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은 냉정하여 아름다움에 소홀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무척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고 문예의 힘을 믿었다.
성종 20년(1489) 겨울 요동질정관(遼東質正官)으로 북경에 갔을 때였다. 임무를 수월하게 끝내고 여유가 있었다. 옥하관(玉河館)이라고도 하는 오만관(烏蠻館)에 머물며 서책을 구입하는 등으로 소일하였다. 오랜만의 휴식, 북경의 휴일이었다. 그런데 숙소 근처에 사는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김일손의 취미를 눈치 채고 도서(圖書) 즉 그림과 글씨를 자꾸 보였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하였다. 그런데 귀국이 내일 모레인데 '열네 폭짜리 고화(古畵)'를 가져왔다. 가격 흥정에 여유를 두지 않아 이익을 보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김일손은 '자신도 모르게 좋아 탐이 났음'을 숨기지 않았다. 사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면 절대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없다. 더구나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책을 사느라고 여비를 거의 써버린 터였다. 여러 옷가지를 내주었다. 그래도 부족하였다. 결국 황제가 내린 명주 두 필까지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품이 너무 좋아서 개의치 않았다. 배웅하는 중국 관리도 보증하였다. 중국행 '제일소득'이었다. 이러한 사연을 「중국의 병풍에 적다」에 담았다.
김일손은 서화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정여창과 지리산을 갔을 때도 안평대군의 가섭화상을 금방 알아보고 가져오려다 정여창의 만류로 그만둔 적이 있었다. 강혼의 시를 화제(畵題)로 삼아 이종준이 그린 팔 폭 그림을 보고 화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다. "서화와 시문은 흉중에 품은 토저(土苴)가 없다면 어떻게 화려한 빛깔[華]이 나오겠는가?" 토저는 거름이 되는 두엄풀인데, 서화와 시문의 아름다운 빛은 가슴에 품은 기운을 거름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과 달과 바람과 연기를 배경으로 한 매화와 대나무의 모습을 눈에 휘늘어진 가지와 줄기, 달이 옮겨오는 향기와 그림자, 바람에 뽐내는 잎사귀와 꽃술, 연기에 숨어버린 고운 빛깔로 소묘하며 감상을 적었다.
고요하고 막막한 듯, 시원하고 깨끗한 듯, 높고 밝은 듯, 확 트이고 맑은 듯하다. 붓끝의 조화를 보면 분명히 정갈하고 차분하며 씩씩하며 편안하니 그의 뜻과 생각이 이러함이라. 여덟 폭 병풍 가운데 앉아 있노라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중균의 가슴속에 들어가는구나. 아, 우리 중균이여.「이종준의 그림에 적다」
김일손의 감상법은 조망이 아니었다. 그림을 따라 노니는 유관(遊觀), 혹은 그림 속에 드러누워 즐기는 와유(臥遊)였다. 이 병풍을 지금에 볼 수 없음이 정녕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김일손은 항상 작품에 드러눕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박눌(朴訥)의 글씨를 품평한 강혼(姜渾)의 글을 보았을 때였다. 당대 명필인 박경(朴耕)의 아들 박눌 또한 한 획 한 획에 기운이 돌고 넋이 서린 듯 서체가 웅장하고 활달함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박경이 서자 출신인데다 무척 가난한 탓에 박눌 역시 진취를 생각할 수 없었다. 김일손은 안타까웠다. 「박눌의 글씨에 적은 강혼의 발문 뒤에 적다」에 적었다.
만약 이 아이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또한 기쁜 일 많은 고장에 태어났다면 학사(學士)와 노유(老儒)가 소중하게 여겨서 왕공(王公)의 아낌을 받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인데, 헐벗고 배고픔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법에 구애(拘碍)되고 인재의 능력을 존중하지 않은 나라의 습속이 애석할 따름이다.
능력보다는 관습을 따지고 적서의 차별이 심한 나라가 인재를 키우지 못할 뿐 아니라 헐벗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박눌의 글씨에서 세상의 질곡, 아웃사이더의 고통을 엿보았던 김일손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깊고도 넓었다. 그것은 문명과 소통을 향한 바람으로 표출되곤 하였다.
제2차 중국행
성종 21년(1490) 11월 김일손은 다시 북경에 갔다.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이었다.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며 사행의 기록과 보고를 담당하는 직임인데, 하급 관원에 대한 규찰을 담당하는 행대어사(行臺御使)를 겸하였다. 요동질정관으로 다녀온 지 1년 만이었다. 그때 중국에서의 소감을 「지난 여행의 감회를 노래하다」에 담았다.
이렇게 시작한다. "수레와 말이 넘쳐나 오르고 내리며, 번화한 문물 백 년의 성대함을 자랑하는구나." 북경의 번화함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인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도포 입은 선비들 몰려들어 來縫掖之貿貿兮
군자 소인 뒤섞여 괴상한 것만 물어보며 相怪問兮雜薰蕕
짧은 글 주면서 사귀자고 청하니 贄短章而求友
밝은 달을 어둠에 던진 듯 부끄럽기만 하였네 愧明月之暗投
도포를 입었으나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조선에서 온 자신에게 괴상한 잡담만을 늘어났다는 것이다. 무척 서운하였다. "개미 같은 내 인생 한스럽구나." 더구나 만나는 사람마다 재물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문명과 도덕의 괴리였다.
시대 만나지 못한 현사를 저자에서 찾았으나 訪屠狗於市上
노래 끊겨 슬프더라 누구와 수작할까 悲歌斷兮酬與酬
풍속과 교화가 시대에 따라 변하더니 俗與化而推移
사람도 천해져서 재물만 더 좋아하더라 人向下而益偸
어쩌면 서책을 비싸게 팔려고 드는 상인이나 뇌물을 바라는 중국 관리를 만났는지 모른다. 그래도 자신의 안목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반성하여 '내가 두 눈을 가지고서도 혼자 지극한 덕의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였다. 또한 어쩌면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의 사신을 어리석은 '비부(鄙夫)'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던 차에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인 정유(程愈)를 만났다. 『소학』의 여러 주해를 모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의 편찬자였다. 정유는 「주자서첩(朱子書帖)」한 점까지 선물로 주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소학의 인간상이다' 하였다. 그리고 순천부(順天府)의 학사(學士) 주전(周銓)과 사귈 기회를 잡았다. 박학하고 차분한 인품이 좋았다. 패도(佩刀)를 정표로 기증하자 주전도 여러 권의 도서(圖書)를 건넸다. 아낌없는 만남이었다. 훌륭한 인재를 너무 늦게 만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김일손은 귀국하여 『소학집설』을 나라에 올렸고 성종은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였다.
교류와 소통을 향한 열망
김일손은 정유와 주전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중국의 인재들과 폭넓게 교유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왜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을까? 절친한 후배 이목(李穆)이 성종 25년(1494)에 북경으로 떠나자 그러한 사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먼저 예전의 중국은 변방 열국의 자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얻은 바가 많았고 문헌도 적지 않게 가지고 왔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문명의 교류와 소통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탓만 할 수는 없다.
예로부터 중국의 학문과 도덕의 인사는 하남성(河南省) 강소성(江蘇省) 그리고 절강성(浙江省) 출신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사실만을 알고, 천하의 수도가 된 연경에 인재가 모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재를 찾지 못한 불찰을 반성하였다. 또한 이들을 만나기 쉽지 않았던 이유도 살폈다.
조정에 있는 재위자(在位者)는 남과 사귀는 외교(外交)를 싫어하고 벼슬을 하지 않는 재야자(在野者)는 시가(市街)에서 쉽게 만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구도(求道)의 간절함이 있더라도 만나기를 심히 꺼려한다. 「지난 여행의 감회를 노래한 다음에 적다」
조정의 인재를 만날 수 없음은 공무가 아니면 사교를 멀리하기 때문이고, 재야의 인재는 시가를 잘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조선의 선비를 알지 못하고 꺼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재를 만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렇게 충고하였다.
성현의 도는 계책을 어떻게 하는가에 있지 중화의 안과 밖에 차이가 있을 수 없으니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배울 수 있다. 그래도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이 있으면 도움이 되지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구유부후서」
성현의 도는 우리의 하기 나름에 달려 있지만 그래도 사우는 필요하니 나라와 겨레를 떠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손과 이목과 기맥이 통하였다. 성종 23년(1492) 12월 성균관 유생 시절 이목은 상소에서 영의정 윤필상을 귀신 같이 간사한 '간귀(奸鬼)'로 지목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될 것이다'는 세간의 웅성거림을 숨김없이 적었다. 이때 거리에서 만난 윤필상이 태연하게 말하였다고 한다. "자네가 꼭 늙은 나의 고기를 먹어야 하겠는가."
교육수국(敎育壽國)을 위하여
김일손은 근세 유자의 병폐는 '훈고와 사장, 그리고 문장에 치우침'에 있다고 보았다.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 진정한 유자 즉 진유(眞儒)라면 『시경』『서경』『예기』『악기』『춘추』『역경』의 육학(六學)을 바탕으로 사람의 절제와 화합에 필요한 예악(禮樂)과 활 쏘고 말 타는 사어(射御) 그리고 글을 쓰며 셈을 하는 서수(書數)와 같은 여섯 가지 기예 즉 육예(六藝)를 연마하고, 전곡(錢穀)과 갑병(甲兵) 즉 재정과 군사 등에도 밝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쉬웠다. "우리 동지들은 시무가 중요하다고 말만 할 뿐, 이런 재주와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유평사를 보내며(送柳評事序)」에 나온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호면 금계리. 이종준을 배향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이종준은 성품이 씩씩하고 쾌활하며 남효온, 권경유, 이정은 등과 절친하였다. 성종 16년(1485)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의령현령으로 재직하며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그림에 뛰어나서 매와 죽을 잘 그렸다고 하고, 전칭(傳稱)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송학도(松鶴圖)」가 있다. 일화가 전한다. 서장관으로 북경을 가는 도중에 역관(驛館)의 병풍 그림을 보고 붓으로 뭉개버렸는데, 귀국 길에 중국 관리가 새 병풍을 들여놓자 그림을 그려 놓고 왔다고 한다. 또한 시문도 일품이었는데, 남효온은 '맑고 차며 세상 티끌을 벗어났으니 화식(火食)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인(仙人)이라야 이런 시를 지을 것이다' 하였다. 경광서원은 본래는 유정사(有定寺)라는 절터에 선조 원년(1568)에 들어선 서당이 1686년(숙종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 시절 정국이 불안하자 안동으로 낙향한 배상지(裵尙志)와, 유성룡·김성일에게 배우고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여 후기 영남학파를 일으킨 장흥효(張興孝)를 같이 모시고 있다.ⓒ김성규 |
김일손은 시무를 백성을 가르치고 살리자면 반드시 익혀야 할 사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연산군 원년(1495년) 권경유(權景裕)가 홍문관 교리라고 하는 중앙의 근시청요직(近侍淸要職)을 사양하고 작은 고을 제천의 현감으로 나갔을 때였다. 서로 뜻이 통하고 무척 친하여 서로를 분신으로 여긴 사이였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데다 식구가 많아 녹봉으로 한양 살림을 꾸리기가 만만치 않은 터에 상처(喪妻)를 당하자 더욱 막막하여 지방관을 자청한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손이 「교화설(敎化說)」을 지어 보냈다. 먼저 교화를 정의하였다. "학자의 사명은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에 있고 위민을 하려면 백성을 착하게 하는 선민(善民)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교화다." 교화는 사람을 사람의 길로 인도하는 사업이었다. 어떻게 백성을 교화할 것인가?
교화를 생각하는 선비는 자신을 먼저 낮추어야지, 사람을 무시하거나 세상을 낮추어 보아서는 아니 된다. 열 집 사는 고을이라도 반드시 충신(忠信)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므로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요, 향음례(鄕飮禮)와 양로연(養老宴)의 시행도 세상을 낮추어 보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세상을 낮추어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불비인(不卑人)과 불비세(不卑世)!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일이 수월하지 않으면 의례히 '사람들이 본래 비루하여 그렇다' 혹은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 하며 백성 탓, 세상 탓으로 돌리는 세태에 대한 일침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훌륭한 관료라면 교화에 그칠 수는 없다. '수국(壽國)'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나라의 무궁과 백성의 장수라는 두 가지 뜻을 담았다. 나라가 만세토록 건재하자면 백성이 제 명대로 오래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국을 생각하는 관료라면 마땅히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의지할 데 없고 가난한 홀아비와 과부, 고아 등 홀로 사는 사람들을 젖먹이처럼 보살펴야 한다.' 김일손은 '가난을 구제하는 것이 교화보다 먼저다'라고 하였다.
나의 친구는 바보다
권경유가 제천에서 객관 서편의 허물어진 집에 지붕을 새로 얹고 단장하여 서재로 꾸미고 김일손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요사이로 말하면 공공도서관을 세웠으니 기념사를 부탁한 것이다.
김일손이 서재의 이름을 '치헌(癡軒)'이라 지었다. '바보의 집'이라는 뜻이다. 먼저 권경유의 어리석음을 적었다.
그대는 외딴 고을의 현감을 자청하였으니 벼슬살이에서 바보짓이다. 그대는 조용히 앉아서 못된 토호와 간사한 향리를 무찌르며 홀아비와 과부를 어루만지는 데에만 마음을 두고 세금 걷는 데에 서투르니 정사에 어리석다.「치헌기」
중앙의 요직에 있을 사람이 고을 현감을 자청하였으니 벼슬의 바보요, 토호 향리와 같은 지방 유지를 싫어하고 홀아비 과부 같은 힘없는 백성을 어루만지며 세금 걷는 데 서투르니 행정의 바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벼슬살이와 지방정치에 밝다는 말을 듣는가? '중앙의 요직을 바라며 민첩하게 사무를 처리하며 백성을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윗사람을 받들며 칭찬을 바라는 관리였다.' 조정의 실정과 관료의 모습에 대한 지독한 냉소였다. 권경유의 바보스러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줄여 옮긴다.
못난 관리는 관아가 허물어져도 그대로 방치하고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정사를 간명히 하였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분별이 있고 명석하다고 생각한 관리들은 멀쩡하게 좋은 관아까지 헐고 급히 말을 몰듯이 새 집을 지어놓고 "부지런하고 결단력이 있다"고 소리치면서 토목공사가 백성을 고단하게 하였음을 모른다. 그런데 그대는 허물어진 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얹었으니 분명 못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별이 있다고도 못하겠다. 살고 있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대신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사는 유수(遊手)를 부리면서 그대 마음이 오히려 고단하였을 것이다. 그대의 노심(勞心)은 바로 그대가 일에 서툴기 때문이다.「치헌기」
김일손은 어느덧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벗이여, 그대는 홀로 마음을 힘들게 하며 백성을 아끼고 고을의 모습을 바꾸는 데 성심을 다하고 있을 뿐 세상의 간사한 기교를 정녕 모르는구나.' 그러나 이 집이 그대의 착한 정사의 산물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지 말라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은 모두 조물주가 주관하고 공물이 아닌 것이 없는데 만약 어떤 한 물건에 집착하면 그 순간 사사로움이 끼어들게 된다."
오늘날 대규모 공사와 장대한 건축으로 '우리 고장을 새롭게 바꾸었다'고 하며 또한 '이것이 내가 한 일이다' 큰소리치는 군상에 대한 경종으로 들린다. 이렇듯 친구를 바보라고 부르며 서로 애틋한 웃음을 주고받았으니 아름다움이 차라리 눈을 시리게 한다는 말이 이런 정경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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