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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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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306>

음양의 조화(調和)에 대해 ①

지난 글에서 음양관의 순환론적 세계관과 근대성이 충돌한다는 얘기를 했다.
  
  사실 어느 쪽도 극단을 접으면 그 또한 수용하고 조화될 수 있음이다.
  
  순환론이란 것이 과거와 동일한 반복이 아니며, 근대성이란 것 역시 서구(西歐)적 요소들만이 근대성의 핵심이 아니라는 점만 받아들이면 조화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음양이 지향하는 조화(調和)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겠다.
  
  음양에 대한 생각의 변천과 발전 과정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것은 암컷과 수컷이라는 성적(性的) 상징이었고 암수는 어울려야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암수가 어울린다는 것은 바로 조화(調和)를 말하는 것이고, 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생산(生産)이고 발전이다. 또 암수가 함께 해야 생산한 새끼를 잘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낳고 또 낳는 것을 도(道)라 하고 낳은 것을 길러내는 것을 덕(德)이라 한다. 노자 도덕경(道德經)의 '도덕(道德)'이 바로 그런 뜻이다.
  
  낳고 또 낳으면 개체의 수명은 유한(有限)하지만 생명의 근본은 불멸(不滅)이니 그것이 도(道)인 것인데, 낳으려면 암수가 어울려야 하고 조화되어야 한다.
  
  낳은 것을 기르는 것이 덕(德)인데, 갓 태어난 자식은 어리고 연하니 암수가 힘을 합쳐야 한다.
  
  하늘이 봄에 비를 뿌려 땅을 적시면 풀과 나무들이 자란다. 초목이 자라면 짐승들이 굶지 않으니 모든 생명체가 약동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도(道)이고 덕(德)이라고 노자는 말했다.
  
  사람은 남녀가 어울려서 자식을 낳고 길러내니 그것은 사람의 도, 즉 인도(人道)라 하겠다.
  
  여기서 낳고 길러내게 하는 기본은 암수의 어울림, 즉 음양의 조화인 것이다. 그래서 음양이 조화되었다는 말은 낳고 기를 수 있다는 것으로서 세상은 변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조화가 깨졌다는 말은 결국 불임(不姙)을 의미하니 낳지 못하고 기를 수 없는 것이다.
  
  자웅(雌雄)간에 작용하는 건전한 상호인력은 무릇 생식(生殖)만이 아니라, 어떤 일에 있어서도 생산적이고 효과적이다.
  
  그러나 음양이 조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비단 남녀 간의 어울림을 통한 자손의 번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화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상과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 내지는 방식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겠다.
  
  거두절미하면 모순(矛盾) 또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모순(矛盾)이 사물의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이라는 말은 역설(逆說)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그냥 들어보라.
  
  사자가 살기 위해선 주변의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런 종류의 동물을 우리는 포식자, '무언가를 잡아서 먹는 놈'이라고 한다.
  
  사자가 여우를 잡아먹고 여우는 토끼를, 토끼는 풀을 뜯어먹는다. 풀이란 것 역시 생명이다.
  
  여기서 사자나 여우는 동물을 잡아먹으니 잔인하고 토끼는 풀을 먹으니 평화로운 동물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편견이고 착각이다.
  
  근본적으로 동물이라고 하는 생명체는 무언가를 잡아먹어야 살 수 있다. 실은 동물 전체가 포식자인 것이다. 나아가서 잡아먹는 것이 죄악(罪惡)이라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죄악이 많은 생명체는 바로 우리 인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근원적인 죄의식, 좀 부드럽게 얘기하면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이니 모순(矛盾)인 것이다.
  
  그렇다면 풀이나 나무는 다른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심성 착한 생명체인 것일까? 당연 그렇지도 않다.
  
  풀이나 나무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햇빛을 놓고 치열하게 다툼을 한다.
  
  숲은 나무와 풀들의 죽기 살기 식 전쟁터이다.
  
  풀이나 나무의 종류마다 생존의 전략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햇빛을 얻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
  
  햇빛을 획득하는 싸움에서 지면 그 나무나 풀은 죽거나 시들고 만다. 그런 투쟁을 통해 숲과 초원은 부단히 변화해간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냉혹한 경쟁을 필연적 조건으로 한다. 이 말은 반대로 더러는 내가 희생되기도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명체들의 이런 모순은 다른 동물들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며, 같은 종류 사이에서도 부단히 존재한다.
  
  인간의 경우 나라와 나라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 등등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 잘 살기위해 이 시간에도 간단없이 경쟁하고 싸우고 투쟁한다.
  
  반전론자와 평화론자는 역사 이래 언제나 있어왔지만, 아직 인류가 전쟁이라는 극렬 잔혹한 행위를 그만 둘 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지난 20세기에 가장 참혹한 전쟁이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문명의 수준과 잔혹의 수준이 비례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생명체간의 투쟁이 격렬하긴 하지만 실은 모든 것들이 모순을 통해 존재하고 사라져간다.
  
  구름은 수증기가 모여들면 생겨나지만 마른 바람을 통해 흩어지고 없어진다. 산도 긴 시간에 걸쳐 풍화되고 지각변동을 통해 사라지고 생겨난다.
  
  다만 생명이 없기에 거기에서 냉혹함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와 사물 간에 모순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편견일 것이다.
  
  빈 마음과 맑은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면 협력과 사랑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태를 일러 음양관에서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과 사물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이 전체로서 하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조화(調和)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음양의 조화가 말하는 것은 서로 상반된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상반된 것을 포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평화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투쟁이나 모순 또한 사물의 피할 수 없는 존재양식임을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런 현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싸우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순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생각이고 몽상이지만, 인류가 오로지 평화롭고 사이좋게 지내려면 식량을 포함해서 모든 재화와 용역이 공기처럼 자유재(free goods)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설령 그런 꿈같은 상태가 이루어진다 해도 사회가 존재하는 이상 권력이 존재할 것이고 권력이 존재하는 이상 차별이 존재할 것이다. 차별이 있는 한 투쟁과 모순은 존재할 것이다.
  
  상생과 상극이 전체로서 하나의 조화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투쟁할 때도 있고 평화로울 때도 있으며, 어지러울 때가 있는가 하면 정리될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음양(陰陽)이고 곧 조화(調和)인 것이다.
  
  아직 음양과 조화에 대해 얘기가 남았기에 다음 글에 잇기로 한다.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김태규의 명리학 카페 : cafe.daum.net/8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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