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는 중국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러시아에 대해 두 번에 나누어 얘기하겠다.
러시아를 생각하면 두 명의 인물이 먼저 생각난다. 우선은 표트르 대제, 몽골풍의 러시아를 서구화를 통해 유럽의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위대한 군주였다.
또 한 사람은 스탈린, 무지막지한 철권통치를 통해 소련을 한 때 미국과 함께 양극 체제의 한 축으로까지 부상시킨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냉철하고 영리하며 잔혹했다.
특히 '일국사회주의'를 시도한 스탈린의 잔혹함은 역사에 그 유례가 없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적 토대에서 국민경제를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계급투쟁이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는 역사상 전례 없는 테러와 학살이었다.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말한 격렬한 계급투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1934년의 당대회의에서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고, 중앙위원회 후보로 선발되었던 139명 중에서 98명이 처형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 '우편향주의자' 등등 일단 '반혁명'으로 낙인이 찍히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당원만 희생된 것이 아니라, 군 장교와 사회 경제 전반의 비중 있는 인사들도 모조리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군의 경우, 군사령관 15명 중 13명이, 군단장 195명 중 110명이, 사단장과 여단장의 절반 정도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혁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일들은 광란(狂亂)이란 표현이 아예 무색하다. 인류 역사상 어떤 테러도 스탈린이 자행한 인간 도륙에는 미치지 못한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로이 메드베제프'는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이후 10년 동안의 희생자가 무려 4천만 명에 달한다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소련 인구가 1억 6천만 정도였으니 대략 인구의 1/4 정도가 억울하게 희생을 당한 셈이다.
1500만 명이 처형되었고, 1100만 명 정도가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토지를 빼앗기고 동토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굶어죽은 자의 수는 대략적인 통계에도 잡혀있지 않다. 그 중에는 만주에 살던 우리 교포들도 상당 수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무서웠던 암흑시대에 테러의 희생자가 실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일이 흘러야 밝혀질 것이다.
20세기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남긴 단 하나의 교훈이 있다.
이념(理念)이라든가 주의(主義)라는 것을 극단으로 행하면 생지옥이 열린다는 것이다. 하나의 이념이 절대 권력으로 자리하는 세상을 만들 바에는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얽혀 돌아가는 세상이 훨씬 좋은 세상이라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은 이성(理性)과 합리(合理)를 믿은 근대 유럽의 계몽사상이 할퀴고 간 엄청난 해악(害惡)이었다.
이처럼 공산 혁명의 깃발 아래 생지옥을 만들었던 나라의 본래 이름인 러시아는 어떤 경과를 밟아 역사에 등장했을까?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 모스크바 일대에 기반을 잡고 있던 모스크바 공국을 모태로 한다. 1600년대 초반 왕위 공백으로 생겨난 일대 혼란기에서 귀족들의 합의로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짜르(czar)로 선출된 것이 중흥의 계기가 되었다.
1613년에 등장한 새 왕조를 역사가들은 '로마노프' 왕조라 부른다. 그리고 이 로마노프 왕조가 문을 닫으면서 생겨난 엄청난 변화가 러시아 혁명이었다.
이 세상은 360년을 하나의 주기(週期)로 하고 그 속에는 60년이라는 작은 주기(週期)가 여섯 번 반복된다.
매 60년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지만, 그 중에서 전반의 세 주기인 180년간은 궁극적으로 상승세를 보이며 그 다음의 세 주기 180년은 하락세를 보인다.
다시 말해 전반 180년간의 상승기는 매 60년마다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면서 올라가는 흐름이고, 후반 180년은 매 60년마다 상승과 하락을 보이면서 내려간다. 오름 속에도 하락이 있고 하락 속에도 상승이 있으니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주된 흐름이냐는 것이다.
이쯤에서 러시아를 말해주는 음양오행상의 코드는 무술(戊戌)이며, 무술은 무진(戊辰)을 만나면 발전의 계기를 삼게 된다. 러시아가 일어서는 시기는 무진(戊辰)년이라는 얘기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1613년에 시작했지만 그 기운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을 1628 무진(戊辰)년으로 볼 때, 1918 무오(戊午)년의 러시아 혁명은 다섯 번째 작은 주기의 말미 혼란기인 290년차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리고 1628년에 60을 여섯 번씩, 360을 더하면 1988년이 되는데, 그 360년 중에서 마지막 60년 주기의 출발점인 1928년에 소련과 스탈린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그 마지막 하락기 중에서 상승의 출발점인 1928 무진(戊辰)년에 권력을 잡았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란 결국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간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그는 모든 반대파를 반혁명이란 굴레를 씌워 무자비하게 정리해가면서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1928년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소련식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의 강령을 확정했다.
스탈린은 대숙청을 통해 소위 스탈린 헌법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철저한 독재와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무서운 독재와 테러 하에서 소련은 엄청난 발전을 보였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의 지독한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전사가(戰史家)들에 있어 소련이 독일에게 승리했다는 사실은 커다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결과를 놓고 원인을 찾아서 해설할 뿐, 승리의 진정한 원인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 사실을 놓고 최근 러시아에서 발간된 책을 비롯하여 독소 전쟁에 관한 적지 않은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결국 결론은 독일은 운이 하강이었고 소련은 국운이 융성하게 상승하는 운이었기에 그렇다고 여긴다.
수많은 변수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인간의 눈으로 밝혀보자는 시도 자체가 한계가 있다는 생각, 돌아와서 소련은 1928년부터 30년간 상승기이니 이긴 것이고, 히틀러의 독일은 1950년까지 이어지는 30년 하락기였기에 결국 전쟁에 지고 말았다는 생각이다.
스탈린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골칫거리 독일을 미국과의 분할 점령으로 무력화시킨 후,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하고 모택동의 공산 중국과 한국 전쟁을 통해 한반도 북단을 경계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제국 미국과 치열한 대치 국면을 형성했다.
1928년에 상승을 시작한 소련은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했고, 경제 발전과 국력 신장의 토대 위에 새롭게 등장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독재와 신격화를 비판하면서 어느 정도의 자유화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소련은 상승으로부터 30년이 되는 1958 무술(戊戌)년에 가서 그 힘이 정점에 달했다.
그 즈음 소련의 자신감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성공적 발사였다. 그 일은 이미 가열되기 시작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경쟁에 있어 소련의 기술이 미국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라이벌 미국을 긴장시켰다.
흐루시초프의 소련은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만 기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국력이 정점에 달한 후 3년 뒤에 맞이하는 하강 기운의 강력한 징후였다.
이는 우리가 1994년 정점에서 3년 뒤에 겪은 외환위기, 그리고 중국이 금년 베이징 올림픽으로부터 3년 뒤에 거품 해소 국면이 온다고 예측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소련은 다시 1958년 정점에서 10 년이 지난 하강기인 1968 무신(戊申)년의 '프라하의 봄' 사건을 겪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자유화 바람은 비록 소련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동원, 탱크로 진압하기는 했지만, 동구 여러 나라들이 더 이상 소련의 강압을 싫어한다는 것과 장차 소련 제국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뚜렷한 신호탄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동구의 위성국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통상 협력에 대한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고 소련 역시 일정 수준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달래는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평화공존, 즉 데탕트의 시작이었다.
다음 번 글에서는 소련의 해체 과정과 러시아의 등장에 대한 글로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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