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오늘은 중국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중국과의 거래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우리나라는 지난 수 십 년간 대일 무역에서 언제나 수입이 수출보다 많다. 아예 대일역조(對日逆調)라는 낱말까지 생겼는데, 가까운 장래에도 이런 구조가 변화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중국과의 거래는 수출이 연간 4백억 달러 정도 많다. 그래서 중국의 지난 몇 년간의 번영은 우리에게 실보다 득이 많았다.
그런데 중국과의 장사가 앞으로도 지속해서 재미를 볼 수 있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우리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은 자동차나 첨단 전자 기술 제품이고, 수입하는 것은 저렴한 농산물과 의류, 선풍기나 기타 간단한 공산품 정도라는 것이 중국 무역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4-5 년 뒤에 가서 여러 분의 안방으로 중국산 냉장고와 에어컨이 들어오고 자동차 역시 중국제를 쓰게 된다면 중국과의 무역 구조는 어떻게 될까?
그 때 가서 과연 우리는 중국에다가 무엇을 팔아서 수지를 맞출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연간 4백억 달러 정도의 무역 흑자가 제로가 되거나 나아가서 적자로 뒤바뀌는 것은 이미 시간문제라 본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을까 생각해보자.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중국이 만들지 못하는 더 첨단의 기술 제품을 수출한다. 이는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사다리의 위쪽으로 올라가는 방식인데, 사실 앞으로 우리가 오를 사다리의 계단도 이 시점에 와서는 대충 그 끝이 보인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둘째, 중국과의 무역을 제한하거나 통제하는 방법이다. 양국 간에 무역전쟁이 벌어지거나, 교역이 축소되어 극심한 경기 후퇴와 레벨 다운을 각오해야 하기에 실천이 어렵다.
셋째, 중국 무역은 적자로 가되 다른 신흥 경제로의 진출을 확대해서 그 적자를 메우는 방법이다. 이 또한 이미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크지 않기에 조만간 신흥 경제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치열한 출혈 경쟁이 불가피하니 재미를 볼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마도 전 세계 시장에서 중국과 우리는 10년 안에 치열한 시장 쟁탈전을 치러야 할 것이다. 자동차와 전자, 조선 등등 우리의 주력 제품 치고 중국이 맹렬하게 따라오지 않는 분야가 없다.
10년 뒤에 가서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삼성전자 등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 중에서 세계 시장에서 중국과의 치열한 난타전을 통해 건재함을 보여줄 기업이 몇이나 될까?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장시간 동안 우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이다.
기술 수준이 같다면 결국 인건비 경쟁인데 그건 우리가 되지 않는 얘기이고, '여전히 배가 고프다'면서 전방위적으로 쫓아오는 중국에게 현 상태라면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뒤를 잡힐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중국의 산업 발전과 복지 향상으로 인해 우리가 수입하는 품목들의 가격도 앙등하고 있다. 석유가 그렇고 원자재가 그러하며 얼마 전에는 치즈 값마저도 중국인들이 피자 맛을 즐기기 시작하는 바람에 급등했다는 소식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중국의 발전과 약진은 우리에게 재앙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조선 산업 발전은 영국과 노르웨이 등 북유럽 나라들의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재앙이 되었고, 일본과 한국의 자동차 발전은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재앙이었듯이 중국의 발전은 우리에게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면 뭣으로 먹고 사나? 바이오와 생명공학? 아직은 증시에서 작전 세력들이 한탕 해먹을 때나 떠들어대는 얘기이지 그것이 상품화될 날은 아직도 요원한 스토리.
금융허브? 그것이 뭔지도 모르니까 말하기는 쉬웠겠지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하에서 금융 허브는 진도가 1 센티미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재미난 얘기가 있으니 약간 옆으로 새기로 하자.
언젠가 늦은 시간에 KTV에선가 노 대통령과 관련 인사들의 금융 허브 관련 회의를 보여준 적이 있다. 대통령은 어렵다면 지금이라도 어렵다고 솔직히 얘기하라고 했지만 그 누구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결국 필자가 본 것은 대통령을 바보로 만들어 놓는 모습이었다.
필자가 알기로 중요한 결정은 관련 멤버들이 저마다의 속내를 드러내놓고 마치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 거리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알맹이가 있다는 것인데 금융허브는 그 회의에서 우아하고 매끄럽게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이 나면서 사실상 물 건너가 버렸다.
과연 누구 잘못인 것일까? 왜 우리는 실질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라서 저럴까? 다 학력과 능력을 갖춘 양반들일 터인데 저마다의 입장이 뭐라서 저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노 대통령이 자랑하던 로드맵이란 것 역시 저런 형식적인 수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복잡한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물론 고속철 등등 해서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간에도 열심히 미래의 식량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기업들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중국의 약진으로 인한 재앙이 밀어닥칠 시기가 불과 4-5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현재형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우리에게 중국의 동향과 장차의 운세 전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필자가 이런 거창한 얘기를 음양오행에 바탕을 두고 한다고 하니 가끔씩 혹세무민의 점쟁이가 웬 말? 저리 꺼져라 등등 댓글을 만나곤 한다.
분명히 젊은 친구일 터라 직접 만나면 점심이라도 한 번 사주고 싶은데. 또 어떻게 '혹세무민'이란 어려운 사자성어를 알고 있을까, 영특한 친구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이니 악플 달지 마시길, 그래도 단다면 할 수 없이 'You are welcome!' 이다.)
그러면 이제 중국의 운세 전개에 대해 본 마디로 들어가 보자.
중국의 운세를 조망할 수 있는 코드는 '무자(戊子)'이다. 왜 무자(戊子)인가를 얘기하려면 또 한 세상 가므로 그냥 가기로 하자.
무자(戊子)는 무오(戊午)를 만나야 바닥을 치고 일어난다.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무오(戊午)의 해는 지난 1978년이었다.
1978년 중국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부도옹(不倒翁), 오뚜기 등소평이 정치협상회의의 주석(主席)에 앉으면서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경제의 현대화, 사상의 해방과 문호의 개방을 추진한 것이 오늘날 중국의 출발점이었다.
다음 해에는 미국과 국교(國交)를 수립하고 미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중국의 개혁과 개방은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의 혁명이었다.
1989년에는 학생들의 급진적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개혁의 고삐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든 책임은 져야 했기에 강택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지만 죽을 때까지 사실상 중국의 최고 실권자였다.
지금의 호금도 역시 등소평이 안배하고 점지해놓은 인물이니 사실상 오늘날의 번영 발전하는 중국을 창조한 이가 등소평이다.
모든 나라는 개혁이 시작된 지 22년이 지나면 개혁의 구체적인 과실을 보기 시작한다. (이처럼 22년이란 엄청난 시일을 요하기에 진정한 개혁은 많은 이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개혁이란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의 뼈와 살을 도려내는 무서운 수술이다. 함부로 해서도 쉽게 떠들어댈 일도 아니다.)
1978 무오(戊午)년에 개혁을 시작한 중국이니 22년을 더하면 2000년이 된다. 바로 경진(庚辰)년으로서 중국은 일약 승천하는 붉은 용이 되어 그 위용을 만방에 떨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1964 갑진(甲辰)년 제3공화국이 개혁의 출발점이니 22년이 지난 1986 병인(丙寅)년부터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경우 고르바쵸프가 정권을 잡았던 1988 무진(戊辰)년이 출발점이니 22를 더하면 2010 경인(庚寅)년에 가서 엄청난 번영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푸틴의 인기도 알고 보면 '고르비'의 개혁 덕택인 것이다.
(글이 길어졌으니 다음 글로 잇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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