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 때보다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 때 기계제작 수준이 높아졌다고 이야기한다. 정밀도 등이 대폭 늘어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비행기보다 전투기, 전투기보다 우주발사체를 만들 수 있으려면 기계제작 능력은 또다시 대폭 늘어나야만 한다. 우주발사체를 스스로 제작하여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국가를 일컫는 '스페이스 클럽'에 속한 국가가 10개국밖에 안되는 이유가 그만큼 어려운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정밀 공작기계를 만들 수 있는 국가가 스페이스 클럽에 속한 국가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보아도 기계제작 능력이 최첨단에 도달해야 우주발사체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과 같이 못사는 나라가 어떻게 최첨단 기술에 해당하는 우주발사체 제작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북한과 관련한 정보가 제한적으로만 공개되어 있어 이렇게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힐 수 없다. 하지만 질문 영역을 좀 더 넓혀 북한이 어떻게 기계제작 기술(기계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라면 공개된 정보만으로도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북한의 기계공업 상황
식민지 시기, 한반도를 강제 점령한 일본은 광물 매장량이 많고 평야가 적은 북쪽 지역에 주로 공업 분야 업체를 배치시켰고, 평야가 많고 기후가 온난한 남쪽 지역에서는 농업 분야를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38선으로 남북이 갈린 이후에도 북쪽 지역은 남쪽 지역에 비해 공업 부문의 수준이 높았다. 해방 직후 남북의 자산 분포를 보면, 전체적으로 남북이 비슷하였지만 광공업 부문은 [남:북]이 [28:72]로 북쪽 지역이 월등히 높았다.
아래 <표 1>은 일제의 해외 자산 중에서 남북한별 분포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표 1> 자료 : SCAP(Civil Property Custodian, External Assets Division, General Headquarter), Japanese External Assets as of August 1945, (1948. 9.30). (허수열, 「개발없는 개발: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은행나무, 2005), 314쪽에서 재인용) |
그런데 위 표를 잘 살펴보면 아주 특이한 지점이 하나 발견된다. 광공업 부문 중 유독 '기계기구공업 부문'만 남북이 [17:83]으로 남쪽 지역이 월등히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공업 분야가 기형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공업 분야 운영에 필수인 기계, 기구 제작 능력이 빠진 채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주발사체를 제작하는 기술 분야인 기계 기구제작 능력이 다른 분야에 비해 월등히 뒤떨어진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에 북한 지도부는 기계공업 분야 발전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해방 후, 기계공업 발전을 위한 노력
이렇게 뒤떨어진 기계 기구공업 분야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을 선택한 북한에 있어 가장 큰 약점이자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전은 물론, 전쟁 당시에도 기계공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 당시 피난 가면서 공장 설비를 비롯한 기계류를 이고 지고 도망가거나 땅에 파묻는 등의 방법으로 잘 보존하려고 노력한 이유가 망가졌을 때 고칠 수 있는, 혹은 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북한에 있는 유일한 핵심 기계가 고장 나면 전체 시스템이 멈춰 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키려 애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대중운동인 '천리마운동'이 1956년 12월 강선제강소에서 시작된 것도 당시 북한에서 단 한 대뿐이었던 '압연기'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재 생산의 마지막 단계를 담당하는 압연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경제 대부분 분야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약한 고리'인 강선제강소에 김일성이 직접 찾아갔던 것이 천리마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에 막 수리를 끝낸 '압연기'가 설계 용량을 뛰어넘는 계약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현장 노동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중간 관리자들이 머뭇거리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 : 기계 보급량 확대
1957년, 1958년 2년 동안 계획에 없었던 성과들이 달성되면서 1959년 천리마운동은 북한의 특징인 집단주의와 결합되며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기술발전을 통한 '질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종의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을 추진한 것이었다.
이 당시부터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은 부쩍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1961년부터 시작되는 1차 7개년계획에서는 '기술혁명'이 우선적인 과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북한 공업 분야의 근본적인 한계인 기계공업 분야는 여전히 다른 분야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바로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이었다. 1959년에 시작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은 말 그대로 생산현장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계 기구 제작 능력을 키우기 위해 공작기계를 가지고 일반 부속을 만들면서 틈틈이 공작기계 자체를 몇 대 더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즉 공작기계로 일반 부속이 아니라 공작기계 자체를 만들어 기계제작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이 시작될 때에는 주로 선반, 바이트 등을 비롯한 절삭기구 중심이었지만 1960년부터는 한 단계 수준을 높여 프레스와 같은 압착가공기구를 중심으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이 전개되었다. 낮은 수준부터 시작하여 점차 높은 수준으로, 작은 규모의 기계에서부터 대형 기계로 점차 발전하였던 것이다.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이 공작기계 대수를 늘리는 데 급급했다고 하면서 이 운동의 영향력을 평가절하하는 연구도 있지만, 기계 기구제작 능력이 매우 떨어졌던 당시 북한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 운동이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공작기계 보급대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상황에서 공작기계 보급대수를 급격히 늘렸던 것이다. 즉 질적 성장까지는 아니었지만 양적 성장은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1959년 말 전국의 공작기계 보급 대수가 1958년에 비해 1.8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으로 인해 대부분 공장에서 부속 품과 공구 등을 생산하는 공무 직장의 능력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에 원래 부속 품과 공구를 생산하여 공급해줄 임무를 맡았던 전문 기계공장의 부담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만큼 이들 전문 기계공장들이 전문적인 기계 설비를 생산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은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북한 남포시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 ⓒ평양조선신보=연합뉴스 |
실제로 1958년부터 굴착기(락원기계공장), 트랙터(기양농기계공장), 오토바이, 화물자동차(덕천기계공장), 불도저(북중기계공장) 등을 비록 역설계 방식(Reverse-engineering)이었지만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된 북한의 전문기계공장들은 1959년부터 이들 기계제품들을 정상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락원기계공장에서는 5900여 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무게 300여 톤짜리 '8m 대형 타닝반[터닝반]'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화물자동차를 생산하는 덕천기계공장과 트랙터를 생산하는 기양기계공장에서 자동차 실린더를 가공하는 '6축 보링반'과 트랙터 본체 좌우 측면의 38개 구멍을 한꺼번에 뚫는 '38축' 등을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부속이나 공구를 생산하는 부담이 줄어들어 전문 기계생산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의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 : 대형화, 자동화, 전문화 기계 개발
'제2의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은 1982년 11월, 김일성이 '자동화된 공작기계'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운동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제안에 대해 과학원의 과학자, 기술자를 중심으로 사업 가능성에 대한 타진과 점검 이후 새로운 운동은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전자화, 수자조종화된 대형 및 특수정밀 공작기계'들을 개발하기 위한 '제2의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은 1985년 6월부터 1988년 9월까지 전개되었다. 그 사이에 NC공작기계인 '구성-105호'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북한의 CNC공작기계의 원조라 불리는 '련하기계'의 원형(prototype)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제2의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1959년의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가 부정적이므로 이것 역시 성과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평가만 있다. 하지만 기술혁신의 관점으로 볼 때 1차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이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CNC 공작기계 제작 기술의 발전을 비추어 볼 때 2차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북한의 기계제작 능력이 이 당시를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88년 11월에 개최된 제6기 제14차 전원회의 : CNC 개발의 출발점
2차 공작기계새끼치기 운동이 마무리되면서 개최된 제6기 제14차 전원회의는 북한 기계공업, 좁게는 CNC 공작기계 제작 능력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당시 회의에서는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발전에서 전환을 일으킬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구성-105호'를 계열 생산하는 분공장을 '구성기계공장'이 포함된 '4월3일공장'에 군인을 동원하여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역량과 사업집행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학원 산하에 '전자자동화과학 분원'을 설치하고 '전자 자동화 공업위원회'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1991년 10월에 개최된 '전국과학자대회'에서도 이러한 정책적 방향을 중점적으로 토론, 강조하였다. 1995년 김정일이 처음 보았다고 한 CNC 공작기계는 구성-105호를 토대로 발전시킨 '구성-10호 만능선반(4축)'이었던 것 같다. 이를 기반으로 2001년에 개량한 것인 'CNC 구성-10호'였다. 이는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들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우주발사체 제작에 필수적인 고급CNC 공작기계
우주발사체 제작은 굉장한 정밀도가 요구되는 과정이다. 이를 사람의 손으로 측정하면서 진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밀한 이송능력과 계측능력, 그리고 자동제어기능이 갖추어진 고급 CNC 공작기계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CNC 공작기계를 공개한 것은 대부분 인공위성 발사시험 직후였다. 1998년 8월 광명성 1호 발사 시험 뒤에 'CNC 구성-10호'가 공개되었다. 'CNC 구성-10호'가 언론에 소개된 것인 2001년 1월 경이었고 이미 수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므로 이미 1998년 즈음에는 이 기계가 북한 내부에서 활용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2009년 4월 광명성 2호 발사 시험 뒤인 2009년 8월부터 '첨단을 돌파하라'라는 로동신문 정론이 발표되면서 5축 CNC 공작기계를 이미 개발했다는 주장이 외부에 알려졌다. 2009년 1월에 '5축동시조종 수력타빈날개가공반'과 '새 형의 전용수자조종장치'가 만들어졌다는 로동신문 보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2009년 이전에 이미 5축 CNC 기술이 확보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인공위성 발사 시험의 성공은 북한제 기계제품 신뢰도 향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북한의 기계공업은 북한 지도부가 무척 애써서 발전시킨 분야다. 해방 직후 남쪽보다 뒤떨어진 수준을 20년가량 지나서야(1960년대) 다른 분야와 비슷한 수준에 올랐고 다시 20년가량 지나서야(1980년대) 첨단 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인 흐름에서 북한의 우주발사체/미사일 제작 능력은 기계공업 전반적인 수준을 높이면서 발전한 것이라 추정된다. 따라서 인공위성 발사 시험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북한이 만드는 기계제품의 신뢰도가 향상되는 효과가 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북한이 억지로 인공위성 발사시험을 강행하는 이유가 앞으로 제작하여 팔고 싶은 '북한제 기계제품'의 신뢰도와 상관있을 듯하다. "첨단 수준의 기계제작능력을 보유한 '북한'이 제작한 제품, 성능을 보장합니다!"라는 광고 카피를 만들기 위함일 수도 있다.
북한 과학기술 전문가이자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 강호제 박사의 '과학기술로 북한 읽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북한 연구나 북한에 대한 보도에서 과학기술과 관련한 내용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학기술과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면 북한의 움직임과 그 의도를 좀 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로 북한 읽기' 에서는 간과하기 쉬운 북한 과학기술에 대한 이슈를 제대로 짚어보고, 이를 통해 북한의 움직임을 새롭게 해석해보려 합니다. 강호제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북한 과학기술정책사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석사학위논문으로 현대북한연구 제1회 논문상, 박사학위논문으로 북한연구학회 신진학자 학술상을 받았습니다. 이밖에 강 박사는 월간 <민족 21>에서 '에피소드로 본 북한 과학 기술사'를 연재했고,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주간 웹진 칼럼을 3년가량 연재했습니다. 강호제 박사는 현재 북한 과학기술을 통한 북한 역사 해석,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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