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평화인가? 전문가나 전현직 당국자들 등을 만날 때마다 그걸 물었다. 1차 정상회담의 의제는 평화, 통일, 교류협력이었는데 평화가 빠져서 이번에 그걸 채워야 한다고 했다. 상호공존의 10년, 화해협력의 10년을 보냈으니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만들 때가 왔다고도 했다. 북한 핵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국면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고 나왔다. 100%는 아니지만 대략 납득이 됐다.
하지만 몇 가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략적 유연성, 주한미군 기지 이전, 주한미군 현대화, 국방개혁 2020, 그리고 한미FTA까지. 노무현 정부 들어 미국과 합의했거나 우리 정부가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들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거나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부추길 소지가 있는 그런 정책들을 꽤 여러 가지 합의하고 추진했다. 갑자기 전쟁을 몰고 오지는 않겠지만, 백번 양보하더라도, 평화를 지향한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평화? 전략적 유연성이 백지화됐나?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남북이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를 착실히 하기만 하면 한반도 평화는 시간문제인가? 그렇게 되면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야심이 없어지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이 지난 몇 년의 정책과는 영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찌뿌드드하게 남아 있었다.
평화체제 구축과 전략적 유연성의 '충돌'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는 두 개의 '존중'이 있다. 하나는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함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한국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한미군이 동북아 분쟁에 개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을 반대한 사람들은 첫 번째 '존중'은 지켜지겠지만 두 번째 존중은 안 지켜질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불공정한 평가다. 또 다른 의미의 대미 종속적 시각이다."
한미간 전략적 유연성 논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혼란을 좀 정리해 달라'는 기자의 '하소연'에 이렇게 답했다.
"미국이 새로운 세계군사전략에 따라, 이미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주한미군의 역할을 조정하고 있는 이 기회를 포착 활용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전방 미군부대의 감축 및 후방기지로의 이동 배치, 전시 작전통제권의 반환, 한미 군사지휘체제 조정 등의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한편 이러한 미국의 군사개혁조치를 군비통제와 연계시켜 평화체제 구축에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전략적 유연성을 오히려 평화체제 구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9월 1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연)
전략적 유연성 외에도 국방개혁과 관련해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국방비를 증액시켰다고 해서 평화체제를 얘기할 수 없다고 하는 건 정서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국방개혁은 동북아 차원과 대북 억지력 차원에서의 비전이 혼합되어 있는데, 대북 억지력에 해당되는 부분은 향후 남북관계가 군비통제와 군축으로 가면 조정할 수 있는 탄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은 국방개혁과 평화의 '충돌'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며 "평화체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남북이 일정한 틀 속에서 신뢰구축 문제를 비롯해 군비축소 문제도 다루기 시작하고, 나아가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단계로 접어든다면 그에 따라 다시 조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미동맹의 지역동맹화 그냥 둬도 되나요?
그러나 한신대 국제관계학부의 배성인 외래교수는 <전략적 유연성 : 한미동맹의 대전환>(배성인 지음, 메이데이 펴냄)에서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비판은 기우였을 뿐이고 앞으로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이같은 낙관론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한다.
배 교수는 "우리가 진정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착을 원한다면, 한반도 정세변화의 한 축인 북핵 문제의 해결만이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을 중심으로 한 한미동맹의 성격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며 전략적 유연성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중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6자회담이라는 국제적인 성격의 틀을 통해 전개되고 있지만, 이러한 프로세스와 모순되게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중국 견제와 봉쇄를 중심으로 동북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으며,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발맞추어 한미 양국 정부는 주한미군을 지역기동군으로, 한미동맹을 지역동맹으로 새롭게 재편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전략적 유연성 때문에 한국이 동북아 분쟁에 연루될 수 있을지 없을지, 그에 대한 한국의 우려를 미국이 존중해 줄지 말지,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남북 군비통제·군축의 기회로 활용할지 말지 등의 논쟁을 뛰어 넘는 인식의 틀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배 교수에게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낯선 개념이 우리 사회에 처음 던져졌을 때부터 큰 그림을 보는 이들은 찬반 여부를 떠나 그런 얘기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의 동북아 분쟁 가능성 여부 등에 관한 논란들이나, '전략적 유연성 합의 과정에서 정부의 누가 장난을 쳤나' 식의 논란들에 묻히며 정작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배성인 교수식의 문제 제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는 남북 정상의 합의가 있고, 종전선언을 먼저 해야 한다느니 평화협정하고 같이 하면 되느니 하는 '행복한 고민'을 나누면서 이제는 오로지 평화만을 얘기하면 되는 시대가 온 듯하다. 주한미군에 관한 모든 논란 역시 말끔하게 정리된 듯 한 인상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26일 한 세미나에서 한 연설을 보면 그렇다.
"평화체제가 수립된 후에도 주한 미군은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면서 새로운 동북아 안보 환경에 맞는 역할을 지속 수행하게 될 것이다. 주한미군 기지 이전과 재편, 전시작전 통제권 전환은 한미동맹이 한반도에서 평화체제가 수립되는 새로운 안보환경에 맞게끔 미래지향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성인 교수의 책을 보면 '평화체제 시대가 오는데 웬 주한미군 걱정?'이라며 송 장관 처럼 이 문제에 대해 '탕 탕 탕' 망치를 두드리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그리고 대단히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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