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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 살다

[이종범의 사림열전]정여창: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③

악양통신(岳陽通信)

성종 11년(1480) 성균관에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뛰어난 유생을 천거한 적이 있었는데, 정여창이 뽑혔다. 서거정까지 임금 앞에서 경전을 강의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정여창은 섬진강변 하동 악양에 터를 잡았다. 거의 칩거였다. 훗날 안음 현감으로 가는 정여창을 전송하며 지은 조신(曺伸)의 「안음현감을 축하다」에 나온다. "본시 세상을 피한 것은 아니지만, 절로 세속과 멀어졌다네." 어느덧 은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부는 접지 않았던지 많은 책을 갖추었다. 조신의 시에 나온다.

옛집이 섬진강 나루에 있었는데 舊業蟾津上
팔구 칸 띳집에서 살았다네 茅簷八九居
물가 대밭은 천 이랑이 되고 水竹富千頃
그림과 책은 다섯 수레 가득했다 圖書盈五車


정여창은 제법 큰 팔구 칸 띳집을 지었으며, 강변에 대밭까지 조성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섬진강변에 대밭이 있다.
▲ 악양정(岳陽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정여창이 생활하며 강론하던 집이다. 무오사화 이후 거의 방치하여 흔적이 없어졌는데, 지방 유림이 1901년 4월에 중건하고, 1994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정개청의 악양 산하를 문헌과 전언에 따라 재생한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안견화풍의 산수화가 이징(李澄,1581~?)의 작품이다. 선조의 부마로 당대 명필이며 문장인 신익성(申翊聖,1588~1644)이 쓴 화제(畵題)와 발문이 적혀 있다. 인조 21년(1643) 작품으로 보물 1046호이다. 정여창은 말년에 '졸기만 하는 늙은이'라는 뜻의 수옹(睡翁)이라고 자호하였지만, 또한 평소 '천지간에 한 마리 좀 벌레(天地間一蠹)'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구장도」야말로 정여창의 진솔하고 겸허한 인품이 만들어낸 예술인 것이다.
정여창은 섬진강에서 낚시를 하고 간혹 말을 타고 쌍계사와 청학동을 찾았다. 그러나 공부 갈증은 컸고 의문 또한 끝이 없었으며 사우에 대한 그리움은 물씬하였다. 친구 박언계(朴彦桂)에 보낸 짧은 편지에 있다. ⓒ하동군

벗끼리 서로 아끼는 도리는 선으로 나아가자고 다짐하는 책선(責善)에 있을 것입니다만, 공부는 정성을 향하고 몸은 공경으로 제자리에 세운다고 합니다. 「답박형백언계(答朴馨伯彦桂)」

책선의 의미는 공자의 '친구라면 진심으로 말하여 착함으로 이끌어 주는 데에 있다'에 나온다. 여기에 덧붙여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다'는 구절을 되새기며 적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에 보내는 답장」일부가 남아 있는데 아마 '혹인(或人)'이 하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의 실체가 관통한다고 적었던 모양이다. 정야창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적었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함께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실[一實]'이 관통한다는 점은 정자와 주자가 다시 나와도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신 말씀 실로 크신 말씀입니다. 「답혹인(答或人)」

이른바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오로지 진실이 있을 따름이라는 '천인합일설'에 대한 소통이며 일치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순임금이 하늘에 울부짖었던 것과 같은 정성을 보여야 하늘도 비로소 감응하며, 하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바를 늘리고 보태준다'는 견해에는 찬동할 수 없었다. 정여창은 "사람이라면 하늘의 도를 이루어야 하는데, 사람의 으뜸 자리에 있는 성인이 하늘에 빌자 하늘이 보태주고 더해주었겠습니까?"하며 반대하였다. 하늘에 대한 울부짖음이나 기도로 사람의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하늘이 나를 낳고 덕을 주었다'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늘이 사람에게 내린 덕을 충분히 발휘하였을 때에 비로소 하늘에 다가설 수 있다고 하였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인간의 길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다정함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천리 밖 하늘로 솟는 고니가 될 수는 없다

악양 시절 정여창은 모친 봉양을 위하여 남원의 향리에 머물던 윤효손(尹孝孫)을 방문하였다. 스승 김종직과는 동년으로 일찍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선현의 성리학설에 대한 견해를 초록하는 등 경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예조참의를 지내다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자 사직하려고 하자 성종이 전주 부윤을 삼을 만큼 배려하였던 학자관료였다.

윤효손은 전주 시절 공자를 추모하는 석전(釋奠)에 반드시 참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수재와 한발 때면 매양 기도를 올렸고, 그러면 바로 감응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에 나온다. 하늘에 대한 기도와 제사를 정성껏 지냈고, 반드시 효험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살핀 「누군가에 보내는 답장」의 주인공이 윤효손이 아닐까? 그러나 단정할 수는 없다.

언젠가 정여창은 자신이 정리한 예설과 성리학설 관련 글에 대한 품평을 부탁한 모양인데,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다행히 윤효손의 답장 한 편이 전한다. 겸손함인가 아니면 조정에 다시 나서게 되어 분주하였음인가 무척 짧게 보낸 글이다. 먼저 '자신이 허명을 얻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하며, 이렇게 적었다.

나같이 세속에 구속되어 사는 구차한 처지에서 신선이 산다는 두류산 절경에서 홀로 착함[獨善]을 구하며 숨어 살며 높은 절조에 부응하려는 모습을 보니 그대가 고니라면 나는 애벌레나 다름이 없다.

정여창이 고니라면 자신은 애벌레라고 한 것이다. 분명 정여창의 공부와 수양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글투를 보면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고니와 애벌레는 '도를 추구하는 선비는 고니이고 현실에서 고달프게 사는 사람은 애벌레다'고 한 우화에 나오는데, 노장학파가 중심이 되어 여러 잡가의 학설을 집대성한 『회남자(淮南子)』에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읽힌다.

정여창! 그대는 산수를 벗 삼아 신선과 같이 살며 은둔에 자족할 것인가. 정녕 천 길 하늘 밖으로 솟는 고니가 되려는 그대가 나 같은 애벌레 신세에게 물어볼 것이라도 있을까?

윤효손은 훗날 무오사화 당시 실록청 당상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는 '김일손이 이렇게까지 인걸인 줄을 몰랐다' 하며 감탄하였는데, 자신의 비행을 적은 사초를 숨겨달라는 이극돈(李克墩)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하였다가, 결국 파직을 당하였다.

아아, 어머니!

정여창은 성종 14년(1483)에 생원이 되었다. 이미 서른넷, 늦은 나이였다. 다시 성균관 생활. 모친상을 마치고 조정에 나선 김종직도 만났을 것이다. 또한 7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어전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의한 첫 스승 이관의를 다시 뵌 것도 즐거움이었다. 이때 「율정(栗亭)이관의 선생의 운을 따르다」를 올렸다.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공부는 당대 으뜸이시지만 學究天人冠一時
거친 마을에 지내시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而居陋巷不求知
성군께서 특별히 부르시어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시고 聖君特召問治道
이내 산림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받아주셨네 因許山林意所之


이관의의 학문이 높은 것을 알았던 성종이 벼슬로 붙잡고자 하였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어서 향리로 떠나보내며 곡식과 면포 등을 상급으로 내린 사실을 담담히 적었다.

당시 왕실에서 창덕궁과 수강궁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승려를 동원한 일이 있었다. 한 달 사역을 마치면 도첩을 내렸는데 성균관 유생이 집단으로 반발하였다. 정여창도 나섰다.

한 달을 수고한 것으로 도첩을 내리면 종신토록 부역을 면제받는데, 이렇게 되면 군적(軍籍)에서 빠지려는 무리가 머리를 깎고 나라에서 궁궐 짓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성종실록』 14년 9월 11일

불교의 교리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도첩을 대가로 한 승려 사역이 양민의 군역기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왕실이 필요한 일이라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정여창은 공부에 열중하였다. 대과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대사성에게 『중용』『대학』의 난해한 구절을 깊이 질문하여 곤혹스럽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하지 못하였다. 연로한 모친이 고향을 휩쓴 역병에 걸린 것이다.

정여창은 즉각 함양으로 귀향하였다. 집은 물론 마을까지 격리되어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호는 지극 정성이었다. 일화가 전한다. '향을 사르고 기도를 하였고, 모친의 대변을 맛보고 차도가 없음을 알자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주위에서 '전염병도 효자는 해치지 못한다'는 감탄이 일었다. 그러나 모친은 세상을 하직하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른 장례는 엄격하고 비통하였다. 경상감사가 소식을 듣고 곽판(槨板)을 마련해주려고 하자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김종직의 처남으로 마침 함양군수로 와 있던 조위(曺偉)가 역군을 보냈으나 마찬가지였다. "백성을 번거롭게 하여 원망이 생기면 반드시 선모(先母)에게 미칠 것이다."

정여창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상장(喪葬)의 모든 비용은 가사와 가산에 무심한 자신을 생각하여 모친이 비축한 전곡으로 충당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모친이 이웃에 빌려준 전곡까지 깨끗이 탕감하고 모든 문권을 불태웠다. 모친이 남긴 재산을 자식들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동생들을 이렇게 설득하였다. "어머니가 나눈 곡식을 우리가 거둔다면 원망이 어머니에 미칠 것이다."

정여창은 모친 간병과 사망, 그리고 치상과 시묘 중에 모든 것을 버렸다. 금식에 가까운 절제, 그리고 살림을 돌보지 않고 기꺼이 버리는 모습은 진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성종실록』에 전한다.

정여창이 상을 치르는 것을 보고 한 고을이 감화를 받았는데, 한 갑사(甲士)가 상중에 죽만 먹으니 어느 백정(白丁)이 '정여창을 본받아 이렇게 죽만 먹으니 얼마나 고생스러운가?' 하였다. 『성종실록』 2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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