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상념을 통해 역사책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17세기 유럽의 풍물과 관심분야들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장치'라는 것이 나온다. '언어의 망원경'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자동으로 은유적 문장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자동 시작기계(詩作機械)라고 할 수 있는 이 장치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술 창작의 자동화에 대한 관심에 어떤 보편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학자가 개발한 자동 서체 개발 시스템
디자인 창작에서도 자동화의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는 10여전 전부터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자동 서체 개발시스템이 그런 예다. 그림에서 보는 것은 미국의 수학자 누스(Donald E. Knuth)가 개발한 메타 폰트 시스템으로 디자인 된 최초의 서체 샘플이다.
누스는 복잡한 수식 때문에 논문 작성에 애먹는 수학자를 위해 테크(Tex)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에 멈추지 않고 폰트 디자인을 자동화하는 시스템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수학자가 폰트 디자인 시스템을 개발한다고 하면 의아해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폰트 디자인에서 어려운 부분의 하나는 폰트의 곡선을 규정하는 원칙을 찾아내는 것인데 수학적 함수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한 수학자도 한때 비슷한 연구를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맥이 끊긴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에 그가 만든 서체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게다가 과학이 예술적 창작의 세계에 접근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보태져 그의 연구는 미국 디자인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누스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독일의 캘리그래퍼(서예가)와 공동 작업을 하는 것으로 접근 방법을 바꾸었고 1년 만에 내놓은 결과물이 위에서 보는 서체다. 이것이 약 8~9년 전의 상황이다. 아마 지금은 더 발전되어 있을 것이다.
메타폰트 시스템이 글자 디자인 과정의 일부를 자동화한 것이라면 취리히 대학 미디어 연구소의 뒬스트(Martin J. Dürst)는 26개의 알파벳 가운데 두세 개의 글자만 디자인 하면 이 글자들의 특징을 인식해 나머지 글자들을 알아서 자동으로 생산해내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몇 년 안에 그럴 듯한 자동폰트 디자인 시스템이 세상에 선을 보일 것이다.
건축 및 제품 디자인도 자동으로
밀라노의 폴리테크닉 대학의 건축과 교수 소두(Celestino Soddu)는 '바실리카'와 '아제니아'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바실리카는 자동 건축 디자인 시스템이고 아제니아는 그보다 작은 제품디자인을 위한 시스템인데 모두 프랙탈 개념에 기초해 개발되었다.
직접 손으로 디자인한 것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디자이너의 초기 발상과정을 대폭 단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아래 그림은 로마의 상업센터를 디자인하기 위해 바실리카가 생성해낸 네 개의 디자인이다.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이미지 때문에 네 개의 전체적 인상은 비슷하다. 하지만 네 디자인은 각기 독특하며 서로 반복된 디자인 모티브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아래 그림은 아제니아로 디자인한 가정용 램프들이다. 램프의 높이 등 몇 가지 제약조건과 초기 형태를 입력하면 시스템은 연속해서 형태를 복제하고 분열하는 진화과정을 거쳐 각 단계마다 시각적 복잡도를 적절히 조정한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는다. 이 결과물들은 아직은 조야(粗野)할 수밖에 없다. 디자이너는 이 가운데 자신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것을 선택해 마무리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 시스템 덕에 디자이너는 초기 발상과정을 대폭 단축할 수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디자인 방향도 검토할 수 있어 기회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사진을 그림으로 자동 변환해주는 NPR 기술
NPR(Non Photo-realistic Rendering) 분야도 매우 흥미롭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국내에서도 나름의 연구가 진행 중인 분야이기도 하다. 이 분야의 국내 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상업적 유용성이 매우 크다. 언젠가는 자동 아트 로봇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술이다.
NPR은 쉽게 말해 비사실적으로 사물을 재현해내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사진을 시스템에 입력하고 원하는 스타일로 다시 재현해 내는 시스템이라 생각하면 된다. NPR의 한 분야인 회화적 렌더링 기술을 예로 들면 자신의 사진을 입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화가의 스타일로 재현해내는 것이다. 원하는 스타일은 고흐가 될 수도 있고 세잔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일반적인 회화적 스타일만을 재현해내고 있지만 이 정도의 기술만으로도 SIGRAPH 같은 세계적인 컴퓨터 그래픽 컨퍼런스에서 주목하고 있다. 필자도 참여하고 있는 회화적 렌더링 기술 개발팀의 1차 목표는 인상파 화가인 고흐, 세잔, 모네 등의 화풍을 재현해내는 것이다.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그림은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회화적 렌더링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유명한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인데 위의 것이 국내 연구진의 결과물이고 아래는 포토-샵의 드라이 브러시(dry brush)라는 필터를 사용한 것이다. 얼핏 보면 NPR기술과 포토-샵 프로그램의 필터의 효과는 유사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포토-샵의 필터가 입력된 이미지 전체를 균질하게 변형시킨다면 NPR은 대상에 따라 국소적으로 다른 변형이 일어난다. 예컨대 NPR 이미지는 얼굴의 굴곡에 따라 붓자국의 크기와 방향이 다르다. 반면 아래의 포토-샵 필터 이미지는 붓터치의 생생함도 약할 뿐더러 붓자국의 크기 변화도 없고 방향도 명암의 방향만 따르고 있어 다양성이 부족하다.
이런 국소적 변화가 가능한 것은 NPR 기술에 어느 정도의 대상인식 기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도 그러한 사례인데 연꽃잎의 방향에 따라 붓 터치의 방향과 크기 등이 다르다. 이 그림에서는 색상에서도 회화적 변화가 있다. 이는 시스템이 실제 사진에는 존재하지 않는 반사광 등을 추론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NPR그림에서 보는 색상의 변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원화는 화풍이 무엇이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화한다.
키워드만 입력하면 디자인 시안들을 척척
NPR 기술 외에도 사이버 모델들을 이용해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 공간에서 패션쇼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사이버 모델들의 옷을 체형에 맞게 갈아입히는 기술들이 국내에서 개발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한 자동 화장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2년 전 개발이 완료돼 모 화장품 회사의 쇼룸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좀더 진보된 기술개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스타일리즘과 관련된 영역에서만 자동화 기술이 개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 기획과 관련된 분야에서도 이미 여러 기술이 개발돼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일본 문화대학 부설 디자인 연구소에서는 개발하려는 디자인의 이미지에 대한 몇 가지 핵심어를 입력하면 최적의 디자인 샘플들을 즉시 자동으로 제시한다. 이 샘플들을 보면 새로운 디자인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다수의 디자이너들이 명확한 이미지를 공유하게 된다. 이로 인한 생산성 증대효과는 엄청나다. 디자인 개발 시간도 단축되고 폐기되는 디자인 시안들이 줄어드는 대신 더 많은 의도에 맞는 디자인 시안들을 제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기술들의 공통점은 과학자, 공학자, 디자이너들이 모두 참여한 통합 학제적 연구를 통해 개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누스의 메타폰트는 수학자와 서예가가 만났고 아제니아와 바실리카는 개발자가 건축 디자이너다. NPR 기술은 컴퓨터 공학자, 디자이너, 통계학자, 미술평론가가 참여하고 있다.
이런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시스템을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은 공학자나 과학자들이지만 시스템에 대한 기본 아이디어, 개발의 방향, 기술의 검증 등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의 창작경험이 연구와 개발의 핵심요소가 되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자동화와 낮은 수준의 자동화
유명한 디지털 미디어학자 레프 마노비치는 자동화를 '높은 수준의 자동화'와 '낮은 수준의 자동화'로 구분한다. 낮은 수준의 자동화는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문서 편집기, 그래픽 프로그램, 엑셀과 같은 스프레드 쉬트 프로그램 등을 말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우리가 하는 작업 가운데 판단력이 필요 없는 단순한 일들을 자동화해준다.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의 직무 분석을 토대로 개발된 시스템으로 그것 이외의 다른 가정이나 이론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반면 '높은 수준의 자동화'는 인공지능이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아직은 일부지만 인지적 판단이 필요한 작업도 자동화 한다. 그러다 보니 도리어 기존의 프로그램보다 기능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인공지능이란 분야가 워낙 거대한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낮은 단계의 자동화는 개발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장기적인 맥락이 없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선가 벽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앞서 소개한 자동 서체 디자인 시스템, 자동 건축 및 제품 디자인 시스템, NPR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인공지능이라는 맥락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과정에 창작경험이 있는 디자이너들의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낮은 단계의 자동화 시스템에서는 디자이너가 참여한다고 해도 직무분석을 돕는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로 충분했다. 그러나 더 인간 친화적인 높은 단계의 자동화 기술의 개발에서는 디자이너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자이너들도 과학과 공학 등 주변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동화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일이다. 이런 기술이 개발되면 디자이너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런 날이 당장 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걱정하는 시간에 그 기술개발에서 역할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 성역처럼 생각하는 창작의 영역에 과학과 공학이 다가오는 것을 불쾌해 할 필요도 없다. 피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과학을 통해 우리들은 예술적 창조력을 더 깊고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인류는 더 세련된 문화적 지평을 열어왔다.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화가들이 그렇지 않았던가. 인류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주저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진보해 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