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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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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리산 공부

[이종범의 사림열전] 정여창: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①

연보

본관 하동(河東), 자 백욱(伯勖), 호 일두(一蠹)·수옹(睡翁)

1450년(세종 32) 함양 지곡리 개평마을 출생
1467년(세조 13) 18세 부친상
1471년(성종 2) 이관의에게 배움
1472년(성종 3) 김종직 문하에 들어감
1473년(성종 4) 지리산 공부
1476년(성종 7) 1차 상경. 성균관 생활
1478년(성종 9) 종친 이심원, 상소에서 정여창 추천
1480년(성종 11) 성균관에서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천거함, 낙향
1481년(성종 12) 하동 칩거
1482년(성종 13) 남원으로 윤효손을 방문하고 성리학을 물음
1483년(성종 14) 2차 상경. 소과 급제(진사), 승려 도첩제 반대상소
1486년(성종 17) 모친 최씨 별세
1489년(성종 20) 4월 김일손과 지리산 기행
1490년(성종 21) 3차 상경. 소격서 참봉. 12월 별시 문과 급제
1491년(성종 22) 예문관 및 세자시강원에서 활동
1494년(성종 25) 가을 안음현감. 12월 연산군 즉위
1498년(연산 4) 7월 무오사화로 '난언(亂言)' 죄에 걸림
1504년(연산 10) 4월 유배지 종성에서 별세, 9월 부관참시

정여창은 한동안 지리산에서 공부하고 섬진강에서 살았다. 햇빛이 한결같아도 한 기슭이 양달이면 저 편은 음지라 하였을까, 너무나 담담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뜻, 인간에 대한 신뢰는 끝이 없었다. 섬진강 물길이 하염없이 굽이치는 것처럼. 정여창은 시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생활은 금욕적이었다. 그만큼 외향적 친화력은 부족했다. 그러나 마음의 벗은 적지 않았고, 학술적 만남을 즐거워하였다. 그러곤 다시 침잠하여 자신을 낮추고 비웠다.

정여창은 오랫동안 현실정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느덧 발을 들여놓았다. 정치는 권력과 재물로 하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일상의 수신과 실천에 따른 인간 감화의 힘이었다. 저술은 별로 남기지 않았다. 사화로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글과 말 모두에서 생략이 많은 탓이었다. 「이기설」「선악천리론」「입지론」이 전할 뿐인데 주리철학(主理哲學) 즉 이학(理學)의 관점에서 원시유교와 근세 도학의 요령을 풀어낸 선구적 업적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관념으로 흐르지 않았고, 역사와 현실에서의 인간의 길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다.

1. 지리산 공부

*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

정여창의 첫 스승은 경기도 이천에 살던 이관의(李寬儀)였다. 『해동야언』에 '정여창은 수(數)에 밝았다'고 전하는데, 아마 상수학(象數學)에 조예가 깊은 이관의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수학은 북송의 소옹(邵雍)이 '만물의 바탕에는 수(數)가 있음으로 상(象)이 있고, 상이 있음으로 형체(形體)가 있다'는 명제를 통하여 우주의 기원과 운행을 밝혀낸 성리학적 자연철학이었다.

정여창이 이관의에게 1년 이상을 배우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마침 김종직이 군수로 부임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찾아가 배웠다. 더욱 정진하리라 마음을 세웠으리라. 얼마 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소재. 문익점이 태어난 마을인데, 이곳에서 원나라에서 몰래 들여온 목화씨를 재배하여 보급하였다고 한다. 문익점은 고려왕조를 지탱하는 데 힘을 쏟으며 새 나라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낙향하였고, 자식들에게 '벼슬에 나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이때 술로 소일하였던 모양이다. 정여창이 「강성군(江城君)의 목면 재배기에 적다(題文江城君木棉花記)」가 있는데 아마 함양에서 단성을 지나 지리산 가는 길에 지었을 것이다. 강성군은 문익점의 봉호(封號)다.
한낱 전 왕조의 간의대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一介前朝諫大夫
백성 옷 입힌 공은 태산만큼 높아라 衣民功與泰山高
돌아와 날마다 삼백 잔을 마시며 歸來日飮杯三百
취하여 천지간에 누웠으니 그 기상 호걸이로세 醉臥乾坤氣象豪 ⓒ산청군



정여창은 산의 육중함과 계곡의 옹골참이 좋았고, 운무(雲霧)의 가벼움과 기암괴석의 형색(形色)에 설레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른 초목의 빛과 금수의 울음도 반가웠다. 한 사물, 한 현상도 한결같지 않음이 새삼스러웠다. 관찰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관찰을 부풀리고 다졌다. 개체에서 보편을 찾고 추상에서 구상을 보며 현상과 원리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 공부는 깊었다.

구체적인 사물과 운동은 형(形)과 질(質)을 드러내는 '기(氣)'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에 '기'의 원인이나 이유가 있으니 바로 '리(理)'였다. 리가 없다면 '어떤 사물'이 '바로 그 사물'이 되고, '어떤 현상'이 '바로 그 현상'이 될 수 없다. "기에는 리가 없을 수 없지만, 리 또한 기를 만나지 않으면 없다." 이렇게 정리하였다.

무릇 기 없는 리가 없고, 리 없는 기가 없으니, 리가 있는 곳에 기가 모이고, 기가 움직이는 바에 리가 유행하니, 피차 구별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리는 텅 비어 맑고 깊으며 지극히 선하며 영위가 없는 것이며, 기는 맑고 흐림과 깨끗함과 찌꺼기로 운행하니 서로 구별이 있는 듯하다.「이기설(理氣說)」

즉,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고 서로 섞일 수 없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불상리불상잡(不相離不相雜)'의 관계였다. 그러나 무차별한 혼효(混淆)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엄연히 선후와 차서가 있다. "먼저 리가 있고, 리는 기의 위에 있다." 즉 '이선기후(理先氣後)' '이상기하(理上氣下)'였다. 따라서 리가 본체라면 기는 발용으로서 이기의 관계는 병립할 수 없는 체용(體用)의 관계인 것이다.

천지 사이에 리가 있고 기가 있으며, 기의 유행은 리에 근본하지 않는 바가 없다. 「이기설」

기의 움직임은 리가 근본을 두고 있다는 것, 즉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원인의 리'는 '당위의 리' 나아가 '필연의 리'가 된다. 따라서 기는 리를 벗어날 수 없다.

리에 근본하지 않는 바가 없는 기의 움직임은 만 갈래로 달라진다고 하여도 하나의 근본은 같으니 이것이 진정 리다.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이른바 기의 만 갈래 다름도 '하나의 리'를 근본으로 한다는 '이일만수(理一萬殊)' 혹은 '이일분수(理一分殊)'였다.
'하나의 리' 즉 리의 총화가 바로 태극이었다. 태극은 송나라 성리학을 열었던 주돈이(周敦頤)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하였듯이 존재로서는 없으나 의미로서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의미적 근원이었다. 이렇게 이해하였다.

태극은 텅 비어 맑고 깊으며 아무런 조짐이 없다고 하여도 그 안에 이미 만 가지 형상이 갖추어 있어 만 가지 사물 또한 서로 다름[殊]이 있지만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기설」

태극이라는 하나의 근원과 원리가 관통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만물은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여창은 현상 이전의 이유나 원인, 구체 이전의 추상을 중심으로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하였다. 구태여 말하면 '주리론(主理論)'이었다.

* 도의 주인은 인간이다

정여창은 이기설을 인간의 도덕과 실천의 문제와 연결 지었다. 이렇게 이해하였다. 즉, 인간은 몸[形]에 기운이 깃들며 형기(形氣)가 있게 되고 또한 하늘의 이치[理]를 받은 본성[性] 즉 이성(理性)을 갖추고 있는데, 리가 기의 앞에 있고 또한 그 위에 있듯이, 이성이 형기에 앞서 있고 또한 위에 있다. 또한 리가 기를 주재하듯이 이성은 형기를 주재하며, 기는 리를 벗어날 수 없듯이 형기는 이성을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이성을 따름이 바로 인간의 마땅한 길 즉 도(道)이다. 『중용』첫 구절에 나온다. "하늘이 명하는 바를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바를 도라고 한다."

그런데 정여창은 이성이 인간의 구체적 감정과 행위 즉 형기를 떠나 구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구절은 이런 의미를 담아 적었을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리와 기가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는 실상과 또한 하나이면서 둘이 되는 뜻을 알아야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도심(道心)이 한 몸을 주재하며 인심(人心)으로 하여금 천명을 따르게 할 수 있다. 「이기설」

이성과 형기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 다시 말하여 이성과 형기의 위상이 다르지만 이성이 형기를 떠나서 구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체득하여야 도심이 한 몸에 가득차고 이때 인심은 일상의 생활에서 하늘이 명한 바의 이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형기, 도심과 인심이 내면적 통일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적었다.

리와 기를 싸잡아 하나로 보면 자기의 사사로움에 사로잡혀 점차 작용이 바로 성이라고 하는 폐단에 흐르고 리와 기를 갈라 둘로 보면 미묘한 도를 구한다고 하며 끝내 천지와 일월마저도 환상이며 허망하다고 한다. 「이기설」

리(도심)와 기(인심)를 하나로 알면 리가 기를 주재함을 모른 채 일체의 행위나 감정조차 이성으로 오해하여 마음대로 행동하고, 리와 기를 판연하게 나누어 놓고 오로지 리에 도취하면 알 수 없는 현묘한 도에 빠져 일상의 예악과 제도문물을 팽개친다는 것이다. 후자는 무위의 도를 추구하는 노장학파(老莊學派)를 지목한 것이 틀림없는데, 전자는 어떤 유파일까? 혹여 전자가 전국시대 맹자에게 '생(生)이 성이다'고 한 고자(告子)나 위아(爲我)를 내세운 『열자(列子)』 그리고 남북조 시대 세상의 어지러움을 빙자하여 개인의 안일을 추구한 죽림칠현 등 일체의 자유방종 세력의 흐름을 지적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경향을 불식하지 못하면 일상의 도학의 실천을 기대할 수 없다는 간절한 생각을 담아 적었으리라. 그러면서 인간의 도덕능력에 대하여 반추를 거듭하였다.

정여창은 인간이라면 선천적으로 이성을 따르는 마음 즉 도심(道心)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주역』에 있는 '형체가 있기 전[形而上]에 도(道)가 있고 형체가 있고 후[形而下]에 기(器)가 있다'는 공자의 어록에 주목하였다. 이렇게 풀었다.

공자가 모름지기 전[上]과 후[下]에 각각 형(形)자를 붙이고 또한 도(道)와 기(器)를 구분한 뜻을 알아야 이기(理氣)의 오묘함을 알 수 있다. 「이기설」

즉 만물은 형체를 이루기 전에 그에 마땅한 도(道)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형체를 이룬 다음에는 그에 합당한 그릇[器]을 갖춘다는 것이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선천적으로 도를 갖추고 태어났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수양과 공부를 통하여 도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선기후(理先氣後)' '이상기하(理上氣下)'에서 유추한 '도선기후(道先器後)' '도상기하(道上器下)'의 논리이면서 동시에 선천적 도덕능력에 대한 확신이며 '성선(性善)'에 대한 믿음의 소산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였다. 그러나 한동안 당혹스러운 때가 있었다.

* 실천이성을 위하여

언젠가 정호(程顥)를 읽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천하의 선과 악은 모두 천리이니 악이라고 하여도 본래 악이 아니다. 다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그렇게 된다. 『성리대전』권30 「기질지성」

11세기 도학의 지평을 열었던 정호(程顥)가 '선과 악이 모두 천리다' 한 것이다. 정호는 처음에는 왕안석의 신법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지나치게 성급하고 인재를 얻지 못하면서 공리주의로 흐르자 반대하게 되었으면서도, 말년까지 결코 신법=소인(악), 구법=군자(선)이라는 이분법적 등식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로 포옹력이 있고 정치적 감각도 뛰어났다. 당대의 대단한 도학자였던 한 살 아래 동생인 정이(程頤)는 달랐다. '가을의 서리와 강렬하게 내리쬐는 해'라고 하듯이 열정과 냉정함이 분명하였다.
정여창은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적었다.

공자 다음의 아성인 맹자가 성선(性善)이라고 하고, 천리는 진실로 선하고 악이 없어서 기(氣)에 빠지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 정호는 무엇 때문에 선악은 모두 천리라고 하는 것일까? 「선악천리론」

그러다가 문득 다음 구절에 시선을 멈췄다.

무릇 사람들은 '도를 이어감이 선이다'는 구절을 가지고 성을 언급할 따름인데, 맹자의 성선(性善)이 바로 그렇다. 『성리대전』권30 「기질지성」

'도를 이어감이 선이다(繼之者善)'이란 구절은 『주역』「계사전(繫辭傳)」에 나온다. "한 번 음이고 한 번 양이 되는 바를 도라고 하니, 도를 이어감이 선(善)이며 도를 이루는 것은 성(性)이다." 해답은 간단하였다. 즉 '도를 이어감이 선이며 도를 이루는 것이 성이므로 본성은 착하다!'

정여창은 번뜩하였다. '맹자의 성선설은 본원처만 말했고 그 아래 기질지성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주희(朱熹)의 발언이 쉽게 다가왔다. 맹자의 선성(善性)은 『중용』의 천명(天命)의 성이었다. 장재는 '천지지성(天地之性)', 주희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하였는데 정호는 '생전(生前)의 성'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다를 수 없는 본성 혹은 천성이다.

생전(生前)의 본성은 어떤 느낌이나 뜻, 생각이나 헤아림, 셈과 가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자체 순수지선일 따름이다. 마치 텅 비어 맑고 깊으며 조짐도 없는 태극이 성(誠) 자체인 것과 같다. 그러나 태극이 음양의 동정의 기미를 보이는 순간, 기운은 뭉치고 맺음과 드러나고 나타냄과 베풀고 이룸이 생긴다. 이 점을 주돈이가 요약하였다. "성(誠)은 작위가 없고, 기미(幾微)는 선악이 있다."

생후(生後)의 본성도 마찬가지다. 생(生)과 동시에 도타움과 엷음, 깨끗함과 찌꺼기, 치우침과 바름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 '형기지성(形氣之性)'으로 기질 혹은 형기이다. 따라서 본성은 순수지선이지만 기질은 선악의 갈림이 있다.

그러나 기질이 본성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가 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호는 '선과 악이 모두 천리'라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성 안에서 본래 선과 악이 상대하는 것이 아니니 기질을 잘못하여 악하게 되었다고 하여도 본성은 착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악도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여창은 반가웠다. 정호의 기질지성에서 인간의 실천, 인간의 개과천선을 향한 신뢰와 희망을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적었다.

본래 착한 리는 움직이지 않으면 착함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침내 움직이며 드러낸 후에야 그 착함을 알 수 있다. 「선악천리론」

즉, 순수지선의 본성은 드러나지 않을 따름이므로 후천적인 기질을 바르게 가져가면 얼마든지 착한 본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성에 기대지 말고 일상의 수양을 거듭하자는 뜻도 있었다. 이렇게도 말하였다. "천하의 도에는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악이 생기는 것 또한 선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에게 악행은 잠시이며 머지않아 악행을 버리고 바르게 설 수 있다는 소망을 다졌을 것이다. 계곡에 한참을 앉아 있었을까, 섬진강을 다녀왔을까? '도랑의 물이 아주 혼탁하지만 애당초 깨끗한 물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도랑물이 있게 되었겠는가'고 한 주희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렇게 풀었다.

물이 산속에 있을 때는 맑음을 모르지만 물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천리론」

마치 착한 본성을 믿는다면 이제 드러내야 한다, 하는 것 같다. 지금 비록 어긋난 사람이라도 언젠가 본래의 착함을 알 것이고, 지금 비록 세상이 혼탁하여도 본래의 맑은 모습을 찾아갈 것이니 희망을 품어도 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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