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전 장관(현 세종재단 이사장)은 이날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동 주관한 기획연속강연(4회) 후 벌어진 토론에서 오는 10월 2~4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를 평화, 번영, 통일로 꼽으며 이같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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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회담 예상 3대 의제 : 평화, 번영, 통일
"2차 정상회담의 키워드"라는 평화 의제와 관련해 임 전 장관은 4자회담에 대비해 남북간 '입을 맞추는' 일 외에도 한반도 비핵화와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에 대해 남북 정상이 합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핵화에 대해 그는 "국민들과 미국, 세계를 상대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남북이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가 논의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핵은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핵 문제 해결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핵 문제를 끝장내고 와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사적 신뢰조치와 관련해서 임 전 장관은 "평화와 경제협력을 위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와 나아가 군비감축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북방한계선(NLL), 한미군사훈련 중단 문제가 나올 수 있겠지만 정상회담에서는 해결로 가는 방향만 제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과 대책을 협의한 바 있는 임 전 장관은 두 번째 의제인 민족공동번영에 대해 경협을 확대·발전시키는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봤다.
그는 "개성공단 2, 3단계 개발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고, 원산이나 남포 같은 곳에 제2, 제3의 개성공단을 만들자는 식의 논의가 있을 것"이라며 또 "북한의 경제 개발을 촉진시키기 위해 북한에 SOC(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는 문제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SOC에 투자하려면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해야 하는데 핵 시설이 금년 내에 불능화하면 삭제가 가능하다"고 전망하고 "테러지원국에서만 벗어나면 한국이나 제3국의 기업이 국제금융기구에서 돈을 조달할 수 있다. 북한이 처음부터 돈을 직접 조달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국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의제인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연합으로 가는 협력기구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구체안을 마련할 때가 됐다는 게 임 전 장관의 판단이었다. 그는 "1차 정상회담에서 단계적으로 통일을 하는데 있어 남북이 힘을 합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합의했는데 그걸 발전시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 평화협정은 언제 될 것인가
지난 7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포기시 평화협정 체결'을 언급한 후 평화협정의 내용과 시기도 이날 강연의 쟁점이었다.
임 전 장관은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평화를 담보할 실질적인 조치들이 마련되어 실제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시기는 향후 5~10년 쯤 될 것으로 길게 봤다.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북미 적대관계의 해소다. 북한과 미국은 핵시설 해체에 관해 합의를 봤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핵무기와 핵물질에 관해서는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와 플루토늄을 신고하면, 미국이 해외로 반출할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쯤 합의가 나올 것 같다. 그 후에는 신고를 제대로 했는지 검증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평화협정을 위해서는 남북이 군비통제를 하는 과정도 있어야 하는데 협상을 통해서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4~5년 걸린다. 유럽 재래식 군비감축협상은 거의 20년을 끌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군사력이 커 꽤 만만찮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상황전개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것들이 다 되려면 적어도 5년 정도는 걸린다."
하지만 이날 토론자로 나선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다소 다른 견해를 내놨다. 고 교수는 "평화체제로 가는 데는 5년 정도 걸리겠지만, 만약 북핵 2.13합의가 연내에 이행되면 북한이 핵폐기와 평화협정 체결을 교환하자고 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런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이고 북미 관계정상화를 받아들이면 핵폐기와 관계정상화·평화협정을 교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北, 정치군사 문제에 호응할까
그러나 정상회담에서 남측이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체제 등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적극 제기한다 하더라도 북측이 호응하지 않으면 진전을 볼 수 없다.
특히 2000년 1차 정상회담 이후 북측은 NLL 문제 등 군사 문제의 일부 사안을 '근본 문제'로 제기하면서도 남측이 주장하는 '군사 문제의 포괄적 협의'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토론자인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은 "과거 남북은 남측에서 정치군사 문제를 회피하는 입장이었고 북측은 정치군사 문제에 역점을 둬왔다"며 "그러나 2000년 이후 북측은 남북국방장관 회담을 한번 만 수용하고 다른 협의체 운영에는 호응하지 않는 등 태도가 역전됐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임동원 전 장관은 "북측이 이제는 군사 문제를 논의하리라고 보고,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북측은 남측과 국제사회,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파탄된 경제를 재건해야 하는데 군사문제 해결을 병행하지 않으면 그럴 재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개성공단을 추진하던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공단 조성이 완료될 때면 군축을 해야 할 시절이 오고, 군축이 안 되면 군인들을 제대시켜서라도 공단 수요 인력 30만명을 대 주겠다'고 말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북측 고위층은 군축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군사 문제에 있어 북측이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군축 문제가 본격화되면 남측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며 "국내외의 군수업자가 반발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관계 밑거름 뿌린 1987년" 김형기 전 차관은 민주화를 이룬 1987년이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적잖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남북관계의 관점에서 본 87년'을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김 전 차관 토론의 주요 내용. "87년 민주항쟁 이전 대북정책은 안보 차원서만 다뤄졌고 통일은 명분과 구호로만 있었다. 남북은 체제 경쟁에 몰두했다. 회담을 하면 성과를 내기보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궁색하게 할지를 고민하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그러나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1조에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했고, 남북은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고 구정했다. 그런 상황이 가능하게 된 씨앗은 바로 87년에 뿌려졌다. 87년에는 독일 통일, 동구권 민주화, 냉전 해체로 이어지는 세계질서의 전환을 예고했던 해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에 내면화되고 세계적인 탈이데올로기 현상을 촉발시킨 해였다. 이때 북한에는 심각한 경제부진과 군사비 고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북한이 남조선 해방이라는 공세적인 전략을 접고 수세적인 논리로 전환시킨 시발점이 87년에 마련됐다. 남한에서는 6월 민중항쟁으로 인해 통일논의가 개방됐고 북한에 대한 정보도 개방됐다. 이러한 거대한 요구에 의해 88년 통일정책 기조가 전환됐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화의 힘이 남북 대결을 청산하고 민족공동체 의식 기반을 확대시킨 밑거름이 됐다. 뿐만 아니라 87년은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게 된 고위급회담, 총리회담을 만들어 내는 분기점이었다. 북한은 그 해 방송을 통해 남북 고위급정치군사회담 갖자고 제의했다. 무력축소 군비경쟁 중지, 대규모 군사연습 중단 같은 군사적 사안을 의제로 제기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는 당시만 해도 정치군사문제 논의를 회피하는 입장에 있어서 '쌍방이 제기하는 전반문제 포괄적 논의하자'고 역제안하는 식으로 북의 제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 후 북한이 다시 다국적 군축협상을 하자고 또 제의하니까 우리 외무부가 남북외무장관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이게 중요하다. 외무장관회담을 제의할 때 불가침 협정 체결 문제와 긴장완화, 군축 등을 협의하자고 했다. 이처럼 남측이 군사 문제를 협의 대상으로 적극 의제화하기 시작한 해가 87년이었다. 이후 북한이 88년 11월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하면서 끈이 연결됐고 결국 남북고위급회담, 총리회담이 출범했다. 이처럼 87년은 민주화 힘으로 남북관계사를 새롭게 발화시키는 분기점이 됐다." |
北의 20년 : 혁명전략에서 생존전략으로 전환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민주화운동 이후 남북관계 20년'이라는 주제에 따라 북한의 입장에서 본 지난 20년을 반추하고 분석했다. 다음은 고 교수 토론의 주요 내용. "남한이 '87년 체제'에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88년에 7.7선언을 발표한 것은 북한에도 큰 영향 줬다. 북한은 83년 아웅산 사건과 87년 KAL기 폭파 사건까지만 해도 남조선을 해방시키겠다는 혁명전략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KAL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이 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오는데 족쇄가 됐다. 그에 따라 북한도 88년을 계기로 혁명전략은 안 된다는 판단을 했고 남측의 7.7선언에 호응하면서 연방전략을 수정했다. 이어 친자본주의 혁명으로 소련과 동구가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북한은 생존전략이 필요하게 됐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로 91년 유엔 남북 동시 가입을 받아들였다. 한국전쟁 때 남한이 유엔의 구호를 받았던 것처럼, 역으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유엔을 통해 체제 안전을 담보받겠다는 생각이 아닌가 한다. 이후 나온 '느슨한 연방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도 같은 맥락이다. 핵과 미사일을 개발한 것도 생존전략의 일환이었다. 미국에 대한 생존카드이자 협상카드일 수 있었다. 그러자 1차 핵위기가 불거졌고 북한의 의도대로 미국이 양자접촉 시작했다. 핵·미사일 카드로 미국과의 양자 협상이 열리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매진했다. 이후 94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체결했고, 우여곡절을 겪다가 99년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고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서명하면서 대전환을 했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려운 과정을 겪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핵실험 카드를 통해 부시 행정부의 신(新)포용정책을 이끌어 냈다. 그건 다른 의미로 보면 북한이 카드를 거의 다 내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임동원 전 장관은 북한의 전략이 수정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1년 11월 조선노동당 정치국 회의였다고 소개했다. "김일성 주석은 91년 중국을 방문한 후 정치국 회의에서 4가지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북한도 중국처럼 1당 독재를 유지하면서도 개혁개방을 추진하고(나진·선봉을 개발로 실현) △국제사회 자본과 기술 도입하기 위해 남북관계를 개선하며(남북 기본합의서) △핵 개발 의혹을 해소하고(남북비핵화공동선언)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한다는 것(김용순 비서 방미) 등이다. 북한은 그 전략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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