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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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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07>

음양의 조화(調和)에 대해 ②

저번 글에서 상반된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포용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
  
  세상 살아가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도 음양의 조화를 얘기할 수 있음이니 그 얘기를 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만, 사실 행복이란 고통과 함께 가는 성질의 것이다.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도 함께 있다는 말인 것이며, 행복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고통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행복을 양(陽)이라 한다면 음(陰)은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음(陰)이 사라지면 그와 함께 양(陽)도 사라지는 것이니 고통이 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고통은 병존하는 것이고,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삶 앞에 놓여있다.
  
  우리가 고통을 피하고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고통도 우리를 쫓아올 것이니, 그럴 바엔 아예 고통도 삶의 현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어떨까.
  
  더 나아가서 그 고통을 무서워하기보다는 그 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시(直視)하고 그 맛을 곱씹어보는 것이 더 긍정적이고 당당한 삶의 자세라고 음양의 조화 개념은 가르쳐 주고 있다.
  
  설령 고통이 없이 행복만 있는 삶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음은 없고 양만이 있는 편중(偏重)된 삶일 것이다. 그리고 고통과 행복을 번갈아 맛보면서 삶의 더 깊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조화를 이룬 삶일 것이다.
  
  극락이나 천당은 고통과 행복을 오가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고 환상일 것이다.
  
  그런데 행복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필연적이고 또 조화된 삶이라 한다면 실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 자리가 바로 극락이고 천당이니 또 어딜 가겠는가.
  
  하늘이 봄에 비를 뿌려 땅을 적시면 만물이 번성하니 그것이 도(道)이고 덕(德)이라 하지만, 가을에 만물을 시들게 하고 안락하지 못한 세상을 만들어 삶을 거두어간다.
  
  그렇다면 가을의 하늘과 땅은 도와 덕에서 벗어난 비도비덕(非道非德)인 것일까? 나아가서 하늘과 땅의 냉혹(冷酷)함이며 무정(無情)함일까?
  
  처음에는 사랑을 주고 나중에 그 사랑을 거두어가니 책임지지 않는 난봉꾼이고 바람둥이인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한 번 펼치면 한 번 거두는 것이 천지자연의 도이고 덕인 것이다.
  
  그렇기에 천지와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펼치는 아름다움과 거둬가는 무정함을 함께 인정한다는 것이다.
  
  조화란 길러내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죽이고 거둬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 또한 행복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음이다.
  
  음양의 조화 개념은 이처럼 상반된 것들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포용함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낳는 것을 도라 하고 기르는 것을 덕이라 했지만, 그 반대의 작용도 도이고 덕인 것이다. 그로서 도와 덕이 지닌 본연(本然)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도와 덕은 욕망으로서만 바라보면 낳고 기르는 것만을 말하지만, 비운 마음으로 보면 거두고 시들게 함도 도와 덕의 모습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줄이면 유정(有情)도 무정(無情)도 모두 도덕(道德)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에는 이런 차원 높은 생각과 세계관이 없었을까? 물질과 정신을 대립시키고 세상은 애오라지 앞으로만 나가야한다고 여겼을까?
  
  그렇게 여긴다면 그 또한 우리 문화만의 오만이고 편견이다.
  
  서양에는 그리스 철학의 바탕위에 견유(犬儒)학파와 그에 영향을 받은 스토이시즘(stoicism)이라고 알려진 높은 정신세계가 있었고 실은 지금도 서구인들의 정신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다만 일반인들에게 스토아 철학의 본 모습이 왜곡되어 전해졌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스토아 철학이란 희열과 비애로부터 초연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는 초연하고 고답적인 것이라 알려졌지만 오해에 불과하다.
  
  스토아 철학의 정신 또한 행복과 고통을 함께 인정하고 그것을 조화로 보는 음양관(陰陽觀)과 전적으로 동일한 태도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태도 역시 금욕(禁慾)적인 것이 아니라 동양 철학적으로 말하면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어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한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다.
  
  책에 있는 글을 잠깐 소개한다.
  
  "참된 겸손과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자연에 대해 이렇게 외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거두어가소서!' 그러나 오만함으로써가 아니라 그저 순수한 복종과 선의의 뜻으로 말하라."
  
  여기서 복종이란 굴복이 아니라 '맡김'을 통해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누구의 말일까?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있는 글이다. 명상록을 읽으면 '장자(莊子)'나 '회남자(淮南子)'를 읽는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든다.
  
  그리고 서구의 스토이시즘은 기독교의 전파로 인해 사라지지 않았다. 실은 중세 수도사들이 삶의 이상(理想)으로 여겼던 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여준 삶이었기 때문이다.
  
  음양이 조화를 통해 보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지향하고 스토이시즘도 그와 유사한 것을 통찰했지만,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이는 어느 문명권에서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모순된 그 자체로서 세상을 긍정하는 힌두의 마야(maya)철학과 '있는 대로 생긴 대로 보라'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선불교, 이슬람권의 수피(sufi)등은 모두 음양의 조화와 본질에 있어 동일한 것이다.
  
  이 모두 협력(協力)과 모순(矛盾)이 사물의 존재양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문명권을 처음 접하면 낯이 설어 두렵기도 하지만, 점차 친근해지고 익숙해져서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늘 보던 그 모습과 그 미소를 만나게 된다.
  
  마치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가면 처음에 풍토와 문화가 달라 고생하지만, 어느덧 그곳의 사람들로부터 따듯한 인정을 느끼게 되고 떠나올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포옹을 하듯이 말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니 기독교 근본주의니 하면서 마치 문명 간의 커다란 괴리가 있고 피할 수 없어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아이처럼 자신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친해지면 호랑이와도 노닐 수 있고 상어와도 친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인 데, 어떻게 같은 사람 사이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가.
  
  호랑이나 상어와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먼저 존중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경계하겠지만 결국 적의(敵意)가 없음을 알게 되면 다가오고 다가가서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존중한다는 것은 예(禮)의 출발인 것이니 이는 공자(孔子)님의 말씀이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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