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혼돈과 함께 중요하게 인식된 문제로 '협동현상(cooperative phenomena)'을 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상들은 많은 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원자나 분자 하나하나를 보지는 못하며, 만지거나 보거나 하는 것들은 많은 수의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진 물질이지요. 그런데, 구성원끼리 서로 작용하는데 구성원이 많으면 그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구성원 전체, 곧 흔히 계(system)라 지칭하는 대상에 어떤 집단적 성질이 생겨납니다. 여러 구성원들이 서로 협동해서 생겨난다는 뜻에서 '협동현상'이라 부르며, 한편 구성원 하나하나와는 관계없는 집단성질이 생겨나므로 이를 '떠오름(emergence)'이라고 부르지요. 요즈음 한자어로 창발(創發)이라고 쓰는데 저는 이보다 우리 토박이말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협동현상으로 대표적인 것이 물과 얼음입니다. 몇 차례 말했지만 물은 H2O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온도를 낮추면 얼어서 얼음이 되는데, 얼음도 물과 마찬가지로 H2O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을 구성하는 H2O 분자와 얼음을 구성하는 H2O 분자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 분자들의 상호작용 때문에 어떤 때에는 물이 되고 어떤 때에는 얼음이 되는데, 그 둘은 성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액체인 물에는 빠지고 죽을 수도 있지만 고체인 얼음에는 빠질 수 없지요. 이렇게 매우 다른 것은 분자 하나하나의 성질과 관계없이 분자가 많이 모였을 때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집단성질이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H2O 분자가 한 개나 두 개, 다섯 개 정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물이냐 얼음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H2O 분자들이지 물이나 얼음이라고 구분할 수 없습니다. 물이나 얼음이라고 말하려면 많은 수의 H2O 분자가 있어서 서로 협동을 통해서 집단성질을 떠오르게 해야 하지요.
그러면 협동현상에 의한 가장 궁극적인 떠오름이 뭘까요? 저는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현상을 보이는 기본단위가 무엇인가는 어려운 문제지만 간단히 세포를 생각해 보지요. 세포는 여러 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과 흰자질(단백질; protein)을 비롯해서 지질(lipid), 탄수화물(carbohydrate), 무기물(mineral) 등 여러 가지로 구성돼 있는데, 명백하게도 그런 분자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저 분자일 뿐인데 그런 분자들이 많이 모여서 세포라는 집단을 만들면 그들의 상호작용, 즉 협동현상을 통해서 놀라운 생명현상이 떠오릅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일로서, 떠오름 현상의 궁극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떠오름 현상은 우리에게 과학에서 환원론 또는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대한 반성을 요청합니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전체를 하나하나 쪼개서 각 부분을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떠오름 현상은 구성원 하나하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성원 하나하나를 아무리 연구해봤자 많은 구성원이 모였을 때 전체의 집단성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환원주의 관점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모든 문학 작품은 글로 쓰여 있고, 이는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글은 24개, 영어는 26개의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쪽이든 모든 글자는 결국 0과 1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0과 1의 조합을 가지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컴퓨터는 이러한 이진법을 쓰고 있지요.
도서관에 가보면 책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서가 많은 도서관이 어디인가요? 국회 도서관인지 모르겠는데, 대학 도서관 중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가장 많을 겁니다. 책이 몇 권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으나 수백만 권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일본의 큰 대학 도서관에는 대체로 1천만 권이 넘지요. 10여 년 전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수준이 미국 100위 대학 도서관보다도 형편없이 뒤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훨씬 좋아진 듯합니다. 특히 예전에는 장서 수가 중요했는데 요즘은 전자 정보를 널리 쓰고 있고, 이를 많이 구축했어요.
어쨌든 따지고 보면 그 많은 책들이 담고 있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모두 0과 1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0과 1만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환원주의입니다. 하지만 0과 1을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서 그로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얻어질 수 있겠냐는 거죠.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떠오름 현상이며, 이를 표현한 말로 "더 많으면 다르다(More is different)"가 유명하지요.
노벨상을 받은 앤더슨(Philip Anderson)이라는 물리학자가 한 말인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갑이 "부자는 우리와 다르다"고 말하자, 을이 "그들은 돈이 더 많을 뿐이야"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갑이 다시 말하기를 "더 많으면 다르지", 이는 (구성원 또는 돈이) 많으면 단순히 양만 다른 것이 아니라 질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곧 정량적인 차이가 정성적인 차이를 가져온다는 뜻으로 존재의 양상을 나타내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는 단순한 환원이 속성이나 인식의 측면에서는 성립하지 않음을 지적하지요.
복잡계 현상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로 넘어가 볼까요? 21세기 자연과학, 특히 이론물리학의 과제로 가장 중요한 것이 '복잡계(complex system)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과학은 보편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면 보편지식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교적 쉽고 간단한 현상만 이론 체계를 구축해서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론물리학자들은 어려운 것은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 거의 빤한 것만을 다루면서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자연에도 복잡한 현상이 많이 있고, 그래서 전통적으로 물리학이 다루지 못했던 현상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생명 현상이나 인간의 사회 현상 같은 것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그 동안 이론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져 왔지요. 간단한 현상과 복잡한 현상, 어느 쪽이 자연의 더 본원적 모습인가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아무튼 20세기 후반부터 혼돈이나 협동현상, 떠오름 같은 개념이 정립되면서 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계에서 상호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의 이해가 시도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복잡해서 이론과학으로 다룰 수 없었던 현상까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된 겁니다.
20세기까지 지배적인 자연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결정론 및 환원론이었지요. 복잡계 현상을 이해하려면 이에 대한 수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21세기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출발해서 자연현상을 해석하자는 거지요. 이른바 결정론을 보완해서 예측 불가능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고려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환원론에 대비해서 전체론(전일론; holism)적 관점에서―환원론은 환원주의라고 쓸 수 있지만 전체론은 전체주의라고 하면 다른 뜻이 돼버립니다―자연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나무를 보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흔히 20세기에 사고의 틀을 지배하던 시대정신을 근대주의(modernism)라고 말합니다. 영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현대주의'가 되겠지만 '근대주의'가 더 정확한 표현인 듯합니다. 대체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에 대응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탈근대주의(postmodernism)'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들어 봤죠? 이는 혼돈과 떠오름, 그리고 복잡계 현상 등의 관점에서 해석과 관련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탈근대주의는 아직 실체가 모호해 보입니다. 저는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와 관련해서 물리학자 소칼(Alan Soka)l이 인문학자에 대한 조롱 섞인 비판으로 촉발시킨 이른바 '지적 사기' 논쟁은 유명합니다. 양자중력(quantum gravity)이라는 난해하고 아직 불확실한 물리학의 개념을 아무렇게 따다가 철학적으로 적당히 포장한 풍자의 글을 - 제목("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부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 인문학 학술지에 발표하고서 곧이어 그 실상을 폭로하는 글을 다른 학술지에 발표해서 논쟁이 시작되었지요. 여기에 가담한 인문학자 중 한 사람인 라투어(Bruno Latour)의 ≪우리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라는 저서도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이 되지 않아 아쉽지만, 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 논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 저서지요.
<매주 화, 목, 금 연재>
* 이 연재기사는 지난 2008년 12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라는 제목의 책으로(책갈피 출판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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