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에서의 싸움은 반칙을 쓰지 않는 한 어지간해선 트집 잡을 게 못된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보낼 수는 없다. 협상장 밖에서 문제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진다. 2002년 대선 전날 정몽준 의원의 단일화 파기 선언은 노무현 후보가 유세 도중 추미애·정동영 의원을 차세대 주자로 추어올리며 정 의원의 자존심을 건드린 게 발단이었다. 그만큼 단일화란 언제든 어떤 곳에서든 사소한 꼬투리로도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다. 합의문에 도장 찍고 난 뒤에도 상대의 감정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기폭장치를 누르는 것이다.
문재인 캠프 소속 '익명의 핵심 관계자'가 안철수 양보론을 언론에 흘렸다고 한다. 문재인 캠프는 그런 말 한 사람 없다고 펄쩍 뛴다. 대놓고 한 말이 아닐지라도 협상 전부터 안철수 양보론이 피어올랐던 건 사실.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며 나선 상대에게 그냥 물러나란 말은 부적절했다.
양보론의 근거는 여론조사다. 문재인 지지율이 상승세에 있으니, 안철수 후보로선 어차피 지는 게임을 무리하게 고집하기보다 정치적으로 안전한 양보의 길을 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얼핏 논리적인 듯 보이지만 주관적인 낙관이다. 안철수 후보로선 지지자들 다리에 힘을 빼려는 선동으로도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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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지지율이 '갑자기' 오른 건 지표에 드러난다. 여러 여론조사기관이 그렇게 발표했다. 그런데 왜 올랐는지 설명이 부실하다. "단일화를 주도하며 맏형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정도다. 각별히 주목을 끄는 문 후보의 행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면 따져봐야 한다. 문재인 지지율은 정말 대세를 장악할 정도로 안정궤도에 오른 건가? 안철수 후보가 양보하면 문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대번에 제압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단일화 국면에서 지지율이 한번 출렁일 것은 예상됐던 일이다. 3자구도가 양자구도로 좁아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병목현상이다. 안목 있는 사람들은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빠질 거라고 전망했다. 박근혜의 새누리당, 문재인의 민주당을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대중 속을 헤집던 안 후보의 보폭이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경쟁에 결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이슈의 복판을 차지해온 박근혜-안철수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문 후보에겐 기회가 된다. 그러나 일시적인 국면이 만들어준 관심도일 뿐 문재인을 바라보는 민심이 달라졌다고 볼 근거는 없다.
지지율로 윽박지르는 '양보론'은 그래서 위험하다. 여론조사 수치를 끌어올려 일단 안철수부터 꺾으면 능사라는 근시안이 저간에 깔려있다. 한때 회자되던 '안철수 불쏘시개론'의 변용이다. 설령 문재인 지지율이 안철수 지지율을 압도해 양보를 이끌어낸다 하더라도 어디로 흩어질지 모를 안철수 지지자들의 실망감은 변수로 남는다. 문재인이 안철수를 대체해 기득권 정치를 갈아엎을 것 같은 표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한.
이 시점에서 문 후보는 두 가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첫째는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는 25% 안팎에는 민주당을 기득권의 한 축으로 보는 반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혐오층은 물론 심지어 여권성향의 지지층도 있다. 이들을 '문재인의 아젠다'로, '문재인의 리더십'으로 사로잡지 못하면 그의 지지율은 확장성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안철수보다 문재인이 쉽다"는 새누리당의 관전평을 비아냥으로 흘려들을 게 아니다. "(단일화) 과정보다 결과에만 연연하고, 이것을 경쟁으로 생각한다면 그 결과로 이기는 후보는 대선승리 할 수 없다"고 한 안철수 후보의 말도 핵심이다.
두 번째는 '문재인 세력'의 획기적 교체다. '3철(양정철, 전해철, 이호철)'을 잠시 뒤로 물렸다고, 이해찬 대표가 퇴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을 넘어선 문재인 시대의 비전은 그와 함께 권력을 다룰 세력으로 드러난다. 단일화 경쟁에서 승리하고 안철수 후보를 공동정부의 틀에 묶어두기만 하면 술술 풀릴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다. 문 후보가 스스로 탈바꿈하려는 의지를 보여야만 '단일화 기술자'들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리더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법이다.
협상 중단 사태가 하루를 넘겼다. 사태 해결의 열쇠는 문재인 후보에게 있다. 안 후보에게 전화 걸어 어린애 달래듯 "화 풀라"고 어르며 '맏형 코스프레' 한번 해서 해결될 일이면 애당초 이런 사단이 나지도 않았다. 문재인의 정치력과 리더십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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