.8% 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승리했다.

득표 격차는 모두 221만표로 지난 2004년 3만표 가량의 표차로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당선된 것과 비교하면 국민당의 압승이다. 투표율은 76.3%로 최종 집계됐다.

이같은 결과는 경제실정과 부정부패, 끊임없는 정쟁, 독립노선에 따른 양안 갈등 등 천 정권에 대한 염증을 반영한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분석하고 있다.

마 후보는 선거 막판 티베트 독립시위로 인한 반중정서를 자극하고 마 후보에 대해 '네거티브 공세'를 강화했다. 이를 통해 마 후보가 지지율 격차를 10% 미만으로 줄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제 결과는 마 후보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마 후보는 양안 공동시장 공약 등 양안 경제협력을 통한 대만의 경제회생과 '633플랜(성장률 6%, 국민소득 3만 달러, 실업률 3% 이하 달성)' 등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경기침체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중산층·서민층의 표심을 붙잡았다.
▲ 국민당 지지자들이 마잉주 후보의 당선에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양안관계 안정화와 대중 경제교류 주력할 듯

한편 이날에는 향후 양안관계의 풍향계로 여겨지던 유엔 가입 국민투표안도 동시에 실시되었으나 투표율(35.8%)이 과반에 못 미쳐 자동 부결됐다. 국민당이 발의한 중화민국 명의의 유엔 복귀 국민투표안 역시 투표율 35.7%로 부결됐다.

국민투표 부결과 함께 마 후보의 당선으로 양안 관계도 한층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마 후보는 지난 1월 총선 압승을 근거로 중국-대만간 직항(通航), 교역(通商), 서신 왕래(通郵)의 3통(三通) 실현, 중국인의 대만 관광 및 투자 확대 등 양안 경제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양안관계에 있어 마 당선인이 '통일도, 독립도, 무력충돌도 하지 않겠다'는 3불(不) 원칙을 표방한 만큼 마잉주 체제는 그간의 독립·통일 논의 보다는 중국과의 경제교류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마 당선인은 "중국, 대만의 상호 인정을 합의한 92공식에 기초해 양안협상을 재개할 것"이라며 "가장 절박한 양안직항, 대만 금융기관의 대륙 투자 확대, 대륙 관광객의 대만 방문 개방 등부터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마잉주는 누구인가?

1950년 홍콩에서 태어난 마잉주 당선자는 대만 최고 명문인 젠궈(建國)고교와 대만대 법학과을 졸업한 엘리트다.

1974년 국민당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대에서 석사학위,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가(街)에서 잠시 근무한 그는 1981년 귀국, 총통부 제1국 부국장직을 맡아 장징궈(蔣經國) 당시 총통의 영어통역과 비서로 활동하며 대만 정계에 입문했다.

1984년 국민당 부비서장으로 입성한 그는 대륙위원회와 국가통일위원회 주요 간부를 거쳐 1993년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정부에서 43세의 나이로 법무부장에 발탁됐다.
▲ 마잉주 당선인 ⓒ프레시안

그러나 금권과 폭력으로 얼룩진 대만 정계를 대대적으로 사정하기 위해 폭력조직과의 전쟁을 치르다 국민당 내 본토세력과 헤이진(黑金. 검은 돈) 비호 의원들의 협공으로 중도 하차했다.

하지만 법무장관 시절 부패척결에 앞장서 칼을 빼든 것이 '청렴'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후 국립정치대학 법학교수로 학계에 몸담은 뒤 1998년 정치계로 컴백, 타이베이시장 선거에서 연임을 노리던 당시 천수이볜 시장을 5% 차로 누르며 대만 정국에 돌풍을 몰고 왔고 2002년 재선에 성공했다.

타이베이시장 당시 자매결연을 맺은 서울시를 방문해 청계천 복원, 버스전용차선 도입 등 타이베이에 적용하기도 했다.

2005년 7월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된 마잉주는 곧바로 치러진 지방선거의 대승을 이끌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 총통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 사건이 잇따르며 천수이볜 탄핵 정국이 이어질 당시 불분명한 그의 태도는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국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선 시장 재임 시절 판공비 성격의 특별비를 유용한 혐의로 기소돼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으나 잇따른 무죄 판결로 곤경을 벗어났다.

총통 선거 막판에 양안 공동시장안과 미국 영주권 문제, 티베트 사태 유혈 진압 등 민진당의 네거티브 공세에 대해 수차례 말을 바꾸거나 사과함으로써 약소국 대만을 이끌 총통감으로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향후 대만의 정국 주도권을 쥐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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