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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이 다 된 딕 체니가 흥분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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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이 다 된 딕 체니가 흥분한 까닭은?

팍스 시니카(Pax Sinica) 시대의 도래 <2> 에너지 쟁탈전쟁

"부시 행정부에는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먼저 석유를 장악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 부시가 중동 지역의 석유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면, 중국에 대해 경제성장 속도를 지시하고 교육 체계에 간섭하게 될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미국은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 개입하려 들 것이고, 종국에 가서는 영국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한달 여 앞둔 2003년 2월 5일, 사담 후세인이 영국의 <채널4>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로부터 한달 보름이 지난 3월 20일 전격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은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한 데 이어, 5월 2일에는 제2 걸프전에서의 승리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면 인터뷰 후 종적을 알 수 없던 사담 후세인은 그로부터 7개월 남짓 지난 12월 13일 밤 8시15분, 어두움이 짙게 드리운 이라크 북부 티그리트의 허름한 농가의 지하 벙커에서 미군 특수 부대에 의해 생포되고 말았다.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부활을 외치던 카리스마 넘치던 이라크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아닌 초췌하기 짝이 없는 시골 노인네의 모습으로.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2006년 12월 30일 오전 6시 5분, 후세인은 동트는 새벽녘에 마침내 자신의 반역자들을 처형시키던 장소에서 목에 밧줄이 묶인 채 조용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세인들에게 숱한 의혹과 의문만을 남긴 채.
  
  그로부터 다시 1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12월 27일, 2008년 1월 8일로 예정된 파키스탄 총선을 앞두고 귀국한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전 파키스탄 총리가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그런데 빈 라덴·부시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의 3총사인 후세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1주년 되던 지난 12월 30일, 알-카에다와 함께 부토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무샤라프를 바라보면서 자꾸만 후세인의 얼굴이 오버랩됐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환갑이 다 된 딕 체니가 흥분한 까닭은?
  
  "나는 카스피해처럼 어떤 하나의 지역이 갑자기 전략적으로 매우 중대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부상한 경우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정말이지 하룻밤에 느닷없이 수많은 가능성이 나타난 것과 같다"
  
  조지 W. 부시 정권 들어 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딕 체니(67)가 아직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기(2001년) 전,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스피해(Caspian Sea)를 두고 한 말이다. 평소 신중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모습에 비추어볼 때, 카스피해에 대한 이같은 언급은 매우 이례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가 어느새 환갑이 다 된 딕 체니를 이처럼 흥분시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카스피해에서 옛날 텍사스나 걸프만에서와 같은 대규모 자이안트 유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석유 기업인 핼리버튼사의 CEO 딕 체니가 흥분한 것도 바로 이같은 '검은 황금'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스피해 원유의 추정 매장량은 대략 2000억 배럴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배럴당 90~100 달러인 현 시세로 환산할 경우 대략 18~20조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하지만 카스피해가 환갑이 다 된 딕 체니를 흥분시킨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이곳 유전의 상태였다. 발견된 지 겨우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카스피해 유전은 걸프만이나 텍사스처럼 폐경기 여성이 아닌, 젊은 여성처럼 물오른 상태의 싱싱한 유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세계 대부분의 유전이 '오일 피크'(Oil Peak)를 향해 치닫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 폐경기에 가까운 유전을 대치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규모 유전이란 점에서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해저 유전이기는 하지만 카스피해 유전은 북해나 카리브해, 멕시코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채굴하기가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카스피해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곳의 원유는 이란,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통해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나 중국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 경쟁 국가로 여기는 미국으로서 이는 결단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카스피해의 석유를 인도양 쪽으로 끌어와야만 했다.
  
  유일한 방법은 투르크메니스탄-아프카니스탄-파키스탄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것. 1997년 12월, 아프간을 통과하는 Cent Gas Trans-Afghani Gas Pipeline 컨소시움의 핵심 기업인 유노칼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있던 탈레반 대표들을 본사가 위치한 텍사스로 초청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원유 파이프라인을 놓고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탈레반 대표단은 유노칼이 제시한 미국측 파이프라인 구축안을 수용하는 댓가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프리미엄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탈레반과의 적절한 협상을 통해 카스피해의 원유를 인도양 쪽으로 끌어들이려던 유노칼 수뇌부는 협상 결렬을 선언하기에 이르고, 이듬해 2월 유노칼 부사장 존 J. 마레스카는 미 하원에서 아프간의 탈레반에 대한 명백한 적의를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아프가니스탄에 친미 성향의 통일된 단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카스피해의 석유를 팔기 위해 필요한 트랜스 아프카니 파이프라인 공사는 결단코 진척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카스피해 유전의 파이프라인을 둘러싼 프로젝트는 당시 유노칼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몇 년전 미 경제의 치부를 드러낸 '엔론 사태'의 주인공 엔론을 비롯해 딕 체니가 CEO로 있던 핼리버튼, 록펠러의 엑슨, 유노칼 등 미국 메이저 석유사들이 컨소시움 형태로 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0년 대선에서 고어를 누르고 당선된 조지 W. 부시가 존 마레스카 유노칼 부사장을 아프간 대사로 임명한데 이어, 아프간을 점령한 2002년 1월엔 유노칼 계약 베이스 직원이던 잘마이 칼릴자드(Zalmy Khalilzad)를 아프칸 특사로 임명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물론 부시에 의해 아프간 수상으로 임명된 카르자이(Hamed Karzai) 역시 유노칼에서 급료를 받던 자였다. 이쯤되고 보면, 9.11 이후 부시의 아프간 침공이 어떤 전략적 차원에서 이뤄졌는지 이해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 묵시록' 시대의 에너지 확보 전쟁
  
  "미국은 향후 20년 안에 중대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미국의 경제적 번영은 위협받고, 국가 안보에 문제가 발생하며,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뒤바뀌게 될 것이다"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 2001년 3월 부시 정부의 에너지 장관으로 임명된 스펜서 아브라함이 국가에너지위원회(National Energy Summit)에서 언급한 말이다. 이는 미국 정부가 에너지 확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직까지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유가 100 달러 시대가 몇몇 브로커들의 장난이라는 외신 보도가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들이 장난칠 수 있는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생각해 보라! 마치 병원에서 매 시간 체크하는 환자의 맥박처럼, 매일 눈 뜨면 TV 뉴스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WTI(서부 텍사스산 중질유)와 북해산 브랜트유 가격,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석유 시장이 누군가 장난친다고 해서 놀아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는가? 만일 지금의 석유 가격이 누군가의 장난으로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면, 인류 역사 이래 최강의 패권국이라는 미국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조만간 중대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파악하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28년 전인 1980년부터 그들의 대외 정책 자체를 수정해야만 했던 것일까?
  
  게다가 미국이 해외 석유 자원에 대한 원활한 접근과 미국으로의 에너지 수입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놀랍게도 부시 부자와 같은 공화당 정권이 아닌 제2차 오일 파동을 겪은 민주당의 카터 정부 시절이었다. 지미 카터(James Earl Carter Jr)는 1980년 1월,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구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자, 소위 "카터 독트린"이라 불리는 에너지 정책을 수립한다. 그 핵심은 걸프만 주변에 위치한 중동 산유국의 원유 공급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력사용을 포함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천명한 미국의 대외 정책이 처음으로 가시화 된 것은 팔레비 왕조 붕괴 후 이란의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호메이니를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지원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프간에서 구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와 게릴라전을 수행 중이던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하는 아프간 반군에 대한 지원 프로젝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테러와의 전쟁'의 3총사인 부시 가문과 사담 후세인, 빈 라덴 가문의 인연은 이처럼 처음부터 에너지 확보 문제를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인연을 맺어준 에너지 확보 문제는 언제든 이들의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 수 있는 '문제설정의 틀'이었던 셈이다. 그 어떤 할리우드 영화보다 스펙타클하고 드라마틱했던 9.11 테러와 연이은 '테러와의 전쟁'의 대서사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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