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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봉투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가루,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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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봉투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가루, 정체는?"

[현장] 대학 청소노동자들,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 요구

·"이거 우리가 직접 만든 폭탄이에요"

지난 27일 오전 6시,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 이정화 씨(가명·61)가 하던 청소를 멈추고 정체불명의 페트병을 가리켰다. 작은 목재 청소도구함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페트병에는 불투명한 누런색 액체가 담겨 있다.

이 씨는 매일 아침 이 '폭탄'을 화장실 바닥 여기저기에 뿌리고 걸레질을 한다고 했다. 폭탄 재료는 유한락스, 퐁퐁, 하이타이 등의 화학 세제다. 이 씨는 "이 외에도 (회사에서) 지급받은 세제는 일단 다 섞고 본다"고 말했다.

듣고 있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지연 연구원이 "화학성분 세제를 막무가내로 섞어 쓰면 위험해요.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날 지 모르는데…"라며 누런 페트병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자 이 씨가 머쓱한듯 웃고 "그러니까 폭탄이라 그러지요"라고 말했다. 이 씨는 "화장실 말고도 청소해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라며 "빨리빨리 다 청소하려면 독하게 만들어야"한다고 말했다. "몸에 좋든 안 좋든…"이란 말도 덧붙였다.

이날 오전 5시 30분,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산업보건 전문가들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를 불시에 방문했다. 여섯 시간에 걸친 현장 조사결과, 전문가들은 "청소노동자들이 산업재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27일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산업보건 전문가들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를 불시에 방문했다. 사진은 한 청소노동자가 자신이 사용하는 세제를 실태조사팀에 보여주는 모습. ⓒ프레시안(최하얀)

이날 실태조사는 지난 9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이하 서경지부)가 대학 청소노동자 714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중 71.7%가 "산업재해를 경험했다"고 답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산재를 경험했다고 답한 노동자들이 그 원인으로 꼽은 것들 중 하나가 유해 화학 물질이다. 작업장과 휴게실에 알게 모르게 놓여 있는 유해 화학 물질 때문에 호흡기나 피부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 실험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가 항상 불안하다고 호소한다. 이날 실태조사에선 쓰레기 봉지를 옮기다 밖으로 튀어나온 주사바늘에 찔렸다거나, 실험 재료로 추정되는 화학 물질이 몸에 닿아 피부 이상에 시달렸다고 호소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청소노동자 박정숙 씨(가명·63)는 "쓰레기봉투를 묶기 전에 의례적으로 쓰레기를 꾹꾹 누른다"라며 "그 과정에서 정체 모를 하얀색 가루가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는데, 그 이후 한 동안 피부가 벌겋게 붓고 화끈거렸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이 외에도 약품을 닦은 걸로 보이는 종이나 실험용 장갑 등이 쓰레기 봉지에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며 "그 쓰레기들을 헤쳐모아(분리수거) 하는 과정에서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 실태조사에 응한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유해 화학 물질이 있다는 점을 사전에 교육받은 경험도 아예 없다고 했다. 박 씨는 "누가 어떤 약품이 어디에 있는지를 미리 알려주면 좋을 텐데"라며 "지금은 일을 하며 경험적으로 위험한 물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현재 노동자들의 증언만으로는 사고를 부른 '하얀색 가루'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다"며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치료를 받고 싶어 병원에 가더라도, 자신이 어떤 약품에 사고를 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속한 진단과 치료가 행해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 청소도구함을 끌고 가는 연세대 청소노동자. 노동자들은 사진에 보이는 고무장갑 안에 목장갑을 꼭 낀다고 한다. 깨진 유리나 실험실 주사바늘에 다칠 수 있기 때문. ⓒ프레시안(최하얀)

이 연구원은 "더불어 주목할 점은 실태조사에서 확인됐듯, 실험실과 같은 특수한 공간이 아니어도 청소노동자 주변에는 언제나 유해 화학물질이 있다는 사실"이라며 "독성이 강한 세제를 마구 섞어 사용하다 산재를 입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독성 세제를 섞어 쓰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청소량을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강한 세제를 필요로 하고, 결과적으로 이처럼 위험한 상황들이 연출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경지부는 이날 행해진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근로환경 개선을 연세대와 용역업체에 요구할 계획이다. 이와 동시에 서울 지역 몇 개 다른 대학에서도 같은 실태조사를 벌일 방침이기도 하다.

노조는 현재 △학내 유해물질 지도 작성 및 공개 △노·사공동 노동안전실태조사 △원·하청 노동안전보건협의회 구성 등을 근로환경 개선 요구안으로 염두하고 있다. 권태훈 서경지부 조직부장은 "유해물질이 어느 장소에 얼마큼 있는지를 알려줄 학내 유해물질 지도 작성은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중한 노동 강도 조정, 이를 위한 신규 인원 채용 등도 필수"라며 "이런 일들은 하청을 맡은 청소업체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만큼, 원청사용자인 각 대학이 함께 노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비정규직 노동자들, "어용노조 설립 주도한 용역업체 퇴출"요구

한편, 서경지부 연세대분회(이하 분회)는 이날 오전 11시 기자회견을 열고 청소·경비 용역업체 '제일휴먼'과 '장풍에이치알(장풍HR)'이 복수노조 설립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 업체를 퇴출할 것을 연세대에 요구했다.

연세대에는 지난 2008년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직 노조(서경지부 연세대분회)가 우선 세워졌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돌연 '제일연세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잇달아 지난 1월엔 '연세대시설관리지역노동조합'이 세워져, 단체협상 등에서 복수노조 혼란이 가중되어 왔다.

분회는 최근 설립된 두 개 노조는 용역업체 제일휴먼과 장풍HR이 주도해 설립한 '어용노조'라는 입장이다. 분회는 그 근거로 용역업체 '제일휴먼'이 작성한 주간업무 보고서를 일부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회사 차원에서 복수노조 설립 시 경우의 수 면밀 검토', '창립 총회안, 규약안, 행정관청 설립신고서 신고'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또 분회는 "장풍HR은 회사 노무사를 시켜 노동자들에게 복수노조 교육을 일방적으로 진행"하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을 차별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했다"고 밝혔다.

이에 연세대분회는 학교와 업체 간 용역계약이 만료되는 오는 12월을 앞두고 연세대에 이 두 업체를 퇴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분회는 "연세대가 노조 파괴를 벌이는 악덕업체와 또다시 재계약할 경우, 강력한 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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