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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찾다'

[권혁태의 일본 읽기] <2> 적군파 와카미야 마사노리의 죽음

1990년 페루의 산골짜기에서 한 일본인 중년 남자의 사체가 총에 맞은 채로 발견되었다. 일본인의 이름은 와카미야 마사노리(若宮正則). 1946년 생, 45세. 적군파의 전 간부였다. 범인은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라는 페루 좌파 무장조직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모택동주의를 표방하면서 '페루공산당'을 자칭하는 조직이다. 평생을 무장노선에 좌파로 살아온 혁명가가 좌파 무장노선 조직 혁명 게릴라에 의해 살해되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일어난 셈이다.

하지만 센데로 루미노소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와카미야를 살해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범행 성명도 발표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센데로 루미노소가 페루 거주 일본계 주민에 대한 반감에서 와카미야를 살해했을 것이라는 설도 나온다. 실제로 1990년 6월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알베르트 후지모리 일본계 2세가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저 우연한 '사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의문은 왜 일본의 혁명가가 좌파 무장게릴라의 해방구인 이 위험한 지역에 들어갔는가였다. 왜 일본 적군파의 간부가 일본 열도의 반대편에 있는 페루, 그것도 수도 리마에서 해발 6000m의 안데스 산맥을 넘어 무려 300km나 떨어진 공산주의 게릴라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혹시 평생을 혁명에 바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껴 어부의 자손답게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아가기 위해 그 산골짜기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반란의 시대가 끝나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 일본 사회에 절망을 느끼고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찾아 페루의 게릴라 지역으로 들어간 것일까?
▲ <가마가사키 적군 병사 와카미야 마사노리 이야기> ⓒ彩流社

후자이든 전자이든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만들어져 일본 내에서 좌절을 맞보고 혁명을 찾아 세계 각지를 찾아 헤매던 일본 적군파의 '운명'을 체현한 셈이 된다.

그러나 다른 적군파의 삶의 궤적은 비교적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데 반해 와카미야에 관한 자료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책으로는 다카헤이 마사히토(高幣真公, 1943~)가 지은 <가마가사키 적군 병사 와카미야 마사노리 이야기>(<釜ヶ崎赤軍兵士 若宮正則物語>,彩流社, 2001)가 유일하다.

이 책의 지은이인 다카헤이는 죽은 와카미야의 친구이면서 적군파 결성시 무장노선에 합류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항상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실업보험에 의존하면서 1998년에 약 10개월 동안 이 책을 완성했다. 이 밖에 그가 죽음을 맞이한 직후 페루를 현장 취재한 일종의 르포 기사로 와카미야의 친구이면서 적군파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한 다카자와(高沢皓司)가 쓴 짧은 취재 기사가 있지만 이는 아주 단편적이다(<噂の真相>1991년 2월). 따라서 그의 삶의 궤적은 이 두 가지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혁명은 현장에서'

적군파라 해도 사실 갈래가 아주 많고 또 복잡하니 이곳에서 하나하나 들추어 쓰기에는 적당치 않다. 적군파 등 일본의 신좌익 운동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일단 적군파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갈래로 일단 나누어 보자.

첫 번째 갈래는 1970년 3월 9명의 적군파가 요도호라는 도쿄발 후쿠오카 행 비행기를 납치해 북한 평양으로 간 그룹이다. 이들은 흔히 요도호 적군파라 불린다. 9명 중 4명은 사망(이중 2명은 사망설)했고, 4명은 북한에 거주하고 있으며, 1명은 일본에서 체포되어 형기 종료 후 현재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 번째 갈래는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다수가 합법적으로 팔레스타인 등으로 들어가 그곳 게릴라들과 테러조직을 결성해 1970년대에 세계 곳곳에서 테러 활동을 전개한다. 이를 일본적군파라 부른다. 이들 중 7명은 여전히 국제 수배 중이며, 최고 지도자였던 시게노부 후사코를 비롯한 복수의 적군파는 현재 복역중이다. 최근 옥중에서 시게노부는 적군파의 해산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새로운 투쟁을 선언했다.

세 번째 갈래는 일본 내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산악 훈련을 하는 그룹이다. 이들은 내부 숙청으로 12명의 동지를 '총괄'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이를 연합적군이라 한다.

그러나 와카미야는 이들 세 가지 그룹과는 달리 '현장'을 고집했다. 현장 고수가 그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우연한 결과였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적군파가 위의 세 가지 줄기로 자기변신을 꾀할 때, 와카미야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택한 현장은 요세바(寄せ場)라 불리는, 하루살이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였다. 그는 1971년 빈민지역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한 후, 옥중 생활과 몇 번의 모색기간을 제외하면 줄곧 빈민지역을 현장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무장투쟁노선과 빈민지역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줄기의 적군파가 주로 선도적인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던 데 반해, 그는 대중노선을 걸은 것이다.

일본에는 빈민가로서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다. 도쿄 중심가에 관광객으로 붐비는 아사쿠사(浅草). 그곳에서 걸어서 30분, 버스로 10분, 거리로 2km 남짓 가면 속칭 산야(山谷)라 불리는 하루살이 노동자들의 마을이 나타난다. 기록영화로 제작되어 화제를 모은 <당하면 갚아라>(1985년, やられたらやりかえせ、YAMA-ATTACK TO ATTACK)의 무대이다. 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2명의 감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살이 노동자를 착취하던 야쿠자들의 소행이었다. 이 밖에도 요코하마(横浜)의 고토부키(寿), 나고야(名古屋)의 사사지마(笹島), 후쿠오카(福岡)의 칫코(築港) 등이 유명한 노동자 마을이다. 와카미야가 택한 곳은 일본 최대의 빈민가인 오사카의 가마가사키(釜ヶ崎)였다.

변화한 적군파

와카미야는 1945년 에히메(愛媛)현 우와지마(宇和島)시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위 일본에서 말하는 '단카이(団塊)' 세대에 속한다. '단카이 세대'는 대체로 1946~1949년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는데, 이들 세대가 청년기를 맞이하는 1960년대는 신좌익운동이 고양되고 고도경제성장이 절정에 달하던 시대이다.

1964년 우와지마 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자 요코하마의 항만 하역회사에 취직해 항만 인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때는 베트남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고, 일본에서도 노동자·학생들의 반전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기존의 체제와 권위에 대한 부정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와카미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8년 그는 지역 노동자들의 정치운동단체였던 반전청년위원회가 주최하는 베트남 반전 데모에 처음으로 참가했고, 바로 적군파의 모태가 되었던 공산주의동맹(속칭 분트BUND)에 가맹한다. 분트는 당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과 아울러 일본의 신좌익을 대표하는 집단 중의 하나였다.

1969년 7월 총과 폭탄 등으로 무장해 바로 혁명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적군파가 분트의 노선대립 속에서 탄생하자 와카미야는 이에 합류한다. 그리고 1969년 해발 2000m 높이의 다이보사츠도게(大菩薩峠)라 불리는 야마나시(山梨) 현 고후(甲府)시 인근 산악에서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모여든 적군파 53명과 함께 체포된다.

나카자토 가이잔(中里介入山, 1885~1944)이 무려 30년에 걸쳐 연재해 41권으로 출판한 장편역사소설 <다이보사츠도우게>의 무대이다. 물론 소설과 적군파와는 관련이 없다. 이들이 산속으로 모여든 것은 수상 관저를 점거해 당시 수상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를 인질로 잡고 구속자 석방 등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한 예행연습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년 반 동안 복역한다.

1971년 출소한 그를 맞이한 것은 적군파의 변화였다. 일부는 평양으로, 일부는 레바논으로 혁명을 찾아 떠났고 국내에 남아있던 적군파의 일부는 이미 산악에서 비밀 군사훈련을 수행 중이었다. 그는 곧바로 일본 최대의 빈민가인 오사카의 가마가사키로 들어가서 노동자와의 만남의 장소로 라면식당을 개업한다.

가마가사키에서는 1961년 이후 경찰 권력과 야쿠자에 대항해 노동자들의 크고 작은 '폭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61년 제1차 '폭동' 이후 1990년까지 22번이나 격렬한 '폭동'이 발생했다. 따라서 와카미야는 저변 노동자의 반권력적 '열기'를 혁명적인 역량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무장투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동료 12명을 살해한 연합적군 사건을 농촌형 게릴라 노선의 실패라 규정한 그는 오히려 도시, 즉 가마가사키야말로 도시 게릴라 무장투쟁이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라 생각한 듯하다.

따라서 자연발생적 '폭동'을 도시게릴라 무장 투쟁과 결합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스스로 만든 사제폭탄을 파출소에 투척한다. 이 사건으로 1972년 12월 체포되었고, 1986년 5월 석방될 때까지 '옥중 14년'을 경험한다. 감옥 안에서도 물론 그는 '옥중자 조합'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소자의 권리 획득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적군파 청산과 아나키스트 선언이었다.

아나키스트를 선언하다
▲ 1990년 10월에 발생한 가마가사키 22차 '폭동' ⓒ 1998 Kuwashima Takayuki (http://kuwashima.jp/riot/riot_a04-n.html)

그는 형무소를 나오자마자 "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공산주의는 조직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반대한다. 가마가사키에서 다시 식당을 열고 싶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동자의 상호부조를 위해서다"고 선언한다.

그는 가마가사키로 다시 돌아왔고 실제로 노동자의 상호부조를 위한 식당을 개설하고 조직을 만든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실패한다. 노동자 식당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했고, 외상은 쌓여 가는데 외상을 갚는 노동자는 아주 드물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한 상호부조조직의 출자나 기부도 모이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의 '자립에 대한 의지'가 없는 한 상호부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출소하고 나서 (노동자의) 상호부조운동을 해왔지만 거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고, 기력도 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사회운동에 대한 정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차근차근 해나갈 생각입니다. 내가 활동을 그만둔다면, 세상을 버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산속에 들어가 혼자서 원시생활을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적 생활을 상상해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지만, 세상을 버리고 산속에서 혼자서 생활하는 것을 상상하면 행복한 기분이 듭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지요"(1988년 3월 14일)

이 편지에서 이미 페루의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기는 하다. 그 후 그는 평소에 좋아하던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여행에 나선다. 그건 여행이라기보다는 떠돌이 생활에 가까웠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모은 그는 1990년 10월 일본을 떠나 페루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주변의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은 채로. 본인은 두 번 다시 일본 열도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을 것이다. 페루에서 두 번이나 강도를 당해 여권과 현금을 모두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10월 24일 리마를 출발한 그는 버스와 도보로 거의 두 달 만에 센데로 루미노소 지배지역과 정부군 지배지역의 접경 마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살해된다. 혁명을 떠나 자연을 꿈꾸었던 사람이 혁명의 이름으로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그는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 다시 돌아온다. 한 줌의 재가 된 채로. 혁명의 열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그가 믿었던 가마가사키에는 이제 더 이상 혁명적 열기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전국의 요세바에는 현대적 호텔이 들어섰으며,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노동 능력이 없는 '힘없는 늙은이'만이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가 하루살이 노동자를 대신하고 있다. 그의 '혁명적 인생'은 일본 신좌익 운동사의 생성, 고양, 몰락, 종언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실패한 일본의 체 게바라일지 모른다.

필자 소개

1959년 생으로 고려대 사학과를 거쳐 일본 히토쯔바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일본경제사)를 받았다. 일본 국립 야마구치 대학 교수를 거쳐 2000년부터 성공회대학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반일과 동아시아>(공저), <아시아의 시민사회>(공저) 등이 있다.


필자 이메일 : kwonht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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