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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길

[이종범의 사림열전]정여창: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⑥

남계(灆溪)의 풍경

연산군 4년(1498) 7월 정여창은 함양에 있었다. 김일손이 찾아왔다. 연산군 원년(1496) 정계를 은퇴하여 공부하며 지낼 요량으로 정여창의 이웃 마을 남계에 정사(精舍)를 마련해 놓았다가 모친상을 마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시국을 근심하였다. 김일손이 말하였다.

선왕(先王) 때 젊고 뜻있는 선비가 요순시대를 이룩할 수 있다는 포부로 극언을 꺼리지 않아 권간(權奸)의 미움을 샀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고 세태가 변하여 간신들이 뜻을 얻었으니 머지않아 화가 박두할 것이다. 『탁영선생연보』연산군 4년 7월조

성종 치세에 치세를 이룩하고자 한 비판적 언론활동이 머지않아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정여창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손이「취성정부(聚星亭賦)」를 지어 보였다. 후한 시절 환관의 횡포와 권세에 고담준론으로 대항하던 선비들이 화를 입은 '당고(黨錮)의 화'를 소재로 삼은 노래였다.

위로 임금이 혼매하니 主昏於上
아래에서 선비가 격분하다 士激於下
당고의 화 일어나 黨錮禍作
백성이 우러러보고 믿는 이들이 형을 받으니 崇信刑餘
삼백 년 키운 인재를 三百年儲養之人才
초개만큼도 여기지 않았구나 視草芥之不如


임금의 어리석음으로 나라의 인재들이 몰살당하는 참화가 예견된다는 것이다. 정여창이 '걱정이 너무 깊은 것 같다' 위안하였지만 내심 불안은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지내는데, 며칠 후 의금부 도사가 남계로 들이닥쳤다. 김일손은 '사초로 인한 필화일 것'을 직감하였다. 자신의 사초가 실록청에서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 남계서원(灆溪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명종 7년(1552) 강익(姜翼) 노관(盧祼) 임희무(林希茂) 등 지방 유생들이 발의하여 건립하였고 명종 21년(1566)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풍기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 건립되고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아마 이즈음이었을 것이다. 이황의 시 「남계서원」이 있다.
천령은 우뚝도 하여라 정공의 고향이라 堂堂天嶺鄭公鄕
백세토록 풍화 전해질 덕행을 사모하여 百世傳風永慕芳
사당지어 존숭함이 참으로 좋은 일이네 廟完尊崇眞不忝
어찌 문왕을 따라 일어날 호걸이 없을까 豈無豪傑應文王 ⓒ프레시안



실록청 당상 이극돈(李克墩)이 '전라도 관찰사 당시에 정희왕후의 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한 비행'이 김일손의 사초에 적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삭제하려다가 『성종실록』 편찬이 일정을 맞추지 못하자, '김일손의 사초에 왕실에 저촉되는 기사를 많이 적어 놓아 어렵다'고 핑계를 댔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백형인 김준손(金駿孫)의 사위가 홍문관 교리 손주(孫澍)에게 듣고 전해주었다.

실록청에 참여한 이목(李穆)도 비슷한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의금부도사가 김일손의 가택을 수색하던 중에 찾아낸 이목의 편지가 『연산군일기』에 전한다.

성중엄(成重淹)은 형의 사초를 한 자도 빠뜨리려고 하지 않고, 당상 윤효손도 형의 사초를 보고 '이렇게까지 인걸(人傑)인지 몰랐다'고 하는데도, 이극돈은 윤효손에게 사초를 숨기라고 하니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려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

이극돈이 김일손의 왕실 관련의 위험한 기사를 빌미로 자신의 비리 부분을 없애려고 하다가, 신진사림인 성중엄·이목만이 아니라 동료 당상인 윤효손과 알력을 빚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유자광·윤필상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리면서 의금부 관리가 급파되었던 것이다.

김일손은 정여창에게 당부하였다. "몸을 보전하시고 도를 이루시라." 자신이 지은 「정분전」이 사초에 실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정여창도 무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나도 곧 뒤따라가겠다."

정여창은 '난언(亂言)'에 걸렸다.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국가와 왕실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 세자 시절 공부를 독려한 정여창에 대한 연산군의 반감까지 겹쳐졌다. 모진 고문 끝에 장 100대를 맞고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 양희지가 급히 글을 보냈다.

옛 선현도 밝은 세상에서 멀리 쫓겨나는 일을 면치 못했으니, 북쪽 삼천리로 다급히 갔어도 죽지 않았으니 하늘의 뜻이다. 「정여창에게(與鄭伯勖)」

반드시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위로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연산군 10년(1506) 가을 갑자사화의 광란이 일기 전 4월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이해 가을 연산군은 고향에 묻힌 정여창의 관을 헤치고 시신을 부쉈다. 참혹하였다.

조금도 변치 않았다

유배지의 정여창은 정로부(庭爐夫)로 살았다. 관청 마당의 화로에 불을 지피는 천역(賤役)이었다. '향리나 관노, 그리고 백성들아! 오고가며 정여창을 보아라' 하였을 연산군의 음산함이 섬뜩하다. 관청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말렸지만, 더욱 공손하고 정성스럽게 일을 하였다.

정여창은 죽는 날까지 태연하고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언제 지었을까? '두견(杜鵑)'이 전한다.

두견새는 무슨 일로 눈물로 산꽃을 적시는가 杜鵑何事淚山花
남은 한을 풀명자나무 늙은 등걸에 의탁함인가 遺恨分明託古樝
슬픔은 맑고 충정이 붉은 것이 어찌 네 홀로만이더냐 淸怨丹衷胡獨爾
충신과 지사란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단다 忠臣志士矢靡他


봄에 붉고 하얀 꽃을 피우다가 모과보다 신 열매를 맺는 풀명자나무가 있는 고향 마을이 그리웠음이리라. 그래도 원망 없이 살리라 하였다.

정여창은 틈을 내서 간혹 배우고자 찾아오는 사람을 조금씩 가르쳤다. 언젠가 절도사의 아들 이희증(李希曾)이 입문하였다. 처음에는 "신하로서 국가에 불충의 죄를 지었고, 자식으로서 제사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만나는가?" 하며 사양하였다. 그러나 반가움에 던진 '진정한 충과 효가 무엇이겠는가?'는 화두였다. 용맹정진을 당부하였다.

자질이 남만 같지 못한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어찌 조금이라도 공력을 들인 효과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좋은 곡식도 자갈밭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비옥한 땅이라고 힘써 갈고 김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자질이 영민하고 환경이 좋아도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없으면 좋은 공부를 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유희춘(柳希春)의 「종성기문(鍾城記聞)」에 나온다. 유희춘은 을사사화(1545)의 연속선에서 그때 살아남거나 유배 가지 않은 외척반대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윤원형세력이 꾸민 '양재역벽서사건'(1547)에 걸려들어 종성에서 18년을 유배를 살았다.

정여창에게 배우고 16살에 진사가 된 이희증은 중종반정이 일어난 해(1506)에 문과에 들었다. 21살이었다. 스승도 잠시 거쳐간 예문관 검열이 되어 이때 스승이 생각났을 것이다. 이희증은 무오사화가 이극돈이 사법(史法)을 어지럽혀 일어났음에 발단하였음을 피력하며 이러한 참화를 방지할 대책으로 '사초의 무기명'을 제안하였다. "역사학이 없으면 시비가 가려지지 않는데, 직필을 보장하자면 사초에 이름을 적지 않아야 한다." 신진정예의 웅장한 출현이었다. 그러나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가 너무 짧았던 것이다. 조금 더 살았다면 기묘사림의 혁신정치의 한 복판에 있었을 것이다.

신화는 없다

기묘사림의 혁신정치가 궤도에 오를 때 그 시절 주역의 한 사람으로 경상감사로 왔던 김안국이 안음을 순시하며 향교의 교생에게 내린 시가 있다.

성리학의 연원이신 정선생이 계셨으니 淵源性理鄭先生
당시의 정치와 교화를 흠모하며 생각하네 欽想當時政化成
남기신 유풍으로 교생들도 응당 덕행 돈독하겠지만 餘俗定應敦德行
모름지기 소학을 더욱 닦고 밝혀야지요 須將小學益修明


정여창이 안음현감 시절 『소학』을 기초하여 후학을 계도하였고 나아가 성리학을 가르쳤음을 회상하며 후학들에게 본받기를 당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정여창을 '성리학의 연원'으로 추앙하였다. 또한 김안국은 정여창의 안음 제자 노우명(盧友明)을 천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실록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여창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으며 비가 오는 중에라도 일찍이 종종걸음으로 뛰거나 황급히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어떤 날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황급히 대문으로 뛰어 들어가니 정여창의 가솔 한 사람이 "주인어른께서 오셨다" 하였다. 그러자 한 노비가 "주인어른께서 어찌 이렇듯이 황급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실 리가 있겠느냐? 필시 나그네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중종 13년 6월 1일

정여창이 얼마나 조용하고 차분하게 살았는가를 전하는 일화이다. 앞에서 모친상중의 솔선수범과 자기희생으로 세상을 감동시켰다고 하였지만, 이렇듯 정여창은 말과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아니 행동 이전의 존재로서 세상과 함께 하는 신민(新民)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던 것이다. 맹자도 말하였다. "옛 사람은 뜻을 얻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제 몸을 닦는 것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정여창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한때는 무척 흔들렸었다. 아마 부친을 잃은 슬픔을 홀로 가누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통음을 하고 들판에서 쓰러져 밤을 보낸 적도 있었다. 모친의 간곡하고 엄격한 질책이 있었다. "오직 너만을 의지하는데 이와 같은 너의 모습을 보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느냐!"

정여창은 완전히 술을 끊었다. 성균관 시절 남효온과 같은 벗을 만날 때도 모친과의 약속을 지켰다. 예문관 검열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있을 때 임금이 내린 술까지 마시지 않았다. "신의 어미가 살아 있을 때 일찍이 술을 마신 일로 꾸중을 듣고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길, 이것이 정여창의 참 모습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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