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18일 아침 여의도역 사거리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의 유세차를 마주한 중년의 택시 기사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유한킴벌리 사장 한 사람이잖아요"하고 거들자 "아, 그거야 알지요"라고 했다.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지난 8월 기존 선거판을 뒤엎을 기세로 나타난 문 후보가 한 자릿수 득표율로 4등에 만족하게 된 패인에 대한 가장 간명한 대답이기도 하다. '문국현 바람'이 '인터넷 속 태풍'에 그친 이유에 대한 정치권의 분석도 결국 같은 명제로 모아졌다. 대중에게 문국현은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란 얘기다.
불다 만 '文風' 왜?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후보의 반절 남짓에 불과한 인지도는 무시할 수 없는 장애요인이었다. 그러나 단독 혹은 합동 TV토론을 통해 인지도 요인은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게 캠프의 평가. 오히려 문제는 '기호 6번 문국현'을 아는 사람들이 '대통령 감'이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준거의 부족'으로 지적된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유권자들은 칭찬이든 욕이든 10초 안에 규정 가능한 후보 중에서 대통령을 고른다"며 "문국현의 이력이나 정책은 10초 안에 설명이 될 정도로 각인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이명박 후보의 경우는 청계천·버스전용차로·경부운하가, 정동영 후보의 경우는 열린우리당·노인폄하·개성공단 등의 긍정-부정의 과거가 남아 있지만 문 후보에게는 짧게 설명하고 판단할 만한 논거들이 전무하다는 설명이었다.
문 후보 측에서는 "IMF때 해고하지 않았다", "친환경기업을 키웠다" 등의 유한킴벌리 CEO 시절의 행적을 적극 홍보했지만 '훌륭한 사람'이란 인상비평을 넘어 '대통령 감'으로 각인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대중과 애증관계가 없는 후보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기본 원리가 재확인됐다"고 했다. 임 의원은 출마 당시 문 후보의 공약이 2페이지에 불과했던 점을 지적하며 "대중이 지지여부를 판단할 만한 '정체'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학습효과'도 한 몫을 했다. '바람'에 휩쓸려 노무현 후보를 선택했다가 실망한 유권자들이 이제는 '혜성처럼 나타난 후보'를 경계하게 됐다는 것이다.
현실정치의 벽은 높았다
마이크를 캠프 내부로 돌려보자. 김헌태 정무특보는 '가장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 "현실 정치의 구조, 현실 언론의 구조와 몸소 싸우는 것이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고건, 정운찬 등 앞선 '제3후보'들이 물러나며 밝힌 이유와 매우 흡사하다.
'현실 정치 구조'란 세력과 직결된다. 출마 당시 문 후보는 '돌풍'을 예상했기에 "신당 국회의원 20여 명이 내 쪽으로 합류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당적까지 옮긴 신당 의원은 김영춘 의원 단 한 명이었다. 이계안, 원혜영 의원이 신당 당적을 유지하면서 '문국현 지지'를 밝혔지만 단일화 국면에서 후보와 엇박자를 내는 등 '반쪽 합류'에 그쳤다.
문 후보 측에 호감을 가진 신당 의원들도 다수 있었지만 결국 '위험하다'는 판단에 주저앉았다. 문 후보가 제 1여당의 강고한 프레임을 깨고 자리를 옮길 만한 명분과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후 문 후보가 세력을 얻기 위해 시도한 것은 단일화 협상이었다. 단일화를 통해 문 후보 지지 세력을 '흡수'하려던 것이 신당의 계획이었다면, 문 후보는 끝까지 '문국현 중심의 단일화'에 대한 의지를 꺾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 참모들의 설명이다.
'내가 머리를 맡을 테니 신당의 몸통을 빌려달라'는 문 후보의 요구에 신당 내에서는 "문국현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란 불만이 터져 나왔고, 결국 단일화 협상은 결렬로 끝이 났다. 김 특보는 이를 "정동영 후보와 신당 국회의원들의 집단적 몰염치로 10%를 못 넘었다"고 표현했다.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은' 신당과 더불어 '각박한 언론환경'도 문 캠프에서는 성토의 대상이다.
언론에 대한 불만을 요약하자면 두 가지다. 법정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면 마이크가 좀 더 골고루 돌아오리라는 기대와 달리 언론이 '빅3'에 집중, 문 후보를 군소후보로 전락시켰다는 것과 여권과 아무 관련이 없는 문 후보를 '범여권 후보'의 테두리로 묶어 '정권 심판론'의 영향권에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선 문 후보가 주어진 기회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반론도 나온다. 문 후보가 방송 3사의 간판 토론 프로그램에 모두 독자 출연했음에도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문 후보 측은 11월 1일 MBC <100분 토론>이 "바람의 진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지만 문 후보는 공격적 패널과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질문에 중언부언하는 등 '정치 신인의 미숙함'을 고스란히 노출시켰고, 다른 토론에서도 대중을 흡입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끝나지 않은 정치실험, 절반의 성공?
문 후보의 캠프가 막 꾸려질 무렵, 전략을 담당한 한 참모는 '문국현의 정치'를 "정치 실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문국현이 시도한 '세력 없는 가치 중심의 정치'에 결코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지지를 보냈다.
적어도 다른 후보들이 갖지 못한 '새로움'의 미덕은 문 후보가 휩쓸었다는 후한 평가도 있다. 거의 유일하게 '비전'으로 이명박 후보에 맞섰고 '경제'로 대표되는 정책선거의 맹아를 싹틔웠다는 측면에서다.
실험의 당사자들이 득표율이 기대보다 못하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험 결과에 대해서는 '절반의 성공'이란 만족감을 보이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
문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는 세력과 전력으로 요약되는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이번 대선을 통해 그 세력과 전력의 밑바닥을 다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적어도 지난 4개월간의 정치행보를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선거운동 기간 유권자들과 나눴던 긴밀한 '스킨십'은 향후 문 후보의 개인 정치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있다.
'전 국민 학습의 장'이란 선거에서 플레이어로 뛰었으니 그 정도 '학습 성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문 후보가 선거에 쏟아 부은 100억에 가까운 재산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학습 효과'를 낼지는 '다음 선거'의 성과에 달려있다.
총선은 인물이 아닌 세력 싸움. 후보 지지도의 반토막도 안 되는 창조한국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만한 묘책이 급하다. 예정된 대통합민주신당의 자중지란을 기대하는 눈치이나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프로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새로움'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흙탕에서 뒹굴어야 하는 딜레마. '문국현당'의 여전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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