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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

[이종범의 사림열전]정여창: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⑤

세상을 속이지 말게 하소서

성종 21년(1490) 7월 사섬시정(司贍寺正) 조효동(趙孝仝)이 학문과 행실의 선비로 정여창을 천거하였다.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 치상과 시묘 중에 감사와 군수의 도움을 사양하고 모친이 모아놓은 재산까지 기꺼이 버리는 모습을 자세히 올렸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있던 부친이 '이시애의 난'을 만나 전사하자, 천 리 길을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고,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자식을 서용한다는 예에 따라 군직(軍職)을 제수하자, "아비가 적병에 패하여 죽었는데 자식이 그 일로 영광을 받는 것은 나라의 은혜가 비록 중할지라도 마음에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하며 사양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성종은 감동하였다.

"이 말을 들으며 눈물이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구나. 빨리 뽑아 등용하여 착함을 표창하는 나라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성종실록』 21년 7월 26일

그런데 도승지 신종호가 좀처럼 믿을 수 없었던지 '경상감사에게 사실인지를 물어 확인하자'고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좌승지 김제신(金悌臣)이 거들었다. "신이 정여창의 사람됨을 아는데 군수가 효자로 추천하려고 하자, 저는 효자가 아니라고 하며 울며 사양하여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조효동과 김제신은 모두 함양 출신이었다. 이때 이조참의 윤긍(尹兢)도 가세하였다. 정여창의 출사의 먹빛 밑그림이 들춰지는 듯하다.

정여창은 소격서 참봉으로 발탁되었다. 알성 혹은 별시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자리였다. 훗날 조광조가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벼슬을 받고 알성문과에 응시한 사실을 생각하면 된다. 처음에는 사양하였다. 상소문이 있다.

신이 어미의 초상을 치르면서 안으로는 애통해하는 마음이 부족하면서도 겉으로는 슬퍼하는 모습을 지어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효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그런 말들이 고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으니 이는 향당을 속인 것이며, 국가에 전해져 포상으로 관직이 내려왔으니 이는 국가를 속이는 것이며, 만약 이를 받아들이면 자리를 훔치는 것이니 조정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참봉을 사직하는 상소」

정여창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효행은 자식 구실의 몸짓이었을 뿐, 고을의 이목을 어지럽혔으니 이로써 벼슬을 받으면 큰 죄가 된다.' 의례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실하다.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 12월 정여창은 별시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동안 경학 탐구에만 주력하고 시부(詩賦)를 소홀히 하여 쉽지 않았을 것인데 다행이었다. 양희지가 시를 보냈다. 「급제를 축하하며」이다.

새벽 해 궁중에 떠오르니 엷은 먹 빛깔 새로워라 曉旭金明淡墨新
간곡한 임금 말씀 진정한 유자라 하셨도다 丁寧天語許儒眞
평소 우리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로 이끌게 하고파 君民堯舜平生志
인재 얻었음이니 일어나 대궐 섬돌 보고 절을 올리네 起向舟墀賀得人


경상도 양산 출신으로 젊은 날 경주 남산에서 공부를 하다가 김시습을 만난 적도 있었던 양희지는 훗날 조광조를 희천 유배지의 김굉필에게 소개한 장본인이다.

세자와의 만남

정여창이 조정에 들어오니 김일손은 좋았다. 얼마 후 진하사(進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가게 되자, 자신의 후임으로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면 하였다. 임금에게 「검열을 사임하며 정여창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여창의 행실과 경학 그리고 문사의 장점을 열거하면서, 특히 '말을 기록하고 세세한 일까지 살피는 기언세사(記言細事)'의 재능을 강조하였다. 사관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리산 유람 중에 '정분에 관한 사실'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성종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여창은 조심스럽고 치밀한 문신으로 선발되어 천문과 산학을 익히기도 하였다. 당대 명사 최부·권오복·강혼·유숭조(柳崇祖)·이세인(李世仁)·정붕(鄭鵬)·이과(李顆) 등과 함께 하였다. 또한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관원이 겸직하던 세자시강원의 설서(設書)로도 봉직하였다. 세자의 공부에 필요한 서책을 선정하고 준비하는 직임이었다.

그때 세자는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읽고 있었다. 정여창은 시강원의 최고책임자인 이사(貳師) 빈객(賓客)으로 있던 정승과 판서와 상의하여 서책을 바꿀 것을 건의하였다.

『명신언행록』은 분량이 매우 많아 한두 해를 읽어야 마칠 수 있는데, 근본이 되는 책은 모름지기 젊을 때에 진강(進講)하여야 하므로 이제부터 사서(四書)를 진강할 것입니다. 『성종실록』 24년 8월 6일

그때까지 세자는 『논어』『맹자』와 같은 근본이 되는 경전을 읽지 않았음일까? 아니다. 전에 읽었지만 도저히 흥미도 없고 깊은 뜻을 생각하기도 싫어 『명신언행록』을 택한 것이다. 요즘의 '위인전기전집'인데 워낙 분량이 많고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겨도 되니 경서를 읽지 않으려는 핑계로는 그만이었다. 그것도 지루하게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여창이 이번부터 경전을 강독하자고 한 것이다. 성종은 응낙하였다. 세자는 어떠한 표정이었을까? 연산군의 게으름과 부왕 속이기를 매양 눈감아주던 김수동(金壽童)이 출세한 사실을 기록한 사평(史評)에 나온다.

왕은 동궁에 있을 적부터 이미 학문이 싫어 강독을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며 간언을 듣고도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조짐이 말씨와 얼굴에 나타났다. 시강원의 관료 중에 굳세고 바르며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이 바로잡으려고 풍간(諷諫)이라도 할 것 같으면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는데 조지서(趙之瑞)·황계옥(黃啓沃)·이거(李琚)·정여창 등을 늘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5년 1월 11일

세자는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시강원의 관료에 대하여 당장은 어찌 할 수 없었지만, 훗날 두고 보자는 협박을 표정과 말씨에 드러냈던 것이다. 결국 조지서 등은 시차를 두고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비하여 연산군에 영합한 김수동은 빠르게 승진하여 쉽게 정승이 되었고, 중종 치세 초반에는 영의정까지 지냈다.

안음 이야기

정여창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악양이 그리웠다. 동향이며 동문인 유호인에게 그 풍광을 눈에 선하게 이야기한 모양이다. 아마 낙향을 결심하였을 것이다. 유호인이 그렇겠다 싶어, 칠언율시 「악양정」을 지었다. 전반부만 옮긴다.

남쪽 하늘 끝으로 가고 싶은 마음 뭉클하니 一掬歸心天盡頭
그곳 악양은 곳곳이 밝고 그윽하지 岳陽無處不淸幽
구름과 샘 서로 또렷하여 흥취를 돋우는데 雲泉歷歷偏共興
벼슬을 부질없어하며 시름만 자아내네 軒冕悠悠惹起愁


정여창의 그리움이 유호인에 옮겨간 듯하다. 마치 자신이 살고 온 것 같다. 아마 '이것으로 위안을 삼아 힘을 내시게' 하였을 것이다.
해망서원(海望書院) 가는 길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해망서원은 정여창의 동갑나기 팔촌동생으로 능주 출신인 정여해(鄭汝諧)가 중종 3년(1508)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해망단(海望壇)을 1934년 현재의 규모로 증축하고 해망서원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정여해를 포함하여 5위를 모시고 있다. 정여해 역시 김종직에게 배웠는데, 시절을 비관하여 고향에 은거하여 사화로 희생된 스승과 벗의 넋을 위로하며 살았다. 언젠가 정여창이 정여해에게 다음과 같은 「족제 정여해의 해망 유거에 붙이다(題族弟汝諧海望幽居)」를 부친 적이 있었다. 그대의 은둔이 다행이며 부럽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마 벼슬을 그만 두려고 할 때이거나 유배지에서 보냈을 것이다.


고매한 선비 숨은 곳이라 사치스러울 리 없지만 高士幽居儉不奢
동구 밖까지 너무 고요하여 절경까지 자물쇠 채웠나 洞門寂寂鎖煙霞
소금 절인 나물은 너무 싱거워도 사람 사는 세상맛이라 齏鹽淡泊人間味
비 온 뒤 고사리 캐는 것도 무방하리니 雨後何妨採蕨芽

정여창의 마음은 이미 조정을 떠나 있었다. 함양 이웃고을인 안음(安陰)의 현감을 자청하였다. 조선후기에 지명이 안의로 바뀌고 오늘날에는 함양과 거창으로 나뉘었는데, 북학파의 대가 박지원(朴趾源)이 부임하여 큰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수리문제를 해결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정여창에게 안음 가는 길은 벼슬을 떠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황이 단양 현감, 풍기 군수 등을 거치며 '퇴거계상(退去溪上)'하였음을 연상하면 된다. 앞에서 잠깐 인용한 조신이 「안음현감을 축하하다」에 아쉬움을 전하였다. 제3수 후반이다.

조용히 강론할 곳에 從容講論地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이 宜得斯人在
이리 급히 귀향을 청하였으니 胡爲便乞歸
고을이 중하고 조정은 가벼워서인가 重外而輕內


세자시강원에서의 회한을 이해하면서도 어찌 될지 모르는 조정을 두고 떠나는 정여창이 아쉽고 서운하기도 하였으나, '고을도 소중하다' 하였다. 그러면서 당부하였다. 넷째 수 중간에 나온다.

시경과 서경을 따라야 교화가 쉽고 詩書易爲敎
형벌로는 공을 아뢸 수 없으리라 箠楚難奏功
어찌 술수로 백성을 부릴까 豈伊採術馭
마음을 터놓으면 민심이 통하지 坦腹民情通


목민관의 역할과 자세를 당부한 것이다. 그래도 허전하였던지 마지막을 이렇게 채웠다.

비록 일은 마땅하게 되겠지만 雖然事當爾
어찌 오래 새장에 갇혀 있겠나 豈久籠禽鹿
반드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從須決定歸
왕관곡에서 생애를 마쳐야 하리 終老王官谷


왕관곡(王官谷)은 중국 중조산(中條山) 골짜기로 당나라 사람 사공도(司空圖)가 난세를 피해 은거하여 삼휴정(三休亭)을 짓고 생애를 마친 곳이었다. 왕관곡을 빗대어 '결연히 은퇴하여 온전히 생애를 마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이다. 정여창이 어떻게 새겨들었을까?

남효온과도 무척 친하였던 조신은 역관으로 살았던 서자 출신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분명하게 당부할 수 있을까? '조신의 견식과 문장이 일품이었기 때문이다'고 이해하면 그만이지만, 의리와 관용의 마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신분과 권세의 담장을 높게 치는 법이다. 조신이 아무리 학문과 문장이 있다지만 도의가 통하고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만 그리하였으리라. 사람 만남과 글쓰기가 장벽을 넘어 교류와 소통으로 가는 여정이 이렇게 열리는가 싶다.

정여창이 안음 현감이 되자 사람들은 '고을 다스리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며 우려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고 한다. 정여창의 살아온 내력이나 성품을 보고 그리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해냈다. 먼저 민정을 위한 관과 민, 공과 사에 이로운 '편의조(便宜條)'를 제정하였다.

'편의조'는 원문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백성의 요역과 부세를 줄이고 농상(農桑)을 장려하며 토호와 향리의 가렴과 횡령을 막는 방안이 수십 항목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 유향소가 중심이 되어 제정된 사족 중심의 '향규(鄕規)'나 하층민까지를 포괄한 '상하합계(上下合契)'의 향약(鄕約)보다는 진전된 지방 자치의 규약이었던 것 같다. 아마 현재 읍지(邑誌)에 전하는 조선후기 각 지방의 '사례(事例)'에 가까웠던 것 같다. '사례'는 향족의 대의기구인 향청과 향리의 집무기구인 질청(秩廳)이 지켜야 할 오늘날의 조례(條例)의 성격이 있었다. 수령이라도 이를 무시하고 지방을 다스릴 수 없었다.

정여창은 양로례(養老禮)를 거르지 않았는데 남녀를 모두 불러 따로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미풍을 장려하자는 행사이지만, 백성이 억울하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숨기는 민은(民隱)은 이런 자리에서 들춰지게 되어 있다. 향촌의 불목(不睦), 불효(不孝) 그리고 토호 향리의 불법을 규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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