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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마음으로 씨를 뿌렸으니..."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16장 개혁세력의 최후 <76ㆍ최종회>

기묘년 11월 25일.
조광조는 서울을 떠난 지 7일 만에 유배지 능성에 도착했다. 의금부 도사와 나장들의 묵인 하에 귀양길에서 지인을 만나면 짧은 송별연도 가질 수 있었다. 용인에서는 개혁의 동지이자 고향사람 이자를, 전주에서는 전주부윤 이사균(李思鈞)을, 광주에서는 순천부사 박상을 만났던 것이다.

조광조는 이자에게는 선산에 안장한 부모 산소의 벌초를 부탁했고, 이사균과 마주쳐서는 뜻밖에도 참담해 하는 그와 눈물을 흘리며 작별했다. 이사균은 조광조보다 나이가 11살이나 많았고 일찍이 연산주 무오년에 문과에 급제한 선비였다. 그는 부제학으로 임명받아 서울로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능성으로 가는 조광조와 마주쳤던 것이다.

처음에 조광조는 이사균을 피하려 했다. 그가 전주부윤으로 좌천됐던 것은 조광조와 가까운 대간들이 그를 개혁에 협조하지 않는 구신(舊臣)으로 탄핵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랬으므로 조광조는 그를 보는 순간 내심 섬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저 자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사균은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조광조에게 다가와 간곡하게 말했다.

"자네가 <중용>도 아직 숙독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어찌 요순의 사업을 이룩해 보려는 것인가. <중용>에 말하지 않았던가. '어리석으면서 제 뜻대로 하기 좋아하고, 천하면서 제 마음대로 하기 좋아하여 옛 도(道)로 돌리려 하면 화가 몸에 미치지 않은 자가 없다' 하였으니, 자네가 면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자네는 아직 나이가 젊으니 독서를 더 하고 몸을 스스로 아껴 주시게."

조광조는 참으로 위로하는 이사균의 속마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자 이사균이 먼저 약속을 했다.

"조금만 기다리시게. 홍문관에 들어가게 됐으니 전하께 극력 간하여 자네의 억울함을 변호할 것이네."

박상은 순천에서 소식을 듣고 올라와 무등산 길목에서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상은 평소 조광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순천에서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담양부사로 있을 때 신비(愼妃)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초를 받은 후 남평으로 귀양을 갔다가 병자년에 석방된 것은 조광조 동지들이 구명운동을 한 덕분이었던 것이다. 박상은 포승줄에 묶이어 소달구지를 타고 오고 있는 조광조를 보더니 애통해 했다.
"이보시오 도사, 나는 순천부사 박상이오. 정암을 묶은 포승줄을 여기서 잠시 풀어줄 수 없겠소."

"해 떨어지기 전에 능성에 당도해야 하니 얘기를 빨리 끝내시오.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이니 들어주겠소."
그러나 가을걷이를 끝낸 광주지역의 항교 교생들과 농사짓는 양인들이 몰려와 조광조와 박상의 만남은 꽤나 길어졌다. 교생들과 양인들이 조광조가 탄 소달구지 앞에 엎드려 "조대헌님, 조대헌님!" 하고 다투어 귀양길을 막았던 것이다.

조광조가 능성 관아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이 막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조광조가 머물 적소는 관아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능성 현감은 의금부 도사를 맞이하여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조광조는 능성 관아의 포교를 따라 적소에 안치되었다. 적소는 헐거운 움막이 아니라 관아에서 임시로 양인에게 빌린 마당이 딸린 초가 한 채였다.

조광조의 유배생활은 다른 죄인들과 달리 자유로운 상태에서 시작됐다. 어찌 보면 예우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현감은 관의 어린 노비 하나를 보내주었고, 포졸들은 감시를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능성 안이라면 외출도 허락되었다.

조광조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적소에서 가까운, 병든 정여해가 누워 있는 해망산의 학당이었다. 정여해는 스승 김굉필과 한 문인이었으므로 아전의 안내를 받아 병문안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전들은 조광조에게 '조대헌님'이라 부르며 굽신거렸다.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능성의 먹거리를 가져와 적소에 놓고 가기도 했다. 능성 사람들이 겨울에 먹는 호박이나 고구마줄기 말랭이 무침과 쫄깃쫄깃한 가죽나무순과 두릅나무순을 밑반찬거리로 보내왔던 것이다.

조광조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출입도 막지 않았으므로 서울에서 따라온 장잠(張潛)과 광주의 양산보(梁山甫)가 적소를 찾아 곁을 지켜주었다. 특히 12월 중순 들어서 관직을 삭탈당한 양팽손이 내려오니 적소의 생활이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정암, 또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서로 유도를 더 연마하여 형통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허물을 짓지 않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학포, 인정이 망가뜨려진 판국에 우리가 귀양을 와서 미처 못한 성리의 학문을 마치게 된다면 이 또한 하늘의 뜻일 것이오."

그러나 조광조는 양팽손에게 반가운 소식만 들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조정의 소식을 듣고는 우울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귀양 온 뒤 그동안 목숨을 걸고 쟁취한 개혁의 조치들이 하나 둘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정국공신의 개정이 무효화되었으며, 현량과 제도도 폐지됐고, 안당은 현량과 실시를 발의한 인물로 지목되어 파직 당했던 것이다.

12월14일에는 생원 황이옥(黃李沃)과 유생 윤세정(尹世貞)과 이래(李來)가 이미 귀양 간 조광조 등 8인을 죽여야 한다고 합동 상소를 올리면서 사림의 화가 번지고 있었다. 이는 조광조 등을 죽이고 싶어 했던 중종의 마음을 간파한 상소문이었다. 중종은 흡족한 나머지 상소를 올린 3인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치하했다. 황이옥의 변절은 조광조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그는 조광조가 의금부에 구속되자, 유생들을 선동하여 상소문을 올렸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대사헌 이항(李沆)과 대사간 이빈(李蘋)은 현량과에 급제한 조광조의 잔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결국 중종은 남곤과 심정의 자문을 받아 이미 귀양 간 8인 외에 18명을 숙청했다. 유배는 4명으로 유용근, 정응, 최산두, 정완 등이었으며 파직은 3명으로 안당, 유운, 김안구 등이었으며 고신(告身) 박탈은 11명으로 이자, 최숙생, 이희민, 이약빙, 이연경, 조광좌, 윤광령, 송호지, 송호례, 양팽손, 이충건 등이었다.

이항과 이빈도 중종의 마음을 알고 조광조 등을 처벌해야 한다고 하자, 중종은 결단을 내린 듯 우선 승지를 불러 정광필과 김전의 해임을 통고했다. 후임으로 남곤을 좌의정으로, 이유청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남곤이 부름을 받고 오자, 중종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광조 등을 율에 의해 그 죄를 명백하고 바르게 다스려야만 하겠다."

남곤은 놀라 중종의 마음을 누그려뜨려 보고자 했다.

"광조 등은 임사홍과 같은 무리는 아닙니다. 단지 백성들에게 은택(恩澤)이 미치는 임금을 바란 나머지 사람들이 이를 저지할까 두려워 자기네들과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여 자신들이 소인으로 되어가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찌 왕법(王法)에 의거해서 형을 가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하신다면 세상인심도 안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종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광조는 무죄일 수 없다. 이미 죄가 있거니와 또한 국문을 받음에 이르러 당상 이장곤의 이름과 자를 불렀으니 이것도 큰 죄이다."

결국 중종은 의금부 당상 심정과 손주를 불러 '광조는 사사하고 김정, 김식, 김구는 절해고도에 안치하며 자임, 기준, 박훈, 박세희는 서북방 먼 곳에 유배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 정암유배지

조광조의 가슴을 아프게 한 소식은 또 있었다. 한천이 남곤을 죽이기 위해 남곤의 집에 복면을 하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붙잡히어 개죽음을 당했다는 얘기였다. 남곤과 심정은 김식의 아들 덕순이 기와 힘이 뛰어났으므로 몹시 두려워하여 밤이면 집을 옮겨가며 잠을 자곤 하였는데,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남곤의 집으로 뛰어들었던 한천은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잡혀 죽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조광조에게 내려진 사사의 명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사실은 임금의 명을 알리어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 서둘러 내려왔지만 끝내 발설치 못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시시각각 조여 오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다음과 같은 시를 양팽손에게 지어주기도 했다.

누가 이 몸을 활 맞은 새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나 스스로 말 잃은 늙은이 마음같이 웃고만 있다네
원숭이가 짖고 학들이 울어대지만 나는 돌아가지 못하리니
엎어진 독안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으리.
誰憐身似傷弓鳥
自笑心同失馬翁
猿鶴正嗔吾不返
豈知難出伏盆中


양팽손은 조광조가 말하는 원숭이와 학이 군자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광조는 조정의 군자들이 절규해도 자신은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절망하고 있었다. 소인배들에 의해 누명과 형벌을 받아 자신의 처지가 '엎어진 독'과 같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광조는 양팽손과 지난날을 회상할 때는 위안을 받았다.

"학포가 경연에서 전하가 '공문(孔門)의 학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 하고 묻자, '인(仁)일 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던 것이 잊히지 않소."

"전하가 '무엇을 인이라 하오' 하고 묻자, '사람의 마음입니다'라고 아뢨던 말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소.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지요. 학포가 그때 동지들과 협력하여 바른 길로 나가니 조정이 엄숙하고 깨끗해졌지요."

"정암, 나라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다만 하늘의 도가 있었기에 인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지요."

"무슨 말이오."

양팽손은 남곤이 자신에게 찾아와 회유하려다 실패한 얘기를 했다.

"하루는 변복한 남곤이 달빛을 이용하여 대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소. '오늘날 조정에서 정치하기가 막중하고 큰데, 내 혼자서 맡기가 어려워서 조정의 사람들을 둘러봐도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어 부득이 공을 찾아온 것이오. 먼 데서 벼슬하러 온 사람은 힘껏 끌어당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높고 좋은 관직을 얻기가 어려운 법이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고 말하였지요."

"학포, 어서 말해보시오."

"일언지하에 '어째서 조광조를 찾아가지 않고 나를 찾아오시었소. 높고 좋은 관직은 본시 내 분수 밖인데 어찌 구구하게 남에게 빌붙어 그것을 구한단 말이오' 하고 거절했지요."

조광조는 양팽손과 얘기를 하는 동안은 절망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학포는 지초(芝草) 같은 사람이오. 애기하는 동안 향기가 나니까 말이오. 학포의 기상은 비 갠 가을 하늘 같고."
그러나 이러한 조광조의 위안도 며칠을 가지 못했다. 기묘년 12월 20일,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른 아침이었다. 말을 탄 의금부 도사 유엄(柳渰)이 서울을 떠난 지 5일 만에 사약단지를 들고 능성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조광조는 새벽에 일어나 주역 점을 쳐보았는지 눈보라를 헤치고 아침 일찍 찾아온 양팽손을 보더니 불길한 얘기를 했다.
"학포, 동지들이 이같은 화를 당하는 것이 시운(時運)이니 한탄한들 어찌하겠소. 나야 죽음이 있을 뿐이오."

양팽손도 눈이 한 자나 쌓인 눈길을 걸어온 것은 간밤의 악몽 때문이었다. 조광조가 머물고 있는 적소를 향해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들어 가고 있었는데, 양팽손이 소리치며 뒤쫓아 갔지만 그는 벌써 조광조가 자고 있는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내려 쌓이고 있는 적소는 적막했다. 어린 노비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마당에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고, 제자들도 아직 문안인사를 오기 전이었다. 양팽손은 조광조의 짚신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조광조의 얼굴은 편안했다. 간밤을 편히 잔 얼굴이었다.

"정령 간밤에 안녕하시었소."

"학포, 죽어도 산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 들어 보았소."

"죽음이 아무렇지 않습니까."

"그렇소. 두렵지 않소."

정말로 조광조는 안심입명의 자리를 찾은 듯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몽에 시달렸던 양팽손은 마음이 뒤숭숭했다. 꿈에 보았던 사내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양팽손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눈발이 성글어지자 말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장들이 포위하듯 적소 안으로 들이쳤고, 조광조가 마당으로 점잖게 내려서자 의금부 도사 유엄이 엄하게 소리쳤다.

"왕명이오. 죄인 조광조는 왕명을 받으시오."

유엄이 전하는 왕명은 짧았다. 조광조에게 임금이 사사를 명한다는 것뿐이었다. 조광조는 왕명이 너무 짧아 두렵다기보다는 허망했다. 목숨을 끊으라는 임금의 명이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광조는 어리둥절했다.
"도사, 단지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에 대한 글은 없는 것이오."

"그렇소."

"나는 일찍이 대부의 반열에 있었소. 헌데 어찌 종이쪽지 하나를 도사에게 보내어 나를 죽게 한단 말이오. 만약 도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내 목숨도 임금의 것일진대 죽음이 두려워하는 말이 아니오."
유엄은 조광조의 항의에 대답을 못했다. 조광조는 왕명이 진정 임금의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소인배들의 농간에 의한 것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엄이 대답을 않고 나장들에게 턱짓으로 사사를 준비하라고 명하자, 조광조가 다시 물었다.

"누가 정승이 되었소."

"남곤이 좌의정, 이유청이 우의정이오."

"심정은 어찌 됐소."

"의금부 당상이오."

조광조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유엄이 타고 온 말이 진저리를 쳤다. 눈발이 다시 거세졌다. 유엄이 조급해져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광조가 조급해 하는 유엄을 안심시켰다.

"도사,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됐구려."

그제야 유엄이 사사의 명을 받겠다는 조광조를 향해 양미간을 펴고 눈썹을 내렸다. 조광조가 다시 물었다.

"조정에서 우리를 어찌 보고 있소."

"왕망을 말하는 이가 있소."

"나를 간신 왕망이라 하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려. 허허허."

조광조는 눈발이 가득한 허공을 응시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눈발이 순식간에 조광조의 머리카락과 눈썹에 얹어지자 갑자기 나이 든 늙은이로 변했다. 그런데도 조광조의 눈빛은 형형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하였다. 왕명을 손에 쥔 유엄마저 조광조와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사사의 명이 내렸으니 오래 지체하지는 않겠소. 그렇더라도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그럴 이유가 뭐요."

"집에 당부할 일이 있어 그렇소. 편지를 몇 장 남긴 뒤 죽겠으니 허락해 주시오."

"좋소."

유엄은 콧잔등에 내려쌓이는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갈 길이 바쁜데 짜증이 난다는 몸짓이었다. 나장들도 투덜거리며 사약이 놓인 소반을 들어 처마 밑으로 옮겼다. 사약에도 눈이 내려쌓여 녹으니 주사의 독이 약해질지도 몰랐다.

방으로 들어간 조광조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린 노비에게 먹을 갈게 했다. 붓을 들어 먼저 부인 한산 이씨에게 편지를 썼다. 아내를 닮아서 더욱 사랑스러운 5살이 된 첫째아들 정(定)과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2살의 둘째아들 용(容)이 보고 싶다는 내용과 그동안 아내를 고생시킨 것에 대한 사과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썼다. 편지 말미에는 두 아들이 성장하여 <소학>을 힘써 공부하며 언행은 반드시 성인을 본받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다음에는 집안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숙부 조원기와 자신을 의지하던 형제들에게도 집안 일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동지들에게도 한 문장씩이라도 이별의 글을 쓰고 싶었으나 문을 거세게 흔드는 바람이 붓을 놓게 했다. 그러나 방문 틈으로 보이는 밖의 풍경은 시간을 더 허락하고 있는 듯했다. 도사는 처마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긴 창을 든 나장들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조광조는 다시 붓을 들었다. 중종에 대한 변치 않는 자신의 마음을 시로 써내려갔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했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
밝은 해가 아랫세상 내려다보니
거짓없는 이내 정성 환하게 비추리.
愛君如愛夫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이윽고 유엄이 왕명을 다시 전하는 소리가 났다.

"죄인 조광조는 어서 나와 사약을 받으시오."

그러자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던 장잠이 스승 조광조의 손을 붙잡았다.

"놓거라. 내 손을 놓거라. 도사를 원망하지 말라. 내 목숨은 임금의 것이니라."

장잠이 손을 놓자 조광조가 담담하게 유언을 했다.

"관을 얇은 것으로 하라. 무겁고 두꺼운 것을 쓰지 말라. 먼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고생을 하느니라."

조광조는 어린 노비를 불러 어깨를 토닥여주더니 이내 양팽손의 두 손을 힘 있게 잡고 말했다.

"양공, 나 먼저 가오. 각자 우리 임금에게 할 도리를 다하다가 언젠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것도 기쁜 일이 아니겠소."

"정암, 잘 가시오."

양팽손이 참지 못하고 통곡을 하자 조광조가 오히려 위로를 했다.

"학포, 우리들의 개혁은 좌초됐을 뿐 실패한 것은 아니오. 순수한 마음으로 씨를 뿌렸으니 뒷사람들이 반드시 열매를 거둘 것이오."

그동안 적소를 빌려준 주인에게도 조광조는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신세가 많았다. 너의 집에 편히 묵었으므로 훗날 반드시 보답하려 했는데 보답은커녕 오히려 네게 흉한 변을 보게 하고, 너희 집을 곧 더럽히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무겁구나."

조광조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사약이 놓인 소반이 다시 마당 가운데 놓여졌다. 조광조는 단숨에 독이 든 사약을 마셨다. 그러나 뜻밖에 절명이 늦어졌다. 입가에 피를 흘릴 뿐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갈 길이 바쁜 도사의 눈치를 보던 나장 서너 명이 조광조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그러자 조광조가 나장들을 꾸짖었다.

"전하께서 나의 목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신 것인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 정암조선생서원유지추모비

조광조의 호통에 나장들이 주춤했다. 잠시 후, 조광조의 입에서 한 사발의 붉은 피가 꾸룩꾸룩 흘렀다. 꼿꼿했던 몸이 옆으로 쓰러지고 나서야 피가 멈추었다. 숨이 곧 끊어졌다. 조광조의 시신을 확인한 도사와 나장들이 미련 없이 물러섰다. 그제야 능성의 향교 교생들과 양인들이 적소 안으로 몰려와 통곡을 했다.

능성 현감의 방관 하에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방으로 엎고 들어와 손수 염을 했다. 그리고는 시신이 훼손될까 두려워 능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쌍봉사 부근 증조산 깊숙한 골짜기에 암장을 했다.

증조산 산자락에 눈이 녹은 봄이 돼서야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용인으로 귀장하는 데 주선했고, 그해 여름에는 조광조의 시신을 겨울 동안 암장했던 증조산 골짜기에 영당을 지어 자신이 그린 조광조의 초상화를 걸게 하고 문인과 친지를 시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대대로 능성에서 살아온 양팽손의 처지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조선의 도학과 더불어 조광조가 영원히 살게 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이었다.

도학을 숭상하여(崇道學)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人心)
성인과 현자를 본받아(法聖賢)
지극한 정치를 일으키도록 하세(興至治)


양팽손이 조광조의 초상화 밑에 적어놓은 위와 같은 네 구절의 글도 사실은 살아생전의 조광조가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실천했던 신념이자, 유도(儒道)가 타락한 인간 세상에 하늘의 도를 펼치고자 했던 신진 사류(士類)들의 피 끓는 맹세나 다름없었다.<끝>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 화순군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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