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합리성
객관성 다음으로 생각해 볼 성격으로 합리성을 들 수 있습니다. 과학이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왜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이론이 합리적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과학이론이 어떻다는 건가요?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의미도 몇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도구적 관점인데, 결국 주어진 목적을 잘 달성할 수 있으면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자연과학의 목적은 자연현상의 이해이므로, 자연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면 합리적이라는 거지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으로는 불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자연 현상을 이해하게 하는 이론 체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때,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이라는 서로 다른 이론 체계가 존재하지요. 두 가지 모두 행성의 운동 이해라는 주어진 목적을 잘 달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도구적 목적의 의미로만 합리성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떤 기준으로 합리성을 생각해야겠어요?
이에 대해 앞에서 간단하게 논의를 했습니다. 이른바 '좋은 이론'이라고 부르는 판단 기준이 있었지요. 이를 테면 '경험적 적합성'이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이론'이라는 판단도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현상을 얼마나 정밀하게 설명해 주느냐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또는 정밀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더 넓은 범위를 설명해 줄 수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이론과 B라는 이론이 있는데 A라는 이론은 어떤 현상은 기막히게 잘 설명하지만 다른 건 설명하지 못하고, B라는 이론은 이런 거 저런 거를 모두 설명하지만 정밀하지 않다고 합시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 이론일까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네요.
또는 설명의 능력과 예측의 능력이 다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이론은 지금 이 현상을 잘 설명하는데, 이에 반해 어떤 다른 이론은 지금 현상에 대한 설명은 좀 떨어지지만 예측을 훨씬 잘 할 수 있다든가. 하여튼 여러 가지가 서로 대립할 때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는 쉽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경험적 적합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거지요.
결국 이론의 합리성에 관해서 도구적인 합리성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며, 경험적인 적합성으로도 불충분할 수 있습니다. 결국에 가서는 과학 활동의 사회적 요소들, 가치와 의미의 문제 등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합리성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거고요.
과학의 역사성
다음에는 역사성이라는 문제입니다. 역사성은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과학은 역사성, 쉽게 말하면 전개과정이나 역사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전개 과정과 무관하다는 것, 곧 어떻게 출발했던 간에 결론은 하나로 도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출발점에 관계없이 동일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 한 가지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전개과정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우발성(contingency)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 거지요. 이 두 가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예를 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는데 꼭대기는 하나니까 어느 쪽으로 올라가도 다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한 가지 생각이고, 그렇지 않고 어느 쪽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모두 다른 데로 가게 되고, 과학이 다르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 게 다른 한 가지입니다.
하나만 얘기하고 끝내겠습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이 이런 것입니다.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은 앞에서 한 번 얘기했지만, 분명히 남성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지금도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남학생입니다. 물리학자도 대다수가 남자입니다. 생물이나 화학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물리학 사회가 매우 남성 중심적인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여자들이 물리학을 주도했다면 지금 물리학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럴지, 아니면 여자들이 했어도 결국 물리학의 모습은 지금과 똑같을지, 어느 쪽이겠냐는 겁니다. 두 가지 의견이 있겠네요. 어떻게 생각해요?
학생: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떻든 간에 동일한 결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요?
학생: 물론 발달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곧 어느 쪽은 더 발달하고 어느 쪽은 덜 발달하는 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끝까지 가면 같을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여자들이 주도해서 물리를 했어도 내용은 지금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혹시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학생 있어요?
학생: 저는 1년 전 쯤에 어떤 책을 읽었거든요? 물리학이 처음 유럽 고대에서 중세 시절에 자연철학으로 발전했고 그때 자연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종교와도 연관이 있었죠. 종교에서는 흔히 남성은 상위에 두면서 좋게 평가하고, 여자는 좀 안 좋은 쪽으로 평가를 한 걸로 기억해요.
그러니까 실제로 인류의 생각이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여성 중심에서 남성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성적인 대지, 곧 지구의 여신 가이아(Gaia)에서 남성적인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로 중심이 바뀌면서요. 그건 타당성이 있지만, 만일에 여자가 중심이 됐다면 과학의 내용이 바뀌었을까요? 사실 여러 가지 엇갈린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답이 있는 건 물론 아니고, 두 가지 답이 다 일리가 있겠습니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과학자도 인간이고 과학은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사회의 여러 가지 관념체계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사성이 없을 수는 없겠네요. 그러나 또한 반대 면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해석하는 것이므로 자연이라는 아주 강력한 구속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현상의 관측을 통해서 적어도 어림이라고 하는 일관성(consistency), 일치를 얻어야 하는데, 이는 상당히 강력한 구속 조건입니다. 그것이 자연과학이 다른 분야와 완전히 다른 특별한 형식을 가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결국 두 가지 면이 다 있습니다. 강력한 구속 조건이 있지만, 이것만 갖고 한 가지로 결정된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거기에 사회적 요소가 개입될 여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할 텐데 기회가 되면 얘기하지요.
오늘은 딱딱한 얘기들이 많이 나왔네요. 이것으로 서론을 끝내고 다음 시간부터는 물리학의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매주 화, 목, 금 연재)
* 이 연재기사는 지난 2008년 12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책갈피 출판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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