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무샤라프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 선포 후 처음으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총선을 당초 계획대로 내년 1월 9일 이전에 치르겠다면서, 그러나 지난 3일 내려진 국가비상사태는 총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또 대법원이 지난 10월 6일 치른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자신의 후보자격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즉시 육군 참모총장직을 버리고 민간인으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무샤라프는 현 의회가 임기 연장 없이 예정대로 오는 15일(지방의회는 20일) 해산될 것이라면서 "선거관리위원장에게 가능한 빨리 총선 일정을 잡을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무샤라프는 또 비상사태 선포 이후 반정부 시위를 벌이다 검거된 정치인들은 총선을 위해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무샤라프는 그러면서도 "선거와 민주주의라는 명목 하에 법과 명령을 어기는 사례를 허용치 않겠다"며 문제를 일으킬 경우 재차 구금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미국 요구사항 빼고는 기존 입장 고수
지난주까지만 해도 총선을 2월 중순까지 치르겠다던 무샤라프가 당초 계획대로 1월 총선 실시를 발표하고 군복을 벗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한 것은 미국의 압력 때문으로 분석된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7일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예정대로 총선을 실시하고, 육군 참모총장직을 포기하라고 권유했다. 부시 대통령은 10일에도 무샤라프를 알카에다 및 탈레반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동맹이라고 추켜세우고 "그는 내 입장을 알 것"이라며 두 가지 요구사항을 재차 강조했다.
부시 행정부는 대테러전에 협조해 온 무샤라프 정권을 유지시키는 동시에, 무샤라프의 초법적 조치 때문에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대테러전의 명분이 유린됐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위해 이같은 요구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이 자신을 버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무샤라프는 미국이 부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자신을 압박하자 핵심 요구 사항만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총선 실시 △육군 참모총장직 사임 △구금 정치인 석방 외에 다른 사안에서 무샤라프는 기존의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국가비상사태는 법에 의한 지배를 개선하고 테러리즘에 좀 더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데 공헌했다"며 자신이 내린 조치의 불가피성을 강변했다. 그는 또 자신이 절대 헌법과 법률을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하려 했던 이프티카르 초더리 대법원장을 강제 해임하고 새 대법원장을 임의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에 협조적인 압둘 하미드 도가르를 새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美, 제2의 팔레스타인 될까 전전긍긍
어쨌든 내년 총선이 예정대로 치러지게 되면서 이제 무샤라프 정권의 운명은 민심의 향배에 좌우되게 됐다.
하지만 무샤라프가 1999년 쿠데타 이후 독재 권력을 휘둘러 왔고, 올 7월 랄 마스지드(붉은사원)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유혈 진압한 이후 대규모 민심 이반을 겪고 있기 때문에 총선에서 고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미국과 영국의 주선으로 '무샤라프 대통령-부토 총리'의 분점 구도를 받아들이며 8년만에 귀국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이번 비상사태를 기점으로 반(反) 무샤라프 구호를 선명히 외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부토 총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총선에서 압승한다면 무샤라프의 권력까지 위협할 수 있을 때문이다.
그같은 상황에 대해서는 미국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파키스탄 총선이 지난해 1월 팔레스타인 총선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자신에게 순응적인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의회 권력까지 장악케 하기 위해 총선 실시를 적극 권했다. 그러나 총선은 미국에 적대적이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군사조직 하마스가 압승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미국을 당황케 했다.
따라서 미국은 총선까지 남은 2개월 동안 애초 목표로 했던 무샤라프-부토 권력 분점 구도를 만들어 권력의 급격한 교체를 막으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
"무샤라프-부토의 '무늬만' 갈등"
그렇다면 문제는 부토의 태도다. 지난 9일 하루 동안 가택에 연금되어 자신이 조직한 대규모 시위에 참석하지 못한 부토는 지난 주말 파키스탄 동쪽 도시인 라호르로 건너가 오는 13일부터 라호르-이슬라마바드에 이르는 시위의 '대장정'을 시작하며 반 무샤라프 운동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샤라프의 비상사태 선포로 불거진 부토와의 갈등은 겉으로만 그런 것일 뿐 막상 총선이 다가온다면 권력 분점 약속이 결국 지켜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11일 부토가 권력욕이 강하기 때문에 정권 장악을 위해 무샤라프와 협상을 하고도 남을 인물이어서 타협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영국 <BBC> 방송은 무샤라프와 부토의 갈등은 '무늬만'(ostensible) 혹은 '꾸며진'(mock) 충돌이며, 이는 두 사람의 체면을 살리고 상호 이익을 꾀하기 위한 은밀한 거래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을 소개했다.
부토가 무샤라프와의 갈등을 꾸미는 이유는 파키스탄 민주주의의 대모라는 자신의 '신화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무샤라프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한 후 가택에 연금되는 '드라마'를 연출함으로써 '부토가 무샤라프와 공모했다'는 인상을 씻으려 한다는 것이다.
무샤라프 역시 부토와의 '무늬만 갈등'을 통해 대법원이 자신의 대통령 자격이 적법하다고 인정하는 이들로 대법관을 구성할 시간을 벌고자 한다는 게 <BBC>가 소개한 분석이다.파키스탄 현지 언론들은 무샤라프가 자신의 대통령 임기 만료일인 15일까지 대법원 재판부 구성을 완료하기 위해 이번 주중에 대법관 11명을 선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법원은 무샤라프의 대통령 후보 자격 관련 헌법소원을 기각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같은 분석이 맞다면 부토는 향후 사태에서 물러설 명분을 찾은 뒤 저항의 수위를 낮추려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1일 무샤라프의 총선 일정 발표에 대한 부토의 반응을 그의 향후 행보를 가늠할 방향타로 여겨진다. 부토는 이날 무샤라프의 발표에 대해 "첫번째 긍정적인 조치"라며 "비상사태 조치도 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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