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프레시안>의 논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직하고 정의로운 것은 인정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엘리트 특유의 '젠 체'하는 태도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프레시안>의 기사를 읽곤 한다.
이런 나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나는 '프레시앙'이 되면 안되는 인물이다. 자본시장에서 상품에 대한 호불호는 각 개인에게 주어져 있고 그 개인은 자신의 재화 분배의 선택으로 하여금 그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이 옳으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월 5000원씩 내는 프레시앙이 되었다.
왜였을까.
내 안에 있는 같잖은 공명심이나 펄떡거려서 숨쉬는 자랑스러움. 또는 수치 그러한 것들이 나를 얽매이는 걸까. 그런 생각도 문득 해보았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문장 안에 그러한 감정들이 단 1%도 섞여있지 않다면 그건 오히려 나에 대한 부정이다. 나는 그러므로 내 안의 공명심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기사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정론(正論)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언론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의무감도 있으며 그걸 자랑하여 내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하는 공명심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공명심만이 나를 움직인 것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언론은 칭찬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론의 역할은 세상에 대한 소금이다. 그 소금이 때로는 맛있는 요리에 뿌려져서 성찬의 역할도 하지만 때로는 상처에 뿌려져 그 상처를 덧나는 역할도 한다. 이 모두가 언론의 역할이다. 어느 하나의 역할만이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언론은 단 하나, 진실만을 위해 때로는 양념의 역할도 하고 어느 때로는 사회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는 못할 망정 그 상처를 덧나게 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이다. 그것을 해냈다고 해서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원래 언론의 역할은 그것이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런 언론들에게 칭찬을 해주고 있다. 그것은 그러지 못하는 언론들이 훨씬 많다는 걸 의미한다. 권력에 굴복하고, 돈에 굴복하고, 나중에는 자신이 어디에 굴복하지도 모르는 채로 굴복하는 언론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언론다운 역할을 하는 언론들에게 우리는 어느새인가 칭찬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욱더 안타까운 건 언론다운 역할을 하는 언론들이 하나 둘씩 차츰 차츰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한 이유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고 비판받은 그들은 어느 새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우리가 칭찬해서는 안 되는 언론들에게 칭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프레시안>은 그 줄어들어가는 언론들 중에 하나였다. 그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했고 그래서 다른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 살아남기를 원한다. 이를 가혹한 경쟁아래서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칭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기 위한 기회비용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옳다면 <프레시안>은 우리 사회에 정의를 추구했기에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고 말해야 한다. 어디까지 왔길래 우리는 이렇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의 언론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걸까.
아니. 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기를 원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언론이 아직까지 하나쯤 우리 주위에 있고 그 언론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일을 하는 이상, 나는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당연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을 한다. 내가 프레시앙이 된 건 그때문이다. 이는 자본시장의 과정에서 재화의 분배를 추구하는 시민의 자발적인 권리다. <프레시안>이 언론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므로 칭찬받을 필요가 없듯이 나 또한 그 언론이 이 세상에서 희망의 등불을 지켜나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므로 칭찬받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내가 칭찬받을 필요가 없듯이, 지금 모든 이들은 칭찬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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