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유령에 사로잡혀 있는가? '과거 핵'의 유령에.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 제재 문제가 잠정적으로 해결된 후 지난해 말만 해도 거칠 것 없이 나가는 것 같던 6자회담이 주춤하고 있다. 2002년부터 떠돌던 북한의 '과거 핵 활동' 의혹 때문이다.
북한이 과거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운영했다는 고백을 미국은 요구하고 있고, 북은 이러한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2년에도 '과거 핵' 의혹은 제네바 합의를 무력화시켰고, 결국 2006년 북의 핵실험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이어졌다. 미국은 1993-94년에도 북의 '과거 핵' 의혹 때문에 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갔던 경험이 있다.
2008년 또 다시 등장한 '과거 핵'의 유령이 한반도 비핵화의 발목을 또 잡을 것인가?
'과거 핵'과 비핵화
작년 10월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에 합의한 이후 북이 핵시설 불능화 조치는 비교적 충실히 이행해왔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영변에 있는 핵발전소, 연료공장 및 재처리시설을 적어도 1년간은 가동할 수 없도록 하는 11개 조치에 전문가 그룹이 합의한 이후 북은 한 개의 조치만을 남겨두고 있다. 원자로에서 핵 연료봉을 인출하는 작업을 하던 북이 작년 말 안전상 이유로 작업 속도를 늦춘 것이다.
올해 들어 북한 당국이 미국 등 관계국들의 의무 이행 부진에 불만을 표시하며, '불능화 속도조절'을 내세우고 나와 마지막 불능화 조치는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불능화는 거의 완결 단계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북의 핵활동 보고이다. 이 보고에서도 북이 플루토늄 추출량을 30kg정도라고 한 것은 추출 가능량의 최소치에 근접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핵 보고에서 걸림돌은 우라늄농축 활동과 관련한 것이다. 북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반면 미국은 북이 비록 낮은 수준이나마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운영했다고 보고 '진실고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농축 프로그램은 다시 원심분리기와 알루미늄 강관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초점이 모여진다. 북은 미국과의 직접 협상에서 알루미늄 강관을 다수 수입한 것은 인정했지만, 이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이용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미국 관계자에게 이를 입증하기 위해 강관 샘플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알루미늄 샘플에서 농축 우라늄 흔적이 발견됐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기는 했으나, 북이 구입한 다량의 알루미늄 강관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사용되었고,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에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알루미늄 강관의 용처를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북의 우라늄 프로그램이 핵무기 프로그램이었느냐의 논란을 종식시켜줄 열쇠로 남아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원심분리기의 도입과 운용 여부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002년 미국은 북이 수천기의 원심분리기와 알루미늄 강관을 필요로 하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가동해 핵무기를 제조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한 강석주 북한 외무성 부상의 반응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인정이었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 정보당국이 애당초 내세웠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을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으로 수정, 정보 판단의 실수를 간접적이나마 인정했다.
즉 원심분리기를 북이 도입해서 운영을 했다고 하더라도 핵무기 생산 프로그램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미국 정보당국이 인정한 셈이다.
따라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지 핵무기 프로그램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 현재 불거지고 있는 '과거핵' 의혹을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이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이냐의 문제도 현재의 논란을 풀 수 있는 출발점이다. 북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보고하기로 한 것은 2005년 9월 9.19공동선언에서 북이 포기하기로 약속한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북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을 과거에 운영했다고 하더라도 이 프로그램이 '현존'하지 않는 것이라면 보고할 의무가 없다는 합의문의 기술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 비핵화가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현존'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이미 불능화 내지 포기된 프로그램은 비핵화의 한 과정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당연론 때문이다.
즉 북의 '과거 핵'을 둘러싼 공방은 '진실게임'이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화이어야 한다는 대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알루미늄 강관의 용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라늄 핵무기 프로그램이 '현존'하는지 이미 불능화나 폐기의 단계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는 '과거 핵'의 논쟁을 알루미늄 강관의 문제로 집중시키고 이의 확인, 검증으로 가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큰 목표를 잃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나무에 눈이 팔려 숲은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 핵 유령이 등장할 소지 없애야
한반도 비핵화라는 큰 숲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양자에 있다면, 작년 10월 합의한 2단계 이행조치를 다음과 같이 시계열적으로 배열하는 것도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북미 양국이 상호교류를 계속 하는 동시에, 북이 먼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완료하는 것이다. 이와 병렬적으로 미국은 두 개의 약속 사항 중 상대적으로 손쉬운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는 정치적 조치를 취한다.
이에 호응하여 북은 핵시설에 대한 보고를 시행하고, 우라늄 농축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와 병렬적으로 미국이 테러지원국가에서 북을 제외하는 조치를 취하면 2단계 이행조치가 완료되고, 3단계를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단계 이행조치는 각국의 의무를 병렬적으로 나열만 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과거 핵' 유령이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소지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이 '과거 핵'의 유령을 잠재울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은 각국의 의무를 시계열적으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해서라도 유령을 떨치고 한반도 비핵화의 미래로 성큼 나서야 할 아침이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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