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16년 전인 1991년10월31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담의 막이 올랐다. 1948년 독립국가를 이룬 이래 주변 아랍국들과 4차례의 큰 전쟁을 벌여온 이스라엘은 그날 처음으로 아랍국과 마주앉았다. 마드리드 회의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지금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은 "우리는 평화, 참된 평화를 찾고 있다. 영토적 타협이야말로 평화의 기본요건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팔레스타인에게 땅, 이스라엘에게 평화) 등식이 선보였던 마드리드 회담은 2년 뒤인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미 클린턴 행정부가 깊이 개입했던 평화협정은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서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는 들어서질 못했다.
"중동평화협정은 사기극"
중동현지 취재과정에서 만난 여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중동평화협정이 미국과 이스라엘이 합작한 '사기극'이라 여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제한적인 자치권만 주었을 뿐, 이스라엘의 억압통치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가자에서 하마스(Hamas)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2004년 사망)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난민 귀환 등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오랫동안 바래온 주요사항들을 관철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타협으로 오히려 이스라엘의 점령을 합법화시켜주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란 있을 수 없다"는 완고한 입장이다. 지금은 식물인간으로 병석에 누운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도 지난날 야당(리쿠드당) 정치인 시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내뱉곤했다. 유엔대사(1997-99)를 지냈던 도어 골드에게 언제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로 될 것 같으냐고 묻자,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갖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제랄드 스타인버그 교수(바르 일란 대학, 정치학)는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적인 비판여론은 전세계 반유대주의자들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다.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중해 바다 속으로 빠뜨려 죽이려는 음모를 막으려면, 전략적으로 1967년 6일전쟁 점령지인 팔레스타인 땅을 무단통치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노림수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만이라도 안정시켜 이라크 사태해결에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27일 미국 매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서 열릴 중동평화회를 앞두고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 지난 수년 만에 가장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힐 정도다. 그녀는 "11월 회담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도 말했다.
문제는 친 이스라엘 일방주의에 바탕, 미국은 이스라엘의 입맛에 맞는 팔레스타인 온건파만을 협상 테이블로 불렀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온건파의 우두머리는 마무드 압바스 자치수반이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가 만나고 싶어하는 인물도 압바스 같은 타협적 성향의 온건파이지, 하마스 출신인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 등 강경파가 아니다.
미국은 하마스가 '중동평화의 훼방꾼(spoiler)'이란 비판을 하곤 했다. 그래서 이번 중동평화회담에 하마스 정치인들에게 초대장조차 보내지 않았다. 2006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합법적인 정부를 대표한다. 그럼에도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낙인 찍고 대표성이 약한 압바스를 협상 파트너로 삼으려 한다. 그렇기에 11월 중동평화회담은 대표성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기에 '처음부터 실패한 회담'이라는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중동평화 위한 두 가지 조건
결국은 미국의 친 이스라엘 일방주의가 문제다. 미-이스라엘 두 나라의 유착관계를 유럽의 외교사에 자주 등장하는 신성동맹에 빗대어 '신성하지 못한 동맹'(Unholy Alliance)라는 비판마저 받아왔다. 이미 1993년 오슬로 협정문서는 '휴지뭉치'로 사(死)문서가 된 상태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오랜 희망이 이뤄지지 않는 한, 중동에서의 유혈투쟁은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중동 땅에 언제 유혈사태가 그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출현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두 가지 큰 변화가 따라야 할 듯하다. 첫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에서 비껴나는 보다 중도적인 정권이 워싱턴에 들어서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인정하는 평화지향적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위의 두 가지 조건이 함께 채워질 경우에만 중동평화협상에 희망에 있다. 그렇지 않고 제2의 부시가 워싱턴에 똬리를 트고 있다면, 그리고 제2의 샤론이 텔아비브에 버티고 있다면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중동의 속담처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탄생을 바라기는 어려워 보인다.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최근호에 실은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필자 이메일: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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