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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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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지상현의 Homo designans·7] 좋은 디자인이 나오려면...

20여 년 전 필자가 모 기업의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 부서 직원들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장난으로 군인처럼 경례를 하며 '모방'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런 자조적인 구호를 외친 데는 까닭이 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결재를 받기 위한 디자인 시안(試案)을 손으로 엉성하게 만들었다. 그릴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사진이나 글자는 잘라 풀로 붙이는 식이었다. 이렇게 만든 시안을 결재권자에게 보여주며 제작을 하겠다고 설득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결재권자들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엉성한 시안을 보고 실제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고, 결과를 상상할 수가 없으니 결재를 주저하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결재권자는 막연하게 "몇 개 더 만들어 보지"하며 결재를 미룬다.
  
  이런 이유로 보름이면 끝날 일을 몇 달씩 질질 끌고 다니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업무가 누적되고 직원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게 된다. 해결 방법은 하나였다. 외국의 디자인을 모방한 시안과 외국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함께 들고 가 "이런 식으로 만들면 이런 디자인이 나오게 된다"고 결재권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제서야 결재권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잘 해봐"하며 결재를 해주곤 했다. 아직 저작권이 별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라 이런 방식으로 큰 문제없이 업무를 추진할 수가 있었다. '모방'이라는 자조적 구호가 생겨난 사연이다.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 덕에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재료의 질감 등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 탓에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디자인은 한 기업의 거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는 작업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국내 디자인계의 모방문제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디자인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디자인에 대한 잘못된 신념 하나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디자인은 디자이너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디자인 행위 자체는 디자이너가 한다. 그러나 디자인 행위 이전에 미래의 시장과 소비자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파악돼야 하고 마켓 리더십을 확보하기 쉬운 맥락이 결정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이 정확하게 디자이너에게 전달돼 디자인에 반영돼야 한다. 디자인 행위가 이뤄진 다음에는 여러 개의 디자인 안(案) 가운데 가장 적절한 것을 낙점하는 최종 결재권자의 결정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디자인이 시장에 나온다. 진정한 디자인 프로세스는 이 모든 과정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성공한 디자인은 나오기 어렵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한 기업의 거의 모든 역량이 동원돼야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이너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다른 역량이 부족하면 좋은 디자인은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앞서 말한 결재용 시안 이야기가 바로 그러한 사례다. 결재권자 스스로 디자인적 상상력을 키우거나 중요도에 따라 디자인 결정권을 디자이너에게 일임했어야 했다.
  
  우리 기업의 경영자들은 말로는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경향이 있다. 또 디자인 공부는 경영자뿐만 아니라 일반 직원들도 필요하다. 디자인은 현대 경영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니던 기업의 연수프로그램은 '사장학(社長學)'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직종, 직급을 불문하고 참가해야 했고 생산에서부터 재무, 인사까지 전 업무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과 기법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자인관련 프로그램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대다수 기업의 연수프로그램에 디자인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기업 내 모두가 디자인에 대한 지식ㆍ정보 공유해야
  
  경영자나 일반직원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 디자인 부서와 관련부서, 예컨대 마케팅, 영업, 기획, 생산부서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야 영업현장에서 획득한 소비자와 경쟁사에 대한 정보, 마케팅 전략, 경영자의 철학 등을 디자이너를 포함한 전 직원이 공유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디자인이란 색채와 형태 등을 통한 기업과 소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리고 기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색채와 형태의 언어로 옮기는 일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다만 이때 기업 내부에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이 일은 조금은 더 쉬워질 것이다.
  
  세계적 유통기업 P&G에서는 최고 경영자부터 말단 직원까지 기업 내의 모든 업무에 관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P&G만의 화폐단위까지 만들어 전 세계의 일일 판매현황을 이 단위로 환산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정도다. P&G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디자인에 관한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내용까지 최고 경영자와 일선 디자이너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마케팅 전략이 디자인에 정확하게 반영된다. 일류 기업이 그냥 일류가 된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 아무 기업이나 쉽게 나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연수프로그램 등을 통해 디자인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전 직원이 갖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커뮤니케이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용 대비 효과가 매우 크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공통의 지식기반이 마련되면 디자인 부서와의 업무협조 방식도 세련되게 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업무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업에서 디자인 부서는 섬처럼 고립된 경우가 흔히 있다. 비 디자인 부서에서는 "예술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힘들다"고 불평하고 디자인 부서에서는 "디자인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한다. 그러나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며 디자인의 특수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다른 부서에서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업무 특징인 경우가 많다. 앞서 말했듯 주된 원인은 공통의 지식기반이 부족해 생기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에 있는 것이다.
  
  외형적인 디자인 진흥책이나 지원, 기업의 집중적인 투자가 있어도 이런 속사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디자인 발전은 이뤄지기 어렵다. 같은 논리를 기업이 아닌 전 사회로 확대해보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한국의 디자인 환경을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
  
  언젠가 이 시리즈에서 다룬 적이 있는 간판 등 거리의 환경 문제도 이런 까닭에 당장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그리 크지는 않다. 아무리 관(官)이 나선다고 해도 말이다. 디자인이란 한 사회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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