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은 문장을 지엽적 기예로 생각하였다. 도본문말(道本文末) 내지는 '문장은 도를 담는 그릇이다'는 재도문학론(載道文學論)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효용성은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문장이 아니면 도를 드러낼 수 없다는 입장인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에 보다 가까웠다. 「권오복(權五福)의 관동록(關東錄)에 붙이다」에 나온다.
사장(詞章)은 특히 말기(末技)일 뿐이다. 그러나 도(道)가 있으면 반드시 말[言]이 있고 말이 정갈하여 사람을 감발(感發)시키면 시가 된다. 그러니 사장이 도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권오복은 호가 수헌(睡軒)으로 '그대 간담이 나의 간담이고, 흉중의 호발(毫髮)이라도 서로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고 할 만큼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
김일손에게 좋은 글은 유희가 아니라 도를 드러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이었다. 문장의 가치를 삶과 글의 일치에 두었던 것이다. 김일손이 보기에 권오복의 글이 바로 그랬다. "어찌 시로만 볼 것인가? 조금도 연월(烟月)을 조롱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충과 효를 향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 손에 잡히는 듯하다."
문장이 도의 말기이며 또한 기예라는 생각은 권오복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손이 소과에서 장원하였을 때 지은 「장원 김일손에게 올린다」에서
수식하며 다듬는 일 본래 폐와 간을 괴롭히는 법 雕篆從來困肺肝
문장은 작은 기예니 돌아볼 것 없다네 文章小技不須看
하였다. 김일손도 반가웠다. "문자로 그대 아양을 따르지 않으리니 임천에서 끝까지 살아도 내 몸은 편하다네." 마치 '그대가 비록 좋은 글로 나의 장원을 축하하지만 나는 문장으로 그대의 칭찬에 답하지 않으리라' 하는 듯하다. 믿음과 정감이 넘친다.
김일손은 문장을 위한 문장, 즐거움을 위한 문장을 싫어하였다. 김일손의 문장은 세상에 대한 고뇌, 묵직한 성찰을 담고 있지만 항상 경쾌하였다. 또한 경사의 해박함을 자랑하지 않는 담박함이 있었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담았다.
싸늘한 감상
김일손은 기문이나 서문 혹은 발문 등을 많이 부탁받았다. 일세의 문장으로 대우받은 것이다. 이럴 때면 보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고 꾸임 없이 써내려갔다.
성종 22년(1491) 8월 병조좌랑 겸 교서관 박사로 봉직하며 『자치통감강목』을 교정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승지이던 강구손(姜龜孫)이 증조부 강회백(姜淮伯)이 심은 '정당매(政堂梅)'에 얽힌 사연을 여러 문사에게 말하고 시문을 구하여 한 권을 엮고서 김일손에게 말미(末尾)를 요청하였다. 후록(後錄) 혹은 발문이었다.
김일손은 이미 '정당매'를 알고 있었다. 정여창과 지리산에 가면서 단속사에서 보고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력부터 담담하게 풀었다. 바로 「정당매(政堂梅)의 시문 뒤에 적다」였다.
단속사 앞뜰에 두 그루 매화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밑둥치가 절반은 썩어 들어간 고목(枯木)이고 한 그루는 한 십 년이 되었다. 오래된 매화는 젊은 시절 절에서 공부하던 강회백이 심었는데, 훗날 의정부 이전의 최고 권부인 문하부(門下府) 2품 벼슬인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기 때문에 절에서 '정당매'라 이름을 지었고, 다른 한 그루는 강구손이 부친 강희맹의 명을 받고 선대의 유적을 살피러 갔다가 심었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 옛터. 8세기에 창건되어 솔거(率去)가 벽화를 남겼다는 사실로 유명한 단속사는 지금은 절터만 있다. 동서로 배치된 삼층석탑이 보물 제72호와 제73호이다.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젊은 시절 잠시 단속사에 머물렀는데 인근 산천재(山天齋)에 살던 말년의 조식을 만났다. 이때 조식이「유정 스님에게」란 시를 주었는데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가 푸른 열매 맺었나니" 하였다. 정당매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단속사의 정당매」란 다른 시에는 "조물주가 추위에 절조를 지키는 매화의 일을 그르쳤나니, 어제도 꽃피고 오늘도 또 꽃을 피웠구나" 하였다. 정당매를 보면서 고려 말에 출사하여 조선에서도 승승장구한 강회백의 처신이 생각났던 것이다. '정당매'는 고려 말 하즙(河楫)이 심은 단성면 남사리 여사촌 분양고가(汾陽古家) 소재의 '원정매(元正梅)', 그리고 조식이 61세에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산천재(山天齋)를 조성하고 심었던 '남명매(南冥梅)'와 더불어 '산청삼매(山淸三梅)'로 꼽힌다.ⓒ산청군 |
강구손 가문은 당대의 훈구명가였다. 조부 강석덕(姜碩德)은 세종과 동서지간이었고, 부친은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으며 『금양잡록(衿陽雜錄)』이라는 농서까지 남긴 강희맹(姜希孟)이며 화가로도 유명하여 삼절로 이름이 높은 강희안이 백부였다. 성종의 즉위로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호(封號)된 강희맹이 강회백과 강석덕(姜碩德) 그리고 강희안(姜希顔) 3인의 시문을 모은 『진산세고(晉山世藁)』를 세상에 보였을 때, 세간에서는 당대 최고의 가승문집(家乘文集)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서문을 바로 스승 김종직이 지었다. 강구손도 김종직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강구손과 김일손은 동문인 셈이다.
김일손 역시 가문의 성망(盛望)을 모르지 않았기에 '강회백만이 자손을 둔 것이 아니라 그가 심은 매화까지 자식을 두었다' 하며, '풍류(風流)의 높은 품격을 상상할 만하다' 하였다.
사람은 가지만 때는 머무는 것이고, 일은 지나지만 이름은 남는 것이니 궁벽의 산중 끊어진 계곡의 옛 고목에서 새 가지가 나와 차가운 그림자로 서로를 상대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회가 없을 것인가. 「정당매시문후」
자신에게 발문을 부탁한 강구손의 뜻을 헤아린 것이다. 여기까지는 풍경에 대한 활발한 소묘였다. 구태여 말하면 풍경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조물주(造物主)는 본래 마음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하면서부터는 달랐다. 먼저 당나라 사람으로 화석(花石)을 좋아한 이문요(李文繞)가 수도 없이 끌어 모았다가 이 때문에 자손을 수고스럽게 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하며 적었다. "선세의 유지(遺趾)를 추모한다고 하여 초목 때문에 고역(苦役)을 치르면서 또한 후손에 남긴다고 하는 것은 결코 조물주의 이치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하늘이 사물이나 인간을 낼 때 아무런 작위가 없고 의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새삼 들추면서 초목 사랑이 지나치면 자손에게 수고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피어남과 메마름과 살고 죽음은 모두 조물주의 처분에 따른 것이니, 비록 사람에게 맡겼다고 하여도 사람의 꾀를 허용하지 않는 법, 이를 모르면 조물의 유위(有爲)를 훔쳐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하늘의 조물주가 정한 운수를 받았는데, 작위적으로 생명을 관장하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키우려는 꾀를 부리는 일은 부질없다, 한 것이다. 그리고 당부하였다.
매화로 선조의 뜻을 이어가는 것은 괜찮지만 이 매화를 잊지 못하고 지나치게 사모하다가 시들거나 부러질까 걱정된다.
진정한 조상 추모는 무절제한 완물(玩物)·완상(玩賞)이 아니라 조상이 물건을 남길 때의 마음을 음미하는 완심(玩心)에 있다는 것이다. 민생을 생각하지 않는 취미는 하늘의 뜻은 물론 조상을 추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는 듯하다. 그러니 서늘하다. 조상 추모와 가문 품격을 자랑하고 싶었던 강구손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차가운 사랑
완상의 경계, 완심의 추구를 향한 김일손의 생각과 마음은 임금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찍이 자기의 별장인 비해당(匪懈堂)의 풍물을 칠언율시로 읊은 안평대군이 당대 문사인 최항·신숙주·성삼문·김수온·서거정·강희맹 등으로 하여금 따라 짓게 한 적이 있었다. 이때 풍물이 마흔여덟 가지나 되었기 때문에 「사십팔영(四十八詠)」이라고 하였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비경을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로 그리게 하고 여러 문신에게 시문을 구한 사건과 더불어 한 시절 문치의 융성을 상징하는 문화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 이번에는 성종이 안평대군의 시에 차운하고 이를 따라 최고의 문사들인 홍귀달·채수·유호인 등에게 짓게 하였다. 성종 치세의 「사십팔영」의 탄생이었다. 그만큼 문치의 기운이 활발하였음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김일손도 포함되었다. 성종 24년(1493) 8월 임금이 내린 휴가를 이용하여 호당에서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중에 「해를 향한 해바라기(向日葵花)」가 있다. 햇빛 따라 움직이다 해가 지면 고개 숙이는 해바라기는 흔히 임금(해)을 바라보는 신하의 충절, 마음가짐으로 비유되곤 하였다. 다음은 성종의 노래인데 후반부만 옮긴다.
그윽한 향기는 가장 먼저 시인의 배를 채우고 幽香最入詩人腹
농염한 넉넉함은 가녀의 입술을 가볍게 하지만 濃泰還輕歌女脣
낮은 처마 너머로 고개 쳐드는 것은 충절을 드러내는 것이라 開向小軒忠節著
한 떨기가 응달 산에 있어도 이름 있는 자들을 꾀일 만하여라 陰山一朶噉名人
해바라기와 같은 충절이 그대들에게 있는가, 묻는 듯하다. 그러나 의심이 없고 걱정이 없다. 자신의 치세에 대한 자족함이리라. 김일손이 따라 읊었다.
꽃무리 퍼지자 고개 숙임 자랑스러워라 鵝暈初勻誇點額
씨앗 보이며 살짝 입술을 반쯤 여네 犀瓠半露見開脣
그대 천성이 하늘을 향하고 있음을 알면 知渠向日元天性
주인 배반하는 일이 천추의 부끄러움 남길 것을 알아야 하리 愧殺千秋背主人
해바라기만한 충절을 드러내지 못하는 신하가 없지 않음을 은근히 꼬집는 듯하다.
임금의 시에 차운한다는 자체가 광영이었다. 문재가 당대 일류임을 임금이 인정하고 또한 임금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음을 증빙하고 과시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김일손도 광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서운하였다. 시로 다하지 못한 감회를 「사십팔영의 발문」에 풀었다.
김일손은 시의 형식을 칠언율시로 정한 것부터가 탐탁하지 않았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 나온 율시가 차츰 형식에 구애되면서 성정의 표현을 자못 제약하게 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즉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면 시병(詩病)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 주위의 풍물이 어찌 마흔여덟 가지나 될 수 있는가, 물었다. 즉 '자미(紫薇)와 백일홍(百日紅)' '산다(山茶)와 동백(冬柏)'은 본래 한 가지인데 민간에서 달리 부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둘로 나누는 식으로 초목과 화석, 그리고 경치를 억지로 만드니 마흔여덟 가지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정의 도야에 보탬이 되지 않고 세상의 이로움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사십팔영」을 이렇게 규정하였다. '마음을 즐기고 마음에 노니는 완심이 아니라 사물에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완물의 유희이며, 음풍농월에 지나지 않는다.' 언뜻 안평대군에 대한 혹평으로 들으면 무관하지만 임금도 비판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었다. 무척 당돌한 언사였다. 그것은 임금에 대한 무례와 오만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라
김일손은 화초 사랑, 풍경 심취의 노력을 세상과 사람에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아니 그런 정도 정성이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예쁜 화초 중에 중국에서 들여온, 특히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에게 시집 오면서 가지고 온 화초가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풀었다. "오호라! 식물은 풍토와 원근을 분간하지 않고 능히 자라 오래 살아감이 이러한데 왕도는 어찌 중하와 이적, 대국과 소국 사이에 틈이 있겠습니까?" 본래 다른 곳에서 생장하던 화초가 풍토가 다른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는 것처럼 임금의 바른 길과 좋은 세상을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문치(文治) 백 년, 교육과 양성이 오래되었는데 큰 산과 깊은 계곡 사이에 어찌 뜻을 숭상하는 선비가 없어 조정의 벼슬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겠습니까? 장차 세상의 어진 사람을 숭상하는 바가 화훼에 미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화초와 풍광을 사랑하듯이 인재를 살피고 아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문음으로만 인재를 등용하지 말고 옛적의 제도인 향천(鄕薦)·향거(鄕擧)를 부활할 것을 제안하였다. 향촌의 여론을 들어 먼 시골, 깊은 산중에 숨어 있는 인재를 찾아내 발탁하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김일손은 화초와 암석의 풍경에서 인간 생활과 국가 정치의 교훈을 찾을 것을 건의하였다. "사물마다 일종의 의사가 없는 바가 없으니 이를 보며 만물의 삶의 의지[生意]를 살피시며 어진 마음을 기르시고 이를 보고 덕의 향내를 본받으려 하시며 요염함을 경계하소서." 예를 들었다. 풍상에도 변하지 않는 송죽을 보고 군자가 지키려는 절조를 알아야 하고, 낭떠러지와 골짜기의 그윽하고 고요한 바위에서 은사가 벼슬을 구하지 않는 취향을 엿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에 따라 바른 이치를 얻어가는 '수물격득(隨物格得)' 즉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길이었다.
이때 김일손의 나이 갓 서른 살, 노성(老成)의 준엄함이 느껴진다. 이러하니 시의 향내가 달랐다. 시격(詩格)의 차이였다. 다음은 「해남의 옥돌」전반부다. 해남의 옥돌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에서 많이 나온다. 성종이 읊었다.
푸른 바다에 내린 쇠줄을 구름 끝에 매달고 滄溟鐵索繫雲根
갈고리로 옥 뿌리를 긁어 파니 푸른 빛깔이 드러나네 鉤出蒼然玉樹痕
푸른 이끼 더덕더덕 고기비늘이 움직이는 듯 苔鮮磷磷漁甲動
촛불처럼 밝은 빛이 물무늬에 비치듯 하네 輝光燭燭水紋奔
성종은 옥돌을 캐는 웅장함, 바다의 빛깔을 담아내는 옥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김일손은 달랐다.
번들거림은 군자의 덕만큼 사랑스러워도 愛潤可方君子德
기물 좋아함은 높으신 제왕이 경계할 일 好奇當戒帝王尊
어리석은 사람이 아녀자 유혹하는 노리개나 된다면 癡人作佩媚兒女
차라리 경전을 사서 후손에게 물려줌이 어떠할지 何以買經遺後孫
옥돌의 아름다움에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도덕을 찾고 사치품을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그러면서 옥을 사는 비용으로 경전을 사서 보급함이 났다고 하였다.
풍물과 산하에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김일손의 시선은 「눈잣나무」에서는 이렇게 발전한다.
백 척까지 너울대며 구름 위까지 솟을 텐데 婆娑百尺勢凌雲
마른 껍질 성긴 수염은 아직도 그윽한 향기 품어내니 瘦甲疏髥送暗芬
달 밝은 밤 학이 머물기 좋겠다만 好得月明留鶴羽
일찍이 벼락 맞아 용무늬마저 갈라졌구나 曾經雷霹坼龍文
서역이 원산지인 '눈잣나무'는 고산지대에 분포하여 온대에서 잘 자라지 않는 만년송(萬年松)인데, 관상과 분재(盆栽)에 제격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만년송을 보는 순간 세상을 만나지 못한 인재, 그리고 꺾이는 운명을 타고난 안타까운 인재가 먼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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