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이 차갑게 목덜미를 파고드는 초겨울 아침이었다. 거리에는 허연 서리가 깔려 있고, 까마귀들이 비명 같은 소리를 떨어뜨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남곤은 끝내 병을 핑계 대며 입궐하지 않았다. 자신을 쏘아보던 정광필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곤혹스러워서였다.
그래도 중종은 국문을 미루지 않고 서둘렀다. 남곤 대신 의금부사(義禁府事) 김전을 우두머리 삼아 이장곤, 홍숙에게 조광조, 김식, 김구 등이 붕당을 지은 혐의와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이 거기에 부화뇌동했다는 사실을 국문하도록 지시했다.
간밤에 붙들려온 조광조 등은 기가 막혔다. 하룻밤 사이에 천하가 바뀌어 있으니 어리둥절했다. 세상이 반대로 변해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대간들에게 탄핵을 받아 전전긍긍하던 김전이 추관(推官)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은 중종의 마음이 변하였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하늘처럼 믿고 의지했던 임금이 변절한 것인지, 아니면 소인배들이 모사하여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헷갈리기만 했다. 조광조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을 찾아 냉정해지려 했지만 머릿속은 둔기로 얻어맞은 듯 멍멍했다. 간간히 어지럼증이 들었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폭군 연산군도 임사홍 같은 심복을 끝내 내친 적이 없었는데, 성군이 되려고 성리(性理)의 학문을 연마하던 중종이 자신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추국은 다행히 고문 없이 진행되었다. 추관들도 하룻밤 사이에 뒤바뀌어진 세상이 이상한지 조광조 등을 국문한다기보다는 그들이 공술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사실관계를 받아 적는 데 급급했다. 붕당을 지은 혐의로 기소된 조광조는 자신의 입장을 짧게 진술했다.
"신(臣)은 나이 38세의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믿은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망녕되이 국가의 병통이 이원(利源; 利慾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것을 막아 국가의 명맥을 영원히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조금도 다른 뜻은 없습니다."
김정도 붕당의 혐의를 적극 부인했다.
"신의 나이 34세로, 나이가 젊어 고지식하고 성질이 또 편벽되고 급한데도, 과람하게 육경(六卿)에 올라 항상 송구하며 국은(國恩)을 갚으려고 생각하여 논사(論思)할 때 한결같이 바른 일을 하려고 힘써 밤낮으로 걱정했을 뿐, 붕당을 지어 과격한 풍습을 이루고 국론을 전도케 하고 조정의 정사를 날로 그르친 일은 없습니다."
김식도 마찬가지로 부인했다.
"지나치게 임금의 은혜를 입어 대관(臺官)에 뽑혔고, 급제한 뒤에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대사성까지 되어 털끝만큼이라도 더 잘 보필하려고 했을 뿐,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지도 아니하였고, 전혀 가까운 인물을 내고들인 일이 없으며, 더구나 붕당을 지었다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추국은 아무런 고문이 없었다. 추국하는 추관들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신문을 받는 사람들이 큰소리를 지르고 통곡하곤 했다. 그래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의금부의 관리인 경력이나 도사들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게다가 곤장을 들고 서 있는 나장 중에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김구도 붕당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의 나이 32세로, 성질이 본래 옹졸하고 우둔하여, 다만 옛날 사람들이 사우(師友) 간에 도왔던 일을 사모하여 동지들과 같이 놀았을 뿐입니다. 사람을 내고 들이는 것은 밑에 있는 사람의 일이 아니거니와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싫어하여 한갓 공론(公論)만 알아 서로 어느 것은 옳다 어느 것은 그르다 했을 뿐, 붕당을 지어 궤격한 짓을 했다는 것은 신의 실정이 아닙니다."
조광조 등에게 부화뇌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이들도 큰소리로 변명했다. 윤자임이 먼저 말했다.
"신의 나이 32세로, 성질이 본래 어리석고 다만 옛 사람의 글을 읽어 옳고 그른 것을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국가의 일을 의논하고 생각하는 데에 더러 조광조, 김식, 김구, 김정과 뜻이 서로 같아서 같이 교유한 것뿐입니다. 그 의논이 궤격하여 사사로이 서로 부화뇌동했다고 하나 실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박세희 말도 윤자임과 대동소이했다.
"신의 나이 29세로, 비단 연소할 뿐 성품이 어리석고 행검(行檢)도 없고 하여, 옛 사람의 글을 읽고 시대에 맞는 것을 참작하여 일에 임하여 정성을 다하는 것이 직분인가 합니다. 조광조는 일찍부터 알았고 김정, 김식, 김구와는 항시 같이 놀아서 의논하는 것을 좋아했을 뿐 궤격한 줄은 몰랐으며, 상종을 했을 뿐이요, 부화뇌동한 적은 없습니다."
기준도 임금을 도와 지치의 정치를 이루려 했을 뿐 붕당에 부화뇌동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신이 젊어서부터 옛 사람의 글을 읽어 자못 향방(向方)을 알아서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의를 다할 것이라 하여,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함께 옛 도리를 강구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 세상을 지극히 다스려지게 하려고 작은 정성을 다하였고, 또 남이 착한 것은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부화뇌동하였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박훈도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말했다.
"신의 나이 36세로, 성질이 본래 미욱하고 졸렬해서, 옛 사람의 글을 읽고 뜻을 세우고 행신하는 데 옛 사람을 본받아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목표로 하여 밤낮으로 생각해 왔고, 또 사우(師友)가 없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어려우므로 조광조와 사귀었을 뿐입니다."
오랜 추국이 끝나자, 조광조 등에게 술을 마시는 것도 허락이 되었다. 이장곤과 홍숙이 그들의 처지를 측은하게 여기어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한 조광조가 추국하는 당상관인 이장곤에게 '희강(희강(希剛; 이장곤의 자)이! 희강이!' 하고 절규하고 대든 것도 묵인됐던 것이다.
입궐한 정광필은 조광조 등에게 정상을 참작하여 선처할 것을 호소했고, 추관 김전은 죄인들에게 고문할 것을 청하면서 반대의 의견을 냈다.
"죄인 광조에게 고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조광조 등은 간당(奸黨) 죄에 해당되므로 마땅히 참(斬)하고, 집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 합니다."
중종은 즉시 김전에게 명했다.
"광조, 정, 식, 구 네 사람을 사사(賜死)하고, 그 나머지는 귀양을 보내라."
마침 날이 저물고 있었으므로 중종은 정전을 나갔고, 추관 김전도 의정부로 돌아갔다. 그 사이 조광조는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상소문을 써나갔다.
<신 등은 모두 망녕되고 어리석어, 성스러운 주인(聖主)을 만나 경악(經幄; 경연)에 출입하면서 가까이 모셨는데, 다만 우리 임금의 밝으심만 믿고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뭇 사람의 시기를 받아가면서도 단지 임금이 요순과 같이 착하실 것을 바랐을 뿐, 어찌 사사로이 몸을 위해 도모하는 일을 했겠습니까. 하늘과 해가 비추어 보거니와 다른 사심은 없었습니다. 신들의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하오나, 다만 사류(士類)의 화가 한번 발단된다면 장차 뒷날의 국가 명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님 계신 데가 막혀 있어 심회를 상달할 길 없고, 말 한 마디 못하고 영원히 하직함은 실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한번 친히 물어주시면 만 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찢은 옷소매는 눈물로 얼룩졌다. 김식과 김정, 김구의 눈물까지 떨어져 상소문의 글씨가 지워지기도 했다. 끝내 김구는 통곡을 했다. 날이 어둑어둑할 무렵까지도 김구는 눈물을 흘렸다.
조광조가 상소문을 쓰고 있는 사이.
성균관 유생들이 거리에 나온 양인들과 합세하여 대궐로 달려왔다. 광화문에 이르는 동안 불어난 사람들의 수효는 천여 명이나 되었다. 유생 신명인(申命仁)이 앞장 서 소리쳤다.
"향도들도 모두 소를 올려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우리 유생들이 여기 모이기만 했지 소를 초안(草案)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옳소, 상소문의 초를 잡으시오!'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 힘을 얻은 신명인이 붓을 잡고 바람같이 빠르게 소를 써내려갔다. 소가 작성되자, 유생들이 광화문의 문지기를 밀치고 대궐로 진입했다. 격하게 밀고 당기면서 생원 박광우(朴光祐)는 얼굴을 다쳐 피가 흘렀다. 다른 유생들도 유건이 벗겨지거나 머리가 풀어지고 옷이 찢겨졌다. 유생들은 하나같이 대궐 뜰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자연 그 소리는 대궐 안까지 들렸다. 중종이 의아해 했다.
"곡성(哭聲)이 어디서 들려오는가."
승정원 승지들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유생들이 광조의 일로 대궐까지 들어와 곡을 하고 있습니다."
"심히 놀랍도다. 유생들이 대궐 마당으로 함부로 들어왔으니 그 죄가 있을 것이다. 궐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와서 호곡한다는 것은 천고에 없는 일이다. 저 자들 중에서 5, 6인을 적발하여 잡아 가두어 징계하라."
왕명을 받은 금군(禁軍)이 즉시 앞에서 선동하고 있는 유생들의 대표를 연행했다. 그러자 신명인이 또 소리쳤다.
"옛날에 한나라 양진(楊震)이 잡혔을 때 태학생 3천명이 궐문을 지키고 호곡한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하시는 일은 진실로 천고에 없는 일입니다!"
상소문의 공동대표인 생원 이약수(李若水)와 윤언직(尹彦直), 박세호(朴世豪), 김수성(金遂性)이 금군에게 잡히어가자, 유생들이 다투어 옥에 갇히려 하였으나 옥이 비좁아 짚 새끼로 목을 엮인 유생들이 종루 안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보고받은 중종은 본때를 보이기라도 하듯 조광조와 김정에게 사사의 명을 내리려고 작정했다. 신진들과 구원(舊怨)이 깊은 김전은 중종보다 한술 더 떠 조광조와 김정, 김식과 김구 등 4명에게 사사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중종은 김식과 김구를 살려주면서 승지 김근사(金謹思)를 불러 받아 적게 했다.
<광조와 정은 사사하고, 식과 구는 곤장 1백 번을 때리고 먼 곳에 안치(安置)하고, 자임, 준, 세희, 훈은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김근사가 겁이 나 머뭇거리자, 사관 채세영이 중종에게 아뢰었다.
"대신에게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중종은 채세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빈청에 대기하고 있는 정광필을 불러들였다. 날이 어두워 촛불을 켜고 있던 정광필은 김근사에게 중종의 명을 전해 듣고는 놀라 급히 들어가 아뢨다.
"소신이 이 직에 있은 지 오래이오나,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길 줄이야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단지 어리석음으로써 사리를 알지 못하고 이같이 되었사오니, 중죄라면 신 등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
정광필은 말을 못하고 잠시 눈물만 떨어뜨렸다. 잠시 후 그는 흐르는 눈물이 멈추고 사형을 감해 주기를 청하여 말했다.
"전하, 광조와 정도 사사를 면케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사심이 없었던 것을 살펴 벌을 주시옵소서."
중종은 입직승지 성운을 불러 일렀다.
<광조 등 4명은 매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게 하고, 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귀양 보내라.>
조광조 등 4명에게 곤장을 쳐 안치한다는 지시에 정광필이 안당과 함께 다시 아뢨다.
"전하, 이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과 땅과 같은 은덕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이 모두 병약하여 만일 매를 맞고 멀리 가려면 중도에서 죽을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게 되고, 사형을 감해주신 것이 허사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중종은 정광필과 안당이 일곱 번이나 아뢰었으나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삼경이 지나자, 죄인들에게 다음날 의금부에 모이라는 명을 내리고는 임시석방을 했다. 죄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귀양 준비를 하라는 마지막 배려였다. 조광조는 의금부를 나왔으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하옥되었다가 임시로 풀려난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서 원망스럽게 둥근 달을 쳐다보기만 했다.
양팽손과 한천이 다가와 통곡하고 있었지만 조광조는 귀머거리가 된 듯 무심히 서 있기만 했다. 달빛에 드러난 양팽손의 얼굴은 크게 상처가 나 있었다. 분개하여 유생들과 함께 대궐에 들면서 넘어져 다쳤던 것이다.
"학포, 몸을 잘 간수하시오."
"나보다 정암 선배님이 건강하셔야 합니다. 우리들의 약속을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학포의 고향 능성을 이런 몸으로 가게 됐구려. 어느 땐가 능성으로 내려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렇게 내 뜻이 이루어졌구려."
"나도 반드시 능성으로 뒤따라 갈 것입니다."
이윽고 한천이 조광조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선생님, 세상이 싫습니다. 허나 헛되게 죽지는 않겠습니다. 소인배들을 죽이고 그 업보를 달게 받겠습니다."
조광조가 대답을 하지 않고 달을 스쳐가는 기러기 떼를 보면서 눈물을 보였다. 한천에게 희미한 미소를 건넸다. 한천은 저고리 속에 비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독약주머니도 차고 있었다.
다음날.
된서리가 내린 의금부 마당에는 죄인이 된 조광조의 동지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형을 받은 사람들이 다 모이자 승지 성운이 중종의 전교(傳敎)를 읽었다.
<너희들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서 본래는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한 정치를 보려 했다. 너희들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지극히 그릇되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으니 부득이 죄를 주는 것이다. 허나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으며 죄주기를 청한 대신들도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겠느냐. 너희들의 일이 여기에 이른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해 내가 그 기미를 방지하지 못한 까닭이다. 만일 법대로 죄를 준다면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들이 사사로움 없이 나라를 위했으므로 죽음을 면하게 하고 가볍게 죄를 주는 것이니 너희들도 잘 알고 가야 할 것이다.>
성운이 전교를 전하는 동안 분위기는 극도로 침통했다. 모두 각오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조광조만이 짧게 한 마디 했다.
"신이 비록 이번에 가오나, 임금의 마음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신 등이 한 일이 과연 궤격하였습니다."
이는 실제로 조광조가 아직도 중종을 믿고 있음이었다. 귀양길에 나서 과천을 지나는 동안 한 유생이 뒤쫓아 와 남곤, 홍경주, 심정 등이 모사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라고 알려주었는데도 조광조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임금의 마음이야 어찌 이 같은 데 이르렀으랴."
이때까지도 조광조는 소인배들의 모사로 자신이 귀양을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 자신을 이미 배반한 중종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에 대한 인간 조광조의 믿음이자, 임금을 잘못 만난 비극이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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