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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60년, 진통 속의 희망 가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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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60년, 진통 속의 희망 가꾸기

[기획특집] 대한민국 60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는? (1)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북한채널>이 '대한민국 60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는?'을 주제로 신년 기획연재를 시작했다.

이 연재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지난 60년간의 한반도 역사를 재조명하고 특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를 분석·검토하기 위한 것으로 학계·언론계·시민사회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9명이 참여했다.

<프레시안>은 <북한채널>의 협조를 받아 이 연재를 공동 게재한다. 연재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⑴ (1월 2일) 남북관계 60년 (김현경: 문화방송 기자)
⑵ (1월 4일) 북한의 변화 노력과 좌절 (정영철: 이화여대 연구교수)
⑶ (1월 7일) 통일운동의 발전과 진통 (정현곤: 민화협 사무처장)
⑷ (1월 9일) 북미관계와 북핵문제: 진통과 변화 (김정환: 한국방송 기자)
⑸ (1월 11일) 대북지원운동의 성과와 과제 (이종무: 평화나눔센터 소장)
⑹ (1월 14일) 한미관계의 변화와 발전 (이근: 서울대 교수)
⑺ (1월 16일) 대북인식의 변화와 남남갈등 (김학성: 충남대 교수)
⑻ (1월 18일) 북한의 대남정책과 통일정책 (정창현: 민족21 편집주간)
⑼ (1월 21일) 2008년 한반도의 좌표와 미래 (김근식: 북한채널 편집위원장) <편집자>


(☞ <북한채널> 바로가기)

남북관계 60년 : 진통 속의 희망 가꾸기

한민족 구성원의 동의 없이 강대국에 의해 2차 세계대전 처리 과정의 일환으로 분단된 한반도.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한반도는 통일 국가도, 2개의 국가도 아닌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남북이 각각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를 수립한 지 60년.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내세우는 남과 북은 왜 21세기가 되도록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가? 남과 북은 그동안 분단을 종식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분단 60년, 무수한 좌절과 희망

한반도의 분단은 외세에 의해 이뤄졌지만 전쟁과 대립, 반목이 60년 넘게 지속된 데는 한민족 구성원의 책임이 매우 크다. 독립운동 과정에서부터 좌우로 갈라진 민족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두 정부, 두 체제로의 분단을 가능하게 했고 두 정부는 통일 노력보다는 누가 더 정통성을 가진 정부인지를 과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저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자처한 남과 북은 진지한 대화와 교섭을 죄악시하고 무력 통일을 정책으로 삼았다. 결국 '조국 해방'을 핑계로 북한이 일으킨 한국 전쟁은 분단과 분열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구조적이고 공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남북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20여년이 흐른 뒤, 또 다른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이 화해한 뒤에야 평화를 위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1971년 9월 사상 첫 남북회담이 열렸을 때 남북의 민초들은 통일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25번의 적십자 예비회담과 7차례의 본회담에도 불구하고 단 한사람의 이산가족도 상봉하지 못했고 남북 정상의 간접 대화를 포함해 수많은 비밀접촉 끝에 탄생한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원회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중단되었다. 불과 2년 만에 희망은 커다란 좌절로 화해는 더 큰 불신으로 바뀌었다.

이후 북한의 무수한 테러 시도와 도발로 인해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와 '대화'는 '불순한 기만 술책'과 동일시되었고 남북한의 두 독재정권은 상대방을 능가하는 역량을 키운다는 미명하에 국민적 호응을 받으며 정당화되었다. 1983년 북한이 버마(現 미얀마)에서 남한의 대통령을 겨냥한 폭탄테러를 일으켰을 때는 더 이상의 남북대화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화의 불씨는 되살아났다. 테러 사건으로 외교적 곤경에 처한 북한과 88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구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과 정치적 안정을 추진하던 전두환 정부는 다양한 대화를 통해 1985년 사상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켰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대화의 효용성을 보여준 최초의 증거인 셈이었다.

1990년대 초 남북은 총리회담을 통해 기본합의서를 타결함으로써 획기적인 관계 진전을 이뤘다. 남북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 이후 주변 강대국의 지지와 중립 표명 속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 남북화해에 자극받은 미국도 북한과의 직접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북한 핵사찰을 둘러싼 갈등으로 북-미 관계와 동시에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색되면서 남북 관계의 희망과 좌절은 또다시 반복됐다. 전쟁 가능성까지 예견됐던 1차 북한 핵위기 이후 극적으로 합의된 남북정상회담, 그러나 김일성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또다시 냉각됐다. 해묵은 전쟁의 상처와 체제 비난이 수면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7년까지 북-미관계는 사상초유의 진전을 이뤘지만 남북관계의 엇박자는 한반도 전쟁종식의 기회를 흘려보내는 데 일조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후 남북 교류와 대화가 본격화된 지난 10년은 한반도의 전쟁종식과 평화를 위해 남북이 함께 적극적 노력을 펼친 시기였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 협력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것은 물론 미국 일본 등을 설득하면서 한반도 운명을 주도적으로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2차 핵위기와 북한의 핵실험이 또다시 불신과 좌절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화해 협력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60년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었다. 사진은 남북정상회담 기념식 장면 ⓒ연합뉴스

2000년 남북정상회담 : 전략적 협력 모색

역사적인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질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남북의 합의가 행동으로 옮겨짐으로써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과 철도, 도로 개통, 개성공단 가동 그리고 군사 분야의 협력 등이 이행되기 시작했다. 개성공단은 초기의 과도한 투자 논란에도 불구하고 남한 중소기업의 새로운 활로로 관심을 받고 있다. 남북 왕래가 일상화되면서 공고했던 분단의 장벽도 낮아졌다. 이산가족 상봉은 정치적 변수가 없는 한 사실상 정례화 되었으며 면회소의 가동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평화이다. 북한 핵 개발과 북-미 대립 등 안보 악재를 버텨내는 저항력이 커졌다. 미국의 대북 무력행동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도 남북협력은 지속됐고 이는 한반도의 위기 증폭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2000년대 남북관계가 그 이전과 비교해 확연한 발전을 이룬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의 주장대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 퍼주기와 무조건적인 편들기에 북한이 호응했기 때문일까? 필자는 그 이유가 남북한 상대방에 대한 인식과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시작된 화해협력 정책은 북한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략적 동반자'이며 '경제 성장의 기반이자 동력'으로 인식했다. 한반도에 위치한 남북한에게 한반도 평화는 공기와도 같이 소중한 생존과 번영의 조건이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 한반도 평화라는 공동 이익에 대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경제의 발목을 잡는 한반도 리스크를 낮추고 대륙 경제로의 진입과 향후 북한 시장 진출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또한 국내외 여건에 영향을 받아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내외 환경을 호전시키려 노력했다는 점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시작된 미국의 클린턴 2기 정부는 북-미 제네바 합의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의회의 압력에 직면했다. 북한은 북한대로 북-미 관계 정체에 불만을 품고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라는 도박을 감행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것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지 불과 80여일 만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과도한 대가 지불 등 우려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서둘러 승인함으로써 미국에 대해서는 대북 강경정책에 협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대해서는 과거와 다른 남북관계를 원하며 이를 위해 과감한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미국의 대북정책 재검토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 그 결과 미국의 대북정책 재검토 결과를 담은 페리보고서는 대북 제재가 아닌 북-미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방향을 잡았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은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동시에 발전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무력 불사용과 긴장완화 그리고 통일방안 및 경제협력,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이었다. 특히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양측이 각기 의도하는 자기 주도의 통일국가 형태를 언급하지 않은 채 통일 과정의 공통점만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을 이루었다. 이는 갈등의 요소를 안고 있는 정치적 선언보다는 통일의 의지와 그 과정의 중요성에 방점을 둔 실용적 접근 방법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남북이 한반도 평화 문제와 관한한 전략 공조를 추진했음은 이후 남북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4월과 2005년 6월의 대통령 특사 방문 결과는 악화된 국제정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남북의 노력이 돋보이는 사례이다. 2002년 4월, 임동원 특사의 방북은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9.11 테러, 미국의 아프간 공습과 '악의 축' 발언 등으로 한반도의 위기가 점층되는 상황에 이뤄졌다. 정세 악화로 몇 달간 남북대화가 중단된 상황,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는 남북관계의 복원을 훌쩍 뛰어넘는 한반도 전략을 논의했다. 남한 정부는 북한에 미국의 특사 파견 제의를 수용할 것과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시인하고 과거사 문제를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함으로써 북-일 관계 개선을 서둘 것, 심지어 국제사회와의 인권대화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

북한은 이후 7.1 경제관리개선 조치와 경의선, 동해선 연결공사 착공, 김정일 측근 실세로 구성된 경제 시찰단 남한 방문, 신의주, 개성, 금강산 특구 지정 등의 조치를 취했고 미국의 특사를 수용하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시인했다. 비록 이 시기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 노력이 모두 역풍을 불러 일으켜 2차 핵위기 발생으로 이어졌지만 이 시기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목표로 한 남북 간의 다양한 협력은 과거 유례를 찾을 수 없이 심도 깊고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2005년 6월 정동영 특사와 김정일 위원장의 담판 역시 북한의 핵포기 의지를 확인하고 교착됐던 6자회담의 실마리를 풂으로써 9.19 공동성명의 초석을 마련하는 전략적 협력의 사례이다.

큰 틀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에 걸쳐 대북정책이 화해 협력의 방향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북한 핵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통해 국제환경을 호전시키겠다는 일관된 방향성을 보였다면 초기 노무현 정부는 핵문제가 진전돼야 남북 간 협력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따라 정권 출범 초기에 북한이 제의한 남북 특사 회담을 거절했고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시기 남북관계는 전 정부가 합의한 사안들을 시행에 옮기는 발전을 이뤘지만 북한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의 다양한 의제들은 국제 문제로 고착되면서 남한은 1/6의 발언권에 만족해야 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정부가 선핵폐기 노선을 포기하고 북한의 특사를 파견한 뒤, 북-미간의 직접 대화로 핵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 국제환경이 개선된 가운데 이뤄졌다. 2차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은 국제환경 개선을 촉진하고 협력적 남북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시도했으며 차기 정부까지 지속될 수 있는 남북관계의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시도했다.

냉정한 현실, 발전을 위한 진통

2000년대 남북대화가 질적 도약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부침(浮沈)과 진통은 간헐적으로 지속됐다. 70년대 이후 35년의 남북대화가 그랬듯 희망과 좌절이 반복됐다. 북한이 여러 차례 진행되던 남북대화를 중단시켰고 서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도 일어났다. 북한에 의해 남북대화가 중단됐던 사례는 크게 부시 행정부의 출범 직후인 2001년 3월, 미국의 아프간 공습 이후인 2001년 11월, 남한 정부가 460여명의 탈북자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김일성 조문단 방북을 불허한 2004년 8월 및 북한이 미사일 발사하고 핵실험을 한 2006년 8월 이후 등을 들 수 있다.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오는 이유는 퍼주기 식 지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와 달리, 이 시기 북한은 식량이나 비료 지원이 무산될 것을 각오하고 남북대화를 중단했다. 북한의 물음은 남한의 근본 입장이었다. 남한이 미국의 적대적 대북정책에 동조할 것인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남한이 미국의 대북압력에 동참할 경우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는 북한은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남북대화의 끈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안보 측면에서나 경제 측면에서나 미국으로부터 얻을 이익이 훨씬 큰 상황에서 남한이 미국과 '이하동문'의 입장을 취한다면 굳이 따로 남북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경제적 유인책이 안보 우려를 불식시킬 수는 없었다.

2000년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수시로 진통을 겪은 이유는 그 외에도 다양하다. 냉전과 대결의 구조적 원인은 여전히 남북관계를 좌절로 내몰았다. 여전히 남북이 각기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를 표방하며 정통성 경쟁을 끝내지 못한 한반도에서 경제력으로나 외교력으로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열세에 처한 북한은 남북 교류로 인한 내부의 동요 등 부작용을 우려 했다. 북한 정권은 여전히 군사주의 노선을 유지하며 적대적 관성을 유지했고 남한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통해 양보를 얻어내려는 전략을 추진했다. 남북관계가 대외환경의 영향으로 휘청거릴 때마다 이런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남북 관계의 진통은 남북 모두에게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남북협력의 효용성을 의심하도록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간헐적 중단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지속돼온 2000년대 남북대화는 성과 못지않게 많은 한계와 허점을 노출했다. 첫째는 남북관계 발전의 당위성과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과정의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점이다. 2000년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총선에 임박해 합의를 발표한다든지 정부가 절차상 법에 어긋나는 현대의 대북 송금을 묵인하고 지원함으로써 6.15 선언의 권위와 정당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는 너무 빠른 남북관계 추진 속도가 오랜 적대관계를 체험한 국민들의 정서를 추월함으로써 반작용을 불렀다는 점이다. 특히 차기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 반 남겨놓은 상태에서 이뤄진 2007 남북정상회담은 현 정권이 감당할 수 없는 협력 사업을 약속함으로써 우려와 반작용을 초래했다. 또 정부가 북한의 경제 규모나 투자 환경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청사진을 제시하고 시장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셋째는 국제환경이 뒷받침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는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미가 대북 인식과 접근법, 속도에서 큰 차이를 보였으나 이를 효율적으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한미 및 남북관계에서 여러 차례 불협화음이 노출됐다. 결국 남북정상회담 이후 7년의 남북관계는 인내와 국민적 합의, 주변국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만 남북관계가 순항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차기정부는 한반도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해야

투표자 과반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로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지난 10년간 지속돼온 교류 및 화해협력 지향의 남북관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폐기한다면 전폭적인 경제 협력을 하겠지만 핵폐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규모 경협사업의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전망은 다양하다. 남북관계의 경색이 불가피하다는 비관적 전망이 있는가 하면 미국 부시 행정부가 대북 협상을 통해 성과를 내고자 하는 만큼 한국의 차기 정부도 대북관계를 크게 후퇴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 핵폐기가 시급하다는 점에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북한 핵폐기까지의 과정과 핵 폐기 이후 한반도의 미래이다. 즉 남한이 어떻게 북한의 핵 폐기 과정을 촉진할 것인지, 위기 상황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그리고 핵폐기와 동시에 진행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과정에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차기 정부 앞에 제시된 과제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전폭적인 경제적 협력이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되 핵 폐기 이전에는 이를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이 빨리 핵 폐기를 하도록 유도한다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의 핵 폐기를 촉진시키는 수단은 장밋빛 미래를 수단으로 한 설득과 완벽한 한미공조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전략 앞에는 꽤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은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의 종속 변수로 인식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 한미 공조가 북한의 행동변화를 압박한다는 견해는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첫 번째 부작용은 북한에 대한 남한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다. 남북대화를 하나 하지 않으나 결과에서 큰 차이가 없는 구조라면 남북대화 대신 미국과의 협상에만 힘을 집중하면 되는 것 아닌가?

둘째는 북한의 그간 협상 행태를 볼 때 한미 압박과 공조가 효과를 내는 대신 오히려 위기 증폭의 반작용만 불러왔다는 점이다. 북한은 미국에 비해 모든 면에서 약소국이지만 협상에 있어서는 강대국의 전략을 구사해왔다. 즉 약소국이 일반적으로 강대국의 압력을 일부 수용하면서 양보를 통해 강대국이 나눠주는 이익을 확보하는 실리 전략을 구사하는 반면 북한은 정반대로 미국을 향해 강압과 억지 전략을 선호했다. 미국의 성실한 협상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이 활용한 수단은 미사일 발사나 수출 위협, 핵연료 확보 및 핵확산 카드, 그리고 핵실험 등 초강수였다. 전쟁을 불사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가장 큰 무기이며 대가에 대한 구체적 증거 없는 양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북한 선군외교 전략의 요체이다. 미국이 결국 선핵폐기 논리를 포기하고 북한의 핵포기 과정을 세분화해 단계별로 보상하는 전략으로 선회했음을 보라.

셋째는 남북관계가 소홀해질 경우 북한의 핵 폐기 과정에서 발생할 다양한 위험 상황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 모두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적 의지는 강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이견이 적지 않다. 미국 내에서는 여전히 협상을 통한 해결방식을 신뢰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북-미간의 의견 충돌은 새로운 걸림돌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기로 자랄 수 있다. 지금까지 남한은 위기 상황에 적극 개입해 북한과 미국을 동시에 설득하면서 위기 증폭을 막아왔다.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한반도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과 상식을 벗어나 위험한 전술을 구사하는 북한의 갈등은 위기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핵 폐기라는 목표만큼이나 그 과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위기관리 못지않게 중요한 차기 정부의 과제는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이다. 핵 폐기 이후 도래할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 청사진과 구체적 대책을 시급히 제시해야 한다. 남북한과 주변 4강은 이미 2005년 9.19 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합의대로라면 북 핵 폐기의 종착역에는 북-미관계 정상화가 기다리고 있다. 이는 한반도 정전체제가 완전히 붕괴됨을 의미한다. 적극적 개입을 포기한 채 모든 것을 북 핵 폐기 뒤로 미룬다면 한반도 정세의 지각변동 과정에서 우리의 이해를 관철할 공간 또한 줄어들 것이다. 강대국이 내셔널 지오그라피 지도책을 놓고 분단 체제를 만들었듯이 분단체제의 해체도 강대국의 손에 맡길 것인가? 미국의 이익이 우리의 이익과 일치하는가?

우리는 1990년대 중반, 북-미 관계가 정상화를 향해 나아가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될 때 남북관계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한반도 정세 변화의 구경꾼으로 전락했던 경험이 있다. 결국은 미국이 북한에 약속해준 45억 달러짜리 경수로 건설의 70%를 부담하면서 옵저버 자격으로 간신히 게임에 동참할 수 있었다. 많은 돈을 내면서도 한국전력이 미국의 원전 건설사와 치열한 다툼을 벌였던 기억도 있다. 지금 진행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1990년대 중반에 비길 수 없는 거대한 변화이다. 이후 북한에 들어갈 국제사회의 자본은 경수로에 비길 바가 아니다. 곧 닥칠지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 모든 것을 북-미관계에 맡겨놓고 뒷짐을 질만큼 그렇게 한가롭지 못하다.
새 정부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실용적인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경제 발전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한반도의 평화임을 우리는 잊고 있다. 또한 한반도의 북쪽은 우리를 보다 넓은 시장과 기회로 인도할 훌륭한 징검다리라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다.

4대 강국의 국익이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세계 유일한 곳. 1953년 폐허의 한국 땅에 발을 디딘 뒤 반세기 동안 분단 한국을 관찰해온 미국의 신문기자 오버도퍼는 갈등과 반목 속에서도 대화와 협력을 시도해온 한반도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강대국이 한반도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립심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남북의 한국인들은 그냥 꼭두각시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핵심적 역할을 요구했고 또 쟁취해왔다." 역사적 전환기 한반도의 미래와 운명을 짊어진 새 정부의 무거운 책임감과 역사의식, 그리고 미래지향적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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