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10.3합의)가 시한을 지키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그러나 10.3합의 이행의 양대 주체인 북한과 미국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자제한 채 내년 초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디서 뭐가 막혔나?
10.3합의에 따라 연말까지 끝내기로 됐던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는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내년 2~3월에 최종 조치가 완료될 예정이다.
역시 연말이 시한이었던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EUP)에 대한 북한의 설명 방법 및 내용, 무기급 플루토늄의 추출량 및 추출과정 등에 대한 내용 등 '신고의 수준' 문제로 북한과 미국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해를 넘겼다.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북한의 불능화·신고에 대한 상응조치로 6자회담 참가국이 하기로 되어 있는 경제·에너지 지원 및 미국이 해야 할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역시 이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
중유 95만 톤 상당의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은 현재 20여만 톤 상당의 중유 및 철강재만 북송된 상태다.
북한의 조치들과 '병렬적으로' 하기로 되어 있는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및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와 관련해 미 행정부는 현재 구체적인 절차를 밟고 있지 않다.
北, 불능화 인력 감축…무슨 의도?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31일 북한이 핵 신고 시한을 지키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라며 시한 초과의 의미를 축소하고, '충분하고 완전한' 신고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논평했다.
한국과 일본도 핵 신고 시한 초과에 유감을 표하고 조속한 신고를 촉구하는 성명을 각기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은 31일 시한을 넘기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북한이 영변 핵시설 블능화 작업에 투입됐던 인력을 감축했다는 사실을 미국에 통보했다는 보도가 나와 주목된다.
북한 문제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31일 <교도통신>에 그간 총 400명의 관련 인력을 4개 조로 나눠 불능화 작업을 진행했던 북한이 최근 투입 인원을 1개 조로 줄였고 이 내용을 미국에 알렸다고 설명했다.
이는 현학봉 북한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 최근 경제적 보상이 늦어져 불능화 속도를 조정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힌 뒤에 나온 행동이다.
그러나 이 소식통은 영변에 위치한 3개 주요 시설 중 사용후 연료 재처리 시설과 핵연료 가공시설 등 2곳에서 불능화를 위한 주요 절차가 마무리됐고 원자로에 설치돼 있던 연료봉 7800여 개 가운데 400개가 옮겨졌다고 덧붙였다.
이는 북한의 인력 감축이 경제적 보상 지연에 따른 불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불능화의 주요 절차가 마무리됨에 따라 불필요한 인력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했다.
BDA 상황과 닮은 꼴?
10.3합의의 이행이 해를 넘긴 것은 북한이 핵 신고를 성실히 하지 않아 발생됐다는 게 한국 언론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묶여 있던 북한자금을 북미가 애초 약속했던 방식으로 돌려주지 않아 '미국의 BDA 해결과 북한의 핵폐기 동시 행동'을 합의한 2.13합의가 교착 상태에 빠졌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또다시 펼쳐지고 있다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그같은 견해를 보이는 전문가들은 9.19공동성명의 기본 원칙인 '행동 대 행동'에 따라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에 들어가고 6자회담 참가국들이 약속된 대북 지원을 제대로 이행하는 '행동'이 동시에 이뤄져야 북한도 신고라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10.3합의문에는 테러지원국 해제 시한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10.3합의 직후 <워싱턴포스트> 등 일부 언론들이 테러지원국 연내 해제와 관련해 북미 양국간 별도의 합의가 있다고 보도한 것은 그같은 설명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양측이 실제 행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디까지 행동해야 할지를 먼저 정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의 핵 신고 수준을 정하는 것은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의 교착에 대해 북한이 핵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고 따라서 북한의 책임이라는 해석이나, 반대로 미국이 테러지원국을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미국의 책임이라는 식의 해석은 모두 적절치 않다.
대신 북한이 핵 신고라는 행동에 들어가기 앞서 그 신고 수준을 두고 북미 양측이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는 상황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하다는 지적이다.
BDA 문제가 풀리지 않을 당시 북한과 러시아 등에서 공개적으로 미국 책임론을 거론했던 것에 비해, 현 상황에서는 이행 지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아직은 낙관론 우세하지만…
그러나 핵 신고 수준에 관한 줄다리기가 마냥 길어지고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면 미국이 어느 순간 책임 공방을 시작하며 상황을 냉각시킬 가능성도 있다. 파키스탄 사태나, 얼마 남지 않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임기 등은 미국의 인내심을 약화시킬 수 있다.
북한 역시 부시 행정부가 북핵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남한의 새 정부를 견제해야겠다고 여긴다면 신고 문제를 무작정 끄는 전략을 쓸 가능성도 있다.
물론 여전히 북미 양측이 판을 깨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자 바람이지만, 2008년에 들어서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국제 환경에서 북한과 미국의 선택에 불확실성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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