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생활 3년, 정여창은 서울에 나타났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마감되고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성종 7년(1476)이었다.
정여창은 성균관에 출입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누워 자지 않을 만큼 열심이었다. 성균관에서 만난 남효온의 증언이다.
정여창은 코를 골기는 하였으나 누워 자지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몰랐는데 어느 날 눈에 띄어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는 소문이 성균관에 퍼졌다. 『사우명행록』
참선하는 정여창! 아마 이 때문에 유교와 불교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았던 모양이다. 혹여 정여창은 유교의 존천리알인욕(存天理遏人欲)과 불교의 청정과욕(淸淨寡欲)이 취지는 같지만, 유교는 실(實)을 추구한 반면 불교는 공(空)으로 흘렀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남효온이 '정여창은 유교와 불교에 대하여 도는 같지만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적었을 것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소재. 사진은 고택 중 사랑채이다. 정여창의 후손이 1570년대에 건축하였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정여창은 젊은 시절 이천과 지리산에서 공부하고 중년이 되어서는 하동의 악양과 한양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린 시절은 의주까지 갔다. 10세 때에 부친 정육을(鄭六乙)이 의주부 통판(通判)이 되자 따라간 것이다. 이때 일화가 전한다. 부친이 명나라 사신에게 아들 형제의 이름을 부탁하자, '사람이 이름을 귀하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이름이 사람을 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이 아이로 집안이 창성(昌盛)하겠다'고 하며 '여창(汝昌)'으로 하고 동생은 '집안을 여유롭게 하라'는 뜻으로 '여유(如裕)'라 하였다고 한다.ⓒ프레시안 |
정여창의 「이기설」「선악천리론」등의 글을 여러 사람이 보았던 모양이다. 역시 남효온이 전한다.
정여창은 지리산에서 3년 동안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같으나 갈린 끝이 다르고, 선과 악이라도 본성은 같고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다. 『사우명행록』
정여창의 도기론(道器論)과 이기설, 나아가 본성과 기질에 대한 이해와 논리가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음을 말해준다.
특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서 사서와 오경에 통달한' 종친 이심원이 정여창의 성리학을 높이 샀다. 그랬음인지, 성종 9년(1478) 4월 '세조의 공신은 이제 물러나게 하자'는 상소에서 정여창을 '숨어 있는 어진 선비'로 추천하였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숨은 현자가 없을 것이라 하지만 공자가 '열 집 고을에도 반드시 마음을 다하고 믿음이 곧은 인재가 있다'고 하였으니, 함양의 정여창과 태인의 정극인, 은진의 강응정이 바로 숨어 있는 성현의 무리입니다. 『성종실록』 9년 4월 8일
최초의 가사문학 「상춘곡」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정극인(丁克仁)은 태인에서 향약을 시행하며 힘써 향풍을 교화하였고, 강응정은 주희의 「증손여씨향약」을 모범으로 남효온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과 '소학계' 혹은 '효자계'를 결성하여 매달 『소학』을 강론하는 등 학풍 쇄신에 자취를 남겼다. 이심원은 정여창을 이들과 같은 반열에 놓고, 성종이 신하로 삼아야 할 새로운 인재라고 천거한 것이다.
이때 도승지 임사홍은 처음에는 '정여창과 강응정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정극인은 문종 조에 일민(逸民)으로 천거되어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강개한 뜻이 남과 조금 다를 뿐이다'고 하며 애써 무시하였다. 그러다가 남효온이 '소릉복위'를 주장하자 마침내 적의를 드러냈다. "남효온, 강응정, 정여창 등은 『소학』의 도(道)를 행한다고 하는 붕당을 맺고 있다." 왕실의 인척과 훈구만이 임금의 유일 상대라는 발상에서 나온 공격이었지만 붕당을 군주의 통치권을 가로막는 불온한 존재로 간주하던 분위기에서 위험할 뻔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조심스런 무마로 무사하였다.
대화와 공부
남효온은 정여창이 좋았다. 단정하고 금욕적이며 정갈하였으며, 게다가 대화는 평범하지만 깨달음이 배어났던 것이다.
정여창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늘 평범한 말[常談]만 하였으나 내면으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성성(惺惺)하였다. 『사우명행록』
언젠가 두 사람이 『중용』첫 구절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 대하여 주희가 '하늘이 음양, 오행으로 만물을 낳았는데 기로서 형체를 이루고, 리 또한 부여하니 명령하는 바와 같다'고 주석한 구절을 두고 생각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정여창은 주희와 약간 다른 의견을 냈다. "어찌 기 다음에 리가 있을 수 있는가." 즉 '기 다음의 리[後氣之理]는 없다' 한 것이다. '리선기후(理先氣後)'였다. 남효온은 처음에는 높이 평가하였지만 석연치 않았다. 남효온이 반박하였다.
이른바 리가 기에 앞선다는 것은 리의 체(體)이며, 이른바 기가 리에 앞선다는 것은 리의 용(用)이다. 『추강냉화』
즉 '기에 앞선 리[理先於氣者]'는 의미의 존재로서의 '리의 본체(本體)'이며, '리에 앞선 기[氣先於理者]는 기가 있고 난 다음에 리가 주재한다는 의미이므로 '리의 발용(發用)'으로 정의한 것이다. 아무 조짐이 없는 본체의 리가 기를 타야만 비로소 기를 주재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정여창이 '주리(主理)'라면 남효온은 '주기(主氣)'였다.
두 사람은 '성과 정'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이다. 남효온이 단언하였다.
인간에게 모두 갖추어진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이라고 하면서 인의예지의 네 가지 발단을 구분하여 '성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인의예지의 발단 즉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마음도 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도 성이다' 한 셈이다. '마음에 인의예지를 드러내는 리가 있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마음이 곧 리다'라는 '심즉리(心卽理)'에 가깝다.
정여창의 답변은 전하지 않는다. 혹여 성즉리(性卽理)의 관점에서 '인의예지라는 성이 드러나는 마음은 정(情)이며 따라서 기(氣)다'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알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논쟁하였다면 훗날 이기논쟁과 사단칠정논변이 이때에 처음 시작된 셈이다.
심학논쟁
정여창과 남효온은 '마음을 잡으면 보존하고 마음을 놓으면 잃는데, 마음은 들고 남에 때가 없다'는 공자의 가르침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정여창이 마음을 출입하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듯 말하였다. 남효온의 「심론(心論)」에 나온다.
남효온: 마음이 어찌 출입하겠는가?
정여창: 여기에 앉아도 마음은 천 리 밖을 노닐다가 잠깐 사이에 텅 빈 곳에 있으니 출입하지 않는가?
남효온은 마음이 몸 밖에 나가서 들고 나는 것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찬성할 수 없었다. 「심론」에 적었다.
마음을 잡는 조심(操心)은 신체의 기운을 순수하게 하여 마음 또한 항상 밝게 한다는 것이니 '들어온다'고 하는 것이고, 마음을 놓는 사심(舍心)이란 신체의 기운이 어지럽고 거칠어져 마음의 주인이 밖에 있게 되어 '나간다'고 하는 것이지 마음이 정말로 출입하는 것은 아니다. 「심론」
즉, 몸에 있는 욕망을 철저히 지우면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되며,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외부에 빼앗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무리하기를 '경학에 밝고 행실이 돈독하기로 근세에 비할 바가 없는 정여창이지만 그 소견에 의심할 만한 것이 있어 견해가 다름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마무리하였다. 「심론」을 지은 이유이기도 하였다.
남효온의 마음은 바깥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맑은 거울과 같고, 깨끗한 물이었다. 즉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 즉 '부동심(不動心)'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여창의 마음 출입은 무엇일까? 「입지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구절이 있다.
배움이란 성인을 배움이요, 뜻[志]은 배움을 이루는 데에 두어야 하니,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선을 따르기는 산에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욕심을 따르기는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쉬운 법이니, 누가 천리를 보존하며 인욕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입지론」
'뜻을 어디에 두는가' 즉 천리인가 인욕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뜻의 세움을 굳세고 튼튼하게 한다는 다짐을 이렇게 적었다.
질풍과 횡류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뚝 자립하여 굽히지 않고, 바름을 지켜 세상에 나서 공을 세우고 이름을 알리고도 뜻을 변하지 않고 배움을 이루려는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될까? 「입지론」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동어반복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남효온이 마음을 보존하며 기르는 양심(養心)을 생각하였다면, 정여창은 천리를 찾아 인욕을 없애는 마음 세움 즉 정심(正心)에 방점을 찍었다. 정여창의 마음은 어디에 있든지 바름과 맑음을 본령으로 하였다. 물에 비유하면 맑음을 드러내는 유수(流水)라고 하였을지 모른다.
도학의 마음 이해는 정이·주희의 리학(理學)계열과 정호·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계열에 미묘한 차이가 있고 수양론과 실천론에 반영되었다. 전자가 거경궁리(居敬窮理)라면, 후자는 정좌심득(靜坐心得)이었던 것이다. 정여창이 전자라면 장재와 김시습의 기학을 수용한 남효온은 후자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학술논쟁의 첫 막이었으니, '심학논쟁'이라고 할 만하다.
정여창의 마음 이해는 훗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안음 현감 시절 마침 현풍으로 내려온 김굉필과 중간 지점인 거창군 가조면에서 간혹 만났는데,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정여창: 배움에도 마음을 모르면 배움을 어디에 쓸 것인가?
김굉필: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정여창: 없는 데도 없고 있는 데도 없다.
선문답 같지만 정여창은 마음을 어디에 두는가, 즉 정심과 입지의 문제로 생각하였음이 틀림없다.
정여창과 남효온은 무척 친하였다. 그러나 차츰 멀어졌다. 정여창은 남효온이 너무나 비분강개하며 금기를 거리낌 없이 들춰내는 것이나 죽림우사를 결성하여 세상을 깔보고 비웃는 것이 걱정되어 충고하였지만 남효온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문장론'에서도 충돌이 있었던 것 같다. 남효온이 전한다.
주돈이·정호·정이·장재·주희의 이론에 견해를 내고 오경에 정통한 정여창은 시문에 힘쓰는 선비를 '시는 성정(性情)에서 피어나니 애써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냐' 하고 홀로 타박한다. 덕을 갖추고 경서에 능통하면 시는 짓지 못해도 허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니 부유(腐儒)의 견해나 다를 바 없다. 『추강냉화』
'부유'는 변통을 모르며 제 생각만을 고집하는 선비를 일컫는다. '시는 도를 싣는 도구'라는 원칙만을 강조한 정여창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세상을 비관하며 시와 음악 그리고 술로 지새며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남효온의 입장에서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시도 잘 짓지 않는 정여창이 서운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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