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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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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의 비밀

[이종범의 사림열전]정여창: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④

지리산의 야기(夜氣)

성종 19년(1488) 봄 김일손이 찾아왔다. 약관에 문과에 들어 중앙의 좋은 벼슬에 있을 수 있었지만 노모 봉양을 이유로 고향에서 가까운 진주향교의 교수를 자청하여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3일 동안 『대학』을 같이 읽고 풀었다.

김일손은 차분하고 진지한 정여창이 좋았다. 학문의 깊음도 알았다. 김굉필에게 반가움을 알렸다. "우리 중에서 학문을 점진적으로 고루 충실하게 성취한 사람은 정여창이다."

이듬해 성종 20년(1489) 2월에는 정여창이 청도를 찾았다. 김일손이 벼슬을 버리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던 참이었다. 지리산 유람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4월. 여름이 오는 길목, 두 사람은 함양 백무동에서 시작하여 여러 골짜기를 오르고 산등성을 탔다. 등귀사(登龜寺)·단속사(斷俗寺)·암천사(巖川寺) 등 큰 사찰과 금대암(金臺菴)과 불일암(佛日菴) 등의 작은 암자를 지났다. 천왕봉(天王峰)에 올랐고 향적사(香積寺)·영신사(靈神寺)·의신사(義神寺)를 거쳐 화개의 쌍계사(雙溪寺)를 만나고 악양으로 내려왔다. 하루를 푹 쉰 날을 포함하여 16일에 걸친 산행이었다. 산중에서 비에 흠뻑 젖기도 하고, 탁 트이다가 잠기곤 하는 풍광에 취하였다.

교수정(敎授亭)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고려말기의 문신으로 조선개국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은퇴한 조승숙(趙承肅,1357~1417)이 인근 자제를 가르친 곳으로 정여창의 개평 마을과 가깝다. 태종도 그의 인품과 절의를 칭송하여 침향궤를 하사하였다고 하는데, 마치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문익점에게 '고려충신지문'이란 정려를 내린 것과 같다. 성종 또한 조승숙을 위하여 제문(祭文)을 내렸는데, 이 중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라는 글귀가 있다. 고려의 충신으로 칭송한 것이다. 정여창을 학행으로 천거한 조효동이 바로 조승숙의 증손자였다.



정여창은 무척 힘이 들었다. 이미 불혹이었으니 20대 후반의 김일손을 쉽게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발이 부르트고 길이 미끄러워 스님의 밧줄을 잡고 힘겹게 오르기도 하였다. 끌려오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일손이 "스님은 어디에서 죄인을 끌고 옵니까?"하자, 정여창은 "산신령에게서 도망친 나그네를 잡아오고 있다" 하며 서로 웃었다. 등귀사에 도착하자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끼었다. 운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김일손: 조물주가 무슨 마음으로 산악의 형세를 감추는 것일까요? 우리를 시샘하는 것이겠지요.

정여창: 산신령이 소란스런 나그네에게 빗장을 치려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도망친 나그네'와 '소란스런 나그네'. 지리산에서 한동안을 지내 아쉬울 것이 없는 정여창과 처음 온 지리산의 풍치에 감탄하여 아쉬워하는 김일손의 모습이 훤하고 상큼하다. 그러다 밤이 되어 구름이 걷히고 달이 뜨자 희붐히 여러 봉우리가 드러났다.

김일손은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정여창이 독백을 새겼다. "사람의 마음과 밤의 기운도 이쯤 되면 모든 찌꺼기가 없어진다." 『맹자』의 '인의의 양심을 보존하자면 밤의 기운이 필요하다'는 구절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대여! 이 밤의 풍광에 취할 것만은 아니다'로 들린다.

금대암에서는 누더기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경을 외우며 도량으로 들어가는 20여 스님들을 만났다.

정여창 : 저들의 수행법은 매우 정밀하여 잡된 것이 없으며 나아갈 뿐 물러설 줄을 모른 채, 낮과 밤을 쉬지 않고 깨달음을 이루려는 공부를 한다.

김일손 : 불자의 깨달음을 위한 노고가 저러한데 학자가 성인을 이루려는 공부를 저렇게 한다면 어찌 성취가 없겠습니까?

스님의 정진을 보고 유자 나름의 자아비판처럼 들리지만 성인의 학문을 무시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천왕봉에서 김일손은 산신에 제사를 지내려고 그런대로 제문까지 갖추었다. 정여창이 '음사(淫祀)가 된다'고 말렸다. 이에 김일손, '산신령이 흠향(歆饗)하지 않을 것 같으면……' 하며 그만두었다.

향적사 한 구석에 석가의 으뜸 제자 가섭(迦葉)의 화상(畵像)이 있었다. 찬시(贊詩)까지 곁들었다.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난 삼절(三絶)로 많은 문인과 묵객(墨客)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왕위를 엿본다는 혐의를 받고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의 작품이었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대단하였던 김일손은 '어찌 진귀한 물건이 이 산중에 있는 것일까?'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였다. "왜 이곳에 구들 연기에 그을린 채 버림을 받아야 하는가?" 그래서 가져갔으면 하였다. 정여창이 만류하였다.

한 사람의 집에 사사로이 보관하는 것이 어찌 명산에 두고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보게 하는 것만 같을까.

머쓱해진 김일손! 이 물건이 지금도 지리산 어디에 있을까?

이제 섬진강, 저 물처럼

김일손은 '원숭이가 아니면 다닐 수 없을 만큼 골짜기가 높고 깊다'는 청학동(靑鶴洞)을 찾아가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산을 내려오니 바로 섬진강이었다. 정여창이 말하였다.

산과 물이 모두 인자와 지자가 좋아하지만 공자가 '물이여, 물이여' 하셨으니 산이 물만 못하다. 그러니 날이 밝으면 악양으로 나가 큰 물결을 보세나.

일찍이 '지자(知者)는 요수(樂水)하고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라' 하였던 공자가 어느 날 강가에 섰다가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멈추지 않는구나!'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달통함이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하고, 어진 사람은 사람과 세상을 아끼는 마음을 산과 같이 중후하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배움은 강물처럼 조금도 쉼이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정여창은 굳이 '공자는 산보다 물을 좋아하였다'고 읽었다. 성급한 조합인 듯하다. 그러나 아니다. 김일손이 산에 깊이 빠져 있음에 물을 보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꾸, 우리의 삶과 배움도 멈출 수 없는 물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읽힌다.

두 사람은 섬진강에 배를 띄웠다. 김일손이 먼저 지었을 것이다.「정여창과 같이 지리산에서 놀고 악양에 배를 띄우다」가 있다.

푸른 물결 가득하고 노 젓는 소리 고요한데 滄波萬頃櫓聲柔
소매 가득 맑은 바람 도리어 가을인가 滿袖淸風却似秋
고개 돌려 다시 보니 참 모습이 아름다워라 回首更看眞面好
느릿한 저 구름 두류봉 지나 자취를 감추네 閒雲無跡過頭流


시원한 강바람에 그만 계절을 잃어 가을인가 하다가 지난 보름 몸을 맡긴 깊고 짙은 산 빛깔이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였다. 이런 정경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정여창이 화답하였다. 과작(寡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악양(岳陽)」이다.

창포를 휘감는 바람 가볍고 부드럽네 風蒲獵獵弄輕柔
사월 화개는 이미 보리가 익어가고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을 둘러보니 온통 첩첩하네 看盡頭流千萬疊
외딴 배 내려내려 큰 강으로 흘러간다 孤舟又下大江流


늦봄의 포근한 강바람에 자신을 맡기며 지리산이 멀어져 가는 것을 아쉬워 하다가 문득 보리가 익은 절기가 왔음을 알고 반갑고 고맙다, 하는 듯하다.

두 사람은 내친 김에 진주로 가서 승정원 주서를 사임하고 내려와 있던 강혼(姜渾)을 만나고 밀양으로 가서 김종직을 찾았다. 이해 3월 형조판서가 된 김종직은 병환도 있었지만 거칠어가는 세월을 뒤로 하고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정여창은 거의 보름을 머물며 여러 경전을 읽고 찾아오는 학자들과 토론하였다. 악양에 돌아오자 어느덧 유월, 한 여름이었다. 꿈길 같은 산행, 그리고 공부 여행이었다. 오랜만에 스승과 만남도 있었다.

김일손은 저간의 여정과 대화를 「속두류록(續頭流錄)」에 담았다. 스승 김종직이 이미 지리산을 다녀와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을 꾸몄으니, 자신의 글은 '속편'이 된다는 것이다. 스승 존경이 제목에도 배어 있는데 『속동문선(續東文選)』에도 이렇게 실렸다. 그렇다면 근세에 꾸민 김일손의 『탁영집』의 「두류기행록」은 원래대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김일손은 기행문에 두 사람의 사연을 모두 적지 않았다. 정여창은 지리산에서 계유정난(1453) 당시 광양에 유배된 우의정 정분(鄭苯)이 교형(絞刑)을 당함에 이르러 '김종서와 죽은 것은 같지만 명절(名節)에는 다름이 있다'고 하면서 태연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세조 치세로 가는 억울한 상흔, 어두운 과거였다. 정분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탄(坦)선사가 생전의 부친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정여창을 간혹 찾아왔다가 전해준 사실이었다. 김일손은 정분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줄 것을 요청하였고, 정여창은 안음현감 시절 「정분전」으로 꾸며 김일손에게 보냈다. 이에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다. 무오사화 때에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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