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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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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18>

일본 이야기 <중>

일본의 코드는 乙丑(을축)이다. 그렇기에 乙未(을미)를 만나면 변화발전의 계기를 삼는다.

큰 주기인 360년의 흐름으로 볼 때 일본의 국운이 바닥을 치고 올라서기 시작한 起算點(기산점)은 1835 乙未(을미)년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현재 60년이 세 번 變轉(변전)하여 2015 을미년으로서 최고의 주기를 맞이하려는 시점에 와있다.

1835년은 도쿠가와 막부가 가져온 오랜 평화로 인해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태동할 때였다. 그 징조로서 일본에는 1800년대 초반 무렵부터 높은 교육열풍이 불었다.

지방정부에서 운영하는 藩學(번학)과 사설 교육기관인 私塾(사숙),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데라코야(寺子屋)'라고 하는 초등교육기관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데라코야는 원래 절에서 운영하던 학교로서 승려가 교사직을 맡았지만, 부유한 도시 상공인이나 실직한 무사계급인 浪人(낭인)들이 데라코야를 여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낭인들은 실직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교양을 바탕으로 서민들을 가르쳤던 까닭에 학교가 더욱 융성해졌다.

서민들은 데라코야에서 읽기와 쓰기, 셈법, 그리고 예절을 익혔으며, 더러 茶道(다도)라든가 꽃꽂이, 악기연주와 같은 고급 교양을 가르치는 수준 높은 데라코야도 있었다.

일본의 높은 교육열은 일본이 1858 戊午(무오)년에 페리제독의 내항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한 이래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개혁을 통해 삽시간에 아시아의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메이지 유신은 결국 중앙의 강화를 통한 서구화였기에 그 결과 지방정부인 藩(번)의 해체를 가져옴으로써 일대 혼란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 이전의 막부 체제에서 지방영주였던 藩主(번주)들은 상당 부분 자치권을 지녔었고, 그 번주에 종사하는 무사계급들로서 사회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번이 폐지되자 그에 종사하던 무사계급들은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국가 전체에 걸쳐 먹이사슬이 한꺼번에 동요를 하니 그 혼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야말로 혼란이고 혁명이었다.
무사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사람은 조선 정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이는 전쟁 바람을 통해 무사들의 입지를 다시 강화해보려는 의도가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내란이 일어났고 이를 서양화된 신식의 정부군이 진압하면서 끝이 났다.

이를 '西南(서남)전쟁'이라 하는 바, 일본의 국운이 정점에서 내리막으로 달리기 시작한 1855 乙丑(을축)년으로부터 22년 뒤인 1877 丁丑(정축)년에 발생했으니 메이지 유신 이후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기막힌 것은 일본은 그 어려운 난리 통에도 불구하고 신식 군함을 보내어 으름장을 놓는 수법, 서구 열강이 썼던 방식을 고스란히 조선에게 강요했다는 점이다. 정말 잽싸기도 하지. 그 결과가 1876 丙子(병자)년의 수호조약이었다.

여기서 잠시나마 구한말 일본의 대조선 진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1874 甲戌(갑술)년부터 조선정벌정책인 征韓論(정한론)을 내부정책으로 삼아 조선 진출을 결정하고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1884 甲申(갑신)년에는 개화파인 김옥균을 앞세워 政變(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조선에서 세력 철수, 청의 종주권을 인정.

1894 甲午(갑오)년에는 동학군의 봉기를 기화로 파병한 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입지 구축.

1904 甲辰(갑진)년에는 조선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와 전쟁하여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확인하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처럼 일본은 갑과 을의 해마다 우리 쪽으로 진출해왔음을 알 수 있다. I

그리고 국운의 상승기였기에 서구 열강의 기술과 체제를 신속히 받아들여 국력을 강화한 일본은 1875년부터 30 년 만에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조선을 일본의 배타적 세력권으로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30년은 60년의 절반이니 하나의 흐름이 단락을 짓는 기간이다.

앞서 일본은 1835년부터 흥기하여 186년에 정점에 달했고 다시 내부 혼란을 겪었다. 그러다가 또 다시 발전의 계기를 만난 것은 1895 년이니 이때의 청일전쟁이야말로 일본이 산업화를 통해 부국강병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엄청난 도화선이 되었다.

청일전쟁 당시만 해도 일본의 군사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청 역시 洋務運動(양무운동)으로 쇄신을 추진하고 있었다. 해군도 오히려 청의 北洋(북양)해군 쪽이 군함도 신식이고 규모도 컸지만 서구 기술의 소화 정도에서 일본이 조금 앞섰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튼 무려 2000년간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인 중국을 꺾었다는 것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자신감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결국 손문의 三民主義(삼민주의)를 통해 辛亥革命(신해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일본은 더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보다 강력한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무력한 조선은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한다는 것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이제 더 이상 서구 열강의 침탈 대상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작은 유럽 열강이었다. 서구 열강들도 점차 일본을 대우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흐름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찾아왔으니 바로 러일 전쟁이었다.

러일 전쟁은 그 배경에 한 때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쇠퇴가 깔려있다.

대영제국은 타국과 동맹을 맺은 적이 한 번도 없던 나라였다. '영예로운 고립'이 그들의 자랑스러운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 극동 아시아까지 해군력을 동원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영국은 모험적인 시도를 택했다. 당시 부동항을 얻고자 아시아 쪽에서 남진정책을 펼치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뒤를 보아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이를 '영일동맹'이라 하며 1902 壬寅(임인)년에 체결되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영국에서는 해군 기술을 배우고 최신예 군함도 발주하게 된다. 한편 육군은 독일 모델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당시 러일 양국은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하고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이른바 滿鮮交換(만선교환)을 협상 중이었다. 결국 이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일본은 그간 열심히 키운 군사력으로 모험에 나섰던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1895년부터 국운의 상승기였고 러시아는 1888 무술년의 정점에서부터 15년이 지난 가파른 하강기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비능률과 비효율의 나라였고 겹쳐서 보급선이 모스크바에서 멀고 먼 극동 아시아에서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서구 열강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또 인도와 같이 영국의 식민지이던 아시아의 각 나라들은 일본이 강대국인 러시아를 꺾었다는 소식에 환호작약했다.

西歐(서구)가 무조건 이기지는 못한다는 사실, 이는 특히 중국과 인도 사람들에게 우리도 잘 하면 일본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에 따라 급기야 일본의 도쿄는 중국 유학생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조선 역시 동경 유학생이 신시대를 선도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서구 열강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러시아라는 강대국을 꺾은 일본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모델이 된 것이다.

한일합병에 대해 조선 지식인과 지주층의 강력한 항거가 없었던 배경에는 이런 분위기가 적지 않은 작용을 했었다고 여긴다.

또 패전국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근원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결국 1918년 러시아 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을 둘러싸고 일어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중국은 청 제국이 붕괴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러시아는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바탕이 되었으니 한반도는 현대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온 또 하나의 핵심 무대였던 것이다.

한반도의 고달픈 운명은 이로서 끝나지 않았다. 제 2 차 대전 이후 유럽세력의 몰락으로 생겨난 힘의 공백을 메운 미국과 소련의 兩强(양강)에 의해 치러진 冷戰(냉전)전에서 한반도에서만 치열한 熱戰(열전)이 벌어졌으니 기구하고도 가혹한 우리 겨레의 운명이었다.

이처럼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니 당연히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많은 점이 있겠지만, 특히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대륙 세력이 바다로 나가고 또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들어가는 요충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자칫 휘둘리기 십상이니 우리 겨레는 영악해야 또 지혜로워야 하는 것이다.

일본 이야기는 다음 회로 정리하고자 한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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