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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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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19>

일본 이야기 <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두 차례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인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아시아의 종주국을 이긴 후 내친 김에 유럽 강대국인 러시아까지 물리쳤으니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신흥졸부가 세상사 녹록해보이듯이 일본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優勝劣敗(우승열패), 뛰어난 놈은 이기고 약한 놈은 진다, 그리고 弱肉强食(약육강식), 약한 놈은 고기가 되고 강자는 그 고기를 먹는다, 또 適者生存(적자생존), 잘 적응하는 놈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19세기 후반 유럽 강대국 사이에 만연한 풍조였다.
  
  인간이 자연에서 최고봉에 오른 것은 최적의 진화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미신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이성을 무기로 거침없는 진보를 거듭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진보의 조건을 갖춘 이는 서유럽 사람들이며, 나머지 여전히 무지몽매한 아시아나 아프리카 인들은 다소 거칠게 다루어서라도 계몽시킬 필요가 있다. 어차피 세상과 자연은 강한 자가 다스리는 곳이니 성가시더라도 기꺼이 다스려주어야 한다.
  
  20세기 초반 이런 생각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이에 서구 문명과 기술을 누구보다 빨리 흡수한 일본인들은 스스로가 비록 종자는 다를지라도 바삐 유럽인이 되어야한다고 느꼈다. 두 차례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런 생각에 대해 하등의 회의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짝퉁 유럽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본의 상류계급들이 유럽식 복장을 걸치고 유럽식 정원에서 유럽식 음악을 들으며 유럽식 음식으로 차려진 유럽식 가든파티를 열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얼마나 우아하다고 느꼈을까!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이런 현상과 지향을 일본인들은 脫亞入歐(탈아입구)라고 칭했다. 열등한 아시아를 벗어나 우등한 유럽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상을 밖으로 자랑하고 다녀도 그 꼴 보기 흉하지만 반대로 조상을 부끄럽게 여길 때 魂魄(혼백)이 날아가는 것이고, 타락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본사람들은 잠시 망각했었다.
  
  세상에 제일 볼썽사나운 것이 짝퉁이다. 似而非(사이비)란 '비슷하지만 아닌 것'인데, 일본은 사이비 유럽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는 더욱 한심한 꼴이었다.
  
  좀 배우고 행세하는 사람들은 온통 지배국 일본의 짝퉁 유럽 풍조를 받아들였으니 짝퉁의 짝퉁 꼴이 되었다. 분명 일제 치하에서 우리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며 먹고사는 것도 나아졌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혼을 부인했고, 짝퉁의 짝퉁을 받아들였다.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가장 큰 폐해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었던 것이다.
  
  연유야 어떠하든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등극했다.
  
  1895 을미년에 시작된 국운의 상승기는 30년 뒤인 1925 을축년으로 정점을 맞이했는데, 때마침 1926년에 히로히토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리하여 다이쇼(大正)시대가 끝나고 쇼와(昭和)시대로 옮겨갔다.
  
  그러니 쇼와 시대는 일본의 국운이 서서히 정점에서 내리막길로 막 접어드는 때였다. 그 시대는 나름대로 일본의 문치(文治)가 빛을 발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29년에 발생한 세계대공황과 그로 인한 보호무역주의는 일본 경제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이에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군사모험주의는 1931 辛未(신미)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웠지만, 이는 또 다시 6년 뒤인 1937 丁丑(정축)년의 '중일전쟁'으로 이어졌다.
  
  또 다시 중일전쟁은 연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갔다.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은 辛未(신미)와 辛巳(신사)년에 발발했다. 일본이 乙木줏(을목)이니 辛金(신금)이라는 기운은 金克木(금극목)하여 일본이 어려운 때라는 말해준다.
  
  정리하면 청일전쟁은 1894 甲午(갑오), 러일전쟁은 1904 甲辰(갑진)이니 일본이 甲木(갑목)의 기세를 빌어 의기충천했던 전쟁이었다.
  
  반면 만주사변의 辛未(신미), 태평양 전쟁의 1941 辛巳(신사)는 일본이 곤경에 처한 나머지 군사적 모험에 나섰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말해준다.
  
  그 결과로 1945 乙酉(을유)년에 일본제국은 패망으로 해체되었다. 이는 운세가 정점에 달했던 1925년으로부터 20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은 미군 지배의 軍政(군정)체제에 들어갔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본으로 개조되어야 했다. 특히 기술력이 살아있던 일본에게 1950년 한국전쟁은 새로운 경제적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일본에게 또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주었으니 그 또한 1955 乙未(을미)년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을미의 해에 일어선다.
  
  이 해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대 보수정당이 연합하여 '자민당'이 탄생했던 바, 이것이 현대 일본의 출발점이었다.
  
  미국의 후원으로 일본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였고 결과 경제대국 기술강국 일본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사실 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 이래 그토록 염원했던 소원이었다.
  
  일본은 새로운 출발을 한 1955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65 乙巳(을사)년에 우리와도 새롭게 외교를 수립했다.
  
  이 일은 역사의 발전이었다. 그로부터 60년 전인 1905년에는 사실상 주권을 넘겨주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요당했던 우리였지만, 이제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관계에서 국교를 정상화했으니 말이다.
  
  역사는 이처럼 60년을 한 주기로 하여 발전한다.
  
  페리 제독에 의해 19세기 중반 일본이 문호를 열고 새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1965년 한일관계 정상화를 통해 주도적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우리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1964년 우리 국운의 융성기가 시작되면서 선진 일본으로부터 우리는 실로 엄청난 것들을 배웠고 받아들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인 전자와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기술은 대부분 이웃 일본으로 흘러든 것이며, 법률과 기타 갖은 시스템이 그로부터 왔기에 이득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일본은 우리에게 한 번은 치욕을, 한 번은 도움을 주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웃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알 수 있다. 要(요)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어떠하냐의 문제인 것이다.
  
  1965 乙巳(을사)부터 긴밀해진 일본과의 관계는 다시 30년이 지난 1995 乙亥(을해)년부터 또 다시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60년의 절반이 지났으니 음양이 교차하는 것이다.
  
  일본 역시 그 무렵부터 버블 붕괴로 힘을 잃기 시작했고, 국운의 정점인 1985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나 쇠퇴기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1994년부터 쇠퇴 또는 조정기로 들어섰다.
  
  긴 안목에서 볼 때, 1965년에서 60년이 지난 2025 년이 되면 그간의 앙금을 다 씻어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웃이 될 것이라 본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단기적으로 우리에게 굴욕이었지만, 역사의 긴 흐름을 놓고 본다면 좋은 자극이 되었다고 여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처럼, 그리고 살다보면 치욕도 있고 영광도 있듯이 말이다.
  
  그간의 치욕을 갚는 길이 우리가 거꾸로 일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저 우리가 바로 서면 일본에 대해 그리고 중국에 대해 친구가 되자고 기꺼이 손을 내밀면 되는 것이다.
  
  (알리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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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는 02)3442-4393, www.assetclass.co.kr 로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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