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지는 밤이었다. 찬바람이 불자 귀뚜라미들이 더욱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날 밤도 중종은 대간들의 면담 요청을 물리치고 홍빈의 침소로 찾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숲이 가까워서 그런가, 홍빈의 방에서 듣는 귀뚜라미소리가 더 시끄럽구나."
"마마, 된서리가 내리고 입동(立冬)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소리들이옵니다."
"입동이라고 했느냐."
"지금은 저리 시끄러우나 곧 자취를 감출 것이옵니다."
홍빈의 말에 중종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머리가 어지럽다 보니 저 구슬픈 소리조차 듣기가 싫구나.'
홍빈은 중종이 무엇 때문에 지쳐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 홍빈은 문득 며칠 전에 찾아온 홍경주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 홍경주가 전하를 뵙거든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趙氏)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아뢰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사헌이 된 조광조가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조광조가 탄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上典; 주인) 오셨다'고 하는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게 될 임금은 왕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것이 바로 홍경주가 노리는 점이었다.
"마마,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걱정이 되옵니다."
"저 하찮은 미물의 소리조차 듣기 싫다니 요즘 들어 내 심신이 많이 지쳐 있어 그럴 것이야."
"조 대헌이 있어 그런 것이옵니까."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다고 하기에 벼슬을 높이 주었건만 구신(舊臣)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싸움질만 하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구나."
홍빈은 중종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마마, 오늘은 반드시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거라."
"궁중에 도는 소문이옵니다.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망측한 소문이 돌아 소첩은 하루하루가 두렵사옵니다."
중종은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뜨끔했다. 심정과 내통하고 있는 박빈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홍빈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니, 만약 그렇다면 왕권에 도전하는 중대한 일인 것이었다. 홍빈은 홍경주가 사전에 시킨 대로 다시 말했다.
"조 대헌이 공신을 삭제하자고 청한 것은 나라의 중신들을 쳐내어 오직 제 마음대로 하고자 그랬을 것이옵니다."
"더 말해 보거라."
"천과(薦科; 현량과)를 실시한 것은 세를 확장하여 그들과 다른 의견을 내는 구신(舊臣)을 내쫓고 입을 열지 못하게 함일 것이옵니다."
"광조가 무엇을 믿고 그런다고 보느냐."
"온 나라의 인심이 조 대헌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착각에 그럴 것이옵니다."
중종은 머리도 무겁고 하여 홍빈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마음이 불편하여 자세를 고쳐 앉지 않을 수 없었다. 홍경주가 시킨 대로 하는 말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중종은 소반에 놓인 술병의 술을 따라 마시며 물었다.
"광조 등을 어찌해야 하겠느냐."
홍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이 역시 홍경주가 가르쳐준 말이었다.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나중에는 어찌할 수가 없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화가 마마께 미칠 수 있다는 뜻이옵니다."
"은혜를 입은 광조가 어찌 그런 패악을 저지르겠는가. 홍빈은 말을 삼가하라."
중종이 뜻밖에 안색을 바꾸며 고개를 젓자, 또박또박 당차게 말하던 홍빈은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조 대헌이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우리 상전이라고 엎드린다 하옵니다."
"사람들이 광조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홍빈은 정신을 가다듬고 애절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마마, 대궐에서는 마마를 임금으로 받드는 체하다가도 밖에 나가서는 자신이 왕 노릇을 하고 다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옵니다. 어찌 큰일이 아니고, 소첩이 두렵지 않사옵니까."
"광조가 소인배라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마마, 소첩을 믿어주소서. 마마의 옥체를 보전하소서."
그래도 중종이 결단을 내리는 말을 하지 않자, 홍빈은 소매 속에서 나뭇잎 하나를 꺼내 중종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마마께 이것만은 끔직하여 보여드리지 않으려 했사옵니다. 하오나 마마께서 소첩을 믿지 못한 까닭으로 할 수 없이 꺼냈사옵니다."
나뭇잎에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벌레 먹은 자국이 나 있었다. 주초위왕은 곧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중종은 흥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홍빈을 노려보더니 턱을 심하게 떨며 물었다.
"나뭇잎에 부참서(符讖書)와 같은 글씨가 써 있다니, 실로 네가 두려워할 일이구나. 이 나뭇잎을 어디서 구했느냐."
"소첩이 대궐 정원에서 발견하고 땄사옵니다. 너무 놀라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발설치 않았사옵니다."
"잘 했느니라. 훗날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니라."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중종은 흥분을 가라앉힌 뒤 홍빈을 끌어안더니 말했다.
"네가 지금 도모하라고 한 뜻을 이제야 알겠다. 광조를 곧 처단하여 재앙을 차단할 것이니라."
홍빈은 중종이 자신의 침소를 나간 뒤, 즉시 심복 궁녀를 홍경주에게 보냈다. 그러나 홍빈의 연락을 받은 홍경주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쯧쯧.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아니하였으니 무엇으로 전하의 마음을 중신들에게 전할꼬."
홍경주는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홍빈에게 편지를 썼다. 홍경주와 심정, 남곤 등이 중종의 심복이 되어 조광조의 무리를 처단할 테니 임금의 밀지(密旨)를 받아내도록 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며칠 후.
홍경주 손에 쥐어진 밀지는 심정에게 건네졌다. 심정이 그 밀지를 가지고 구신들을 포섭하기로 돼 약속돼 있었던 것이다. 밀지는 언문으로 쓰여 있었다.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을 삭제하자고 한 것은 강상(綱常; 三綱과 五常, 즉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중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먼저 공이 없는 자를 삭제한 뒤에 겨우 20여 명의 이름을 남겨놓고 나서 연산을 페한 죄를 성토하게 되면 경 등은 어육(魚肉; 상대편에 의해 요리되는 운명)이 되고, 그 다음에는 화가 나에게 미칠 것이다. 주초(走肖)의 무리가 저지른 간사함이 왕망(王莽; 한나라 역적)이나 동탁(董卓; 한나라 역적) 같아 온 나라의 인심을 얻어 백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송 태조 때처럼 장군에게 황포(黃袍; 곤룡포)를 몸에 입히는 변이 있게 되면 비록 조광조가 사양하고자 하나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하고자 청한 것도 처음 생각에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인 줄 알았더니, 지금 생각해보니 반드시 저들의 우군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이들을 잘라 없애려 하나 경의 사위 김명윤(金明胤)이 그 속에 있으니 한스럽다.
내 심복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 정광필은 왕실에 마음을 둔 자이나, 이장곤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이제 소인배에게 붙었으니 믿을 수가 없다. 심정은 근래 비록 논박을 입었으나 재간이 있으니 가히 신임할 만하다. 내가 이들을 제거하려는 뜻을 딴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남곤과 심정에게 묻는 것이 어떠한가. 유용근(柳庸謹)과 한충과 김세희(金世熹)는 모두 무에가 있다고 자부하니 두려워할 만하다. 조정에서 이 무리들을 제거한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근심이 없겠다.
지난번 경연에서 기준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들한테서 나오는 터이니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나는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조광조는 말이 공손하고 온순하여 옳은 사람같이 보이나 수 년 사이에 벼슬을 뛰어서 높이 썼으니 내가 마침내 주초의 꾀에 떨어진 것이다. 명백하게 이들을 죄주고 싶으나 대간과 홍문관과 육조와 유생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면 내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요즘에는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하여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옛날에는 유용근이 거만하게 나를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
남곤은 의정부 대신을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곤이 만날 사람은 영의정 정광필이었다. 우의정 안당은 조광조와 가까우므로 포섭할 필요가 없었다. 남곤은 이른 새벽에 정광필 집을 찾아갔다. 미천한 복장으로 변복을 했다. 초립을 쓰고 떨어진 베옷을 입고 찢어진 짚신을 신은 채 정광필 집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말했다.
"급히 안에 들어가서 손이 왔다고 일러라."
문지기는 손이 남곤과 비슷하여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사라졌다. 정광필에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이 문밖에 와 있는데 남 대감님과 비슷하옵니다. 하오나 의관이 초라하고 찢어진 짚신을 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한 사람 같기도 하옵니다."
정광필은 예감이 이상하여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손님을 맞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과연 정광필의 예감대로 초립을 한 손님은 남곤이었다.
"공이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사안이 화급하여 변복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정광필의 사랑방에 앉자마자 남곤은 자신이 온 이유를 말했다.
"조광조 등이 작당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조정을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서 도모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무궁할 것입니다."
"사림을 모해하자는 말씀인가요."
"이미 전하의 밀지가 내렸습니다. 제가 정공을 먼저 찾은 까닭은 누구보다 인망이 높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래도 정광필이 선뜻 동조하지 않자, 남곤은 은근히 협박조로 말했다.
"임금께서 오늘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입니다. 공께서는 전하의 뜻에 순종하시어 남김없이 조광조의 무리들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라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남 대감, 고작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 변복하고 나는 찾은 것이오."
"정공, 잘 생각하시어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가 많은 것이니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정광필은 남곤을 점잖게 꾸짖었다.
"공이 대상(大相)으로서 천한 복장을 하고 저자를 지나쳐왔으니 내 어찌 크게 놀라지 않겠소. 더구나 나는 사림을 모해할 마음이 없소. 내 어찌 차마 공이 하는 일에 동조하겠소."
"전하의 밀지가 내렸다는데도 고집을 부리실 작정입니까."
남곤은 옷소매를 떨치며 일어서 정광필의 집을 나가버렸다. 남곤은 정광필의 집밖에서 크게 화를 내며 침을 뱉었다. 입궐하여 정식으로 조광조를 탄핵하는 일이 틀어져 버린 탓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이 반대하고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면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온 모사가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경주와 남곤, 심정은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결행하기로 했다. 밤을 넘기면 모사의 계획이 정광필의 귀로 들어갔으므로 탄로 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홍경주는 내통하고 있던 내관을 통하여 중종에게 밀서를 올렸다.
<승지들이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옵니다. 사안이 절박하니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을 열어 주시면 밤에 들어가 직소(直訴)하겠사옵니다.>
밤에 입궐하려면 수문장에게 사유를 말하고 승정원의 허락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중종에게 신무문을 열어 달라고 한 것은 승정원 소속의 승지들을 속이기 위해서였는데, 경복궁의 정문을 비롯하여 다른 문들의 열쇠는 승정원에 있지만 신무문의 열쇠는 사약방(司鑰房)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약방의 사약은 왕명의 전달이나 왕이 사용하는 문구류 등을 공급하는 액정서 소속의 정6품의 벼슬아치였다. 그날 밤 신무문의 열쇠는 사약인 구수복(具壽福)이 가지고 있었다. 남곤 등은 밤이 되자, 신무문으로 달려가 수위장에게 문을 열라고 말했다.
"전하의 명으로 급히 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잠시 기다리시오."
그러나 수위장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문밖의 사정을 수위장에게 보고받은 구수복이 열쇠를 건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중신들이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북문을 이용하다니 이상한 일이다."
홍경주는 애가 타 큰소리를 질렀다.
"남양군 홍경주다. 왕명으로 가는 것이니 문을 열어라."
구수복이 수위장을 앞세워 나와 물었다.
"북문으로 오다니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표신이 있소이까."
"왕명이라 하지 않았는가. 어서 문을 여시오."
구수복은 왕명이라는 말에 수위장에게 열쇠를 주긴 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왕명을 받은 바 없고, 중신들이 신무문으로 들어 입궐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었다. 중종도 이들이 신무문으로 들어왔다는 내관의 보고를 받고는 다시 궁 밖으로 나가 연추문(延秋門; 경복궁의 서문)으로 들어오게 명했다.
연추문 열쇠는 왕명을 받은 환관이 승정원으로 내려가서 가져올 수 있었다. 마침 당직승지 윤자임이 간의대(簡儀臺; 천문기상대)에 천문을 관측하러 가 있었기에 열쇠를 저항 없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연추문 밖에는 왕명을 받은 대신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공조판서 김전, 병조판서 이장곤, 호조판서 고형산, 병조참지 성운(成雲) 등이 연추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이들은 곧바로 남곤을 따라 들어가 비현합의 문에 이르렀다. 이때가 밤 2고(二鼓) 무렵이었다.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 챈 입직승지 윤자임(尹自任), 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珽), 검열 이구(李構) 등이 달려왔다. 모두가 조광조의 동지들이었다. 윤자임 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홍경주 등이 도깨비불처럼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었고, 근정전 서쪽 뜰에는 군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었다. 윤자임이 소리쳐 물었다.
"정원(政院; 승정원)에 알리지도 않고 들어오다니 무슨 일이오."
그러나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평소 입직승지들과 가깝게 지내던 이장곤도 좌불안석이 되어 앉았다 섰다를 반복할 뿐 감히 말하지 못했다.
"이 대감, 말씀을 해보시오."
심정이 이장곤을 대신하여 말했다.
"표신(標信)으로 불렀기 때문에 들어왔소."
"정원에서 모르는 표신이 어디 있단 말이오."
표신이란 화급한 사유가 발생했을 때 승정원에서 발급하는 통행허가증 같은 것인데, 입직승지도 모르게 표신이 발급되었다니 윤자임 등은 기가 막혔다. 입직승지와 대신들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 내관 신순강(申順剛)이 성운을 불러 말했다.
"성운을 승지로 명하니 속히 입대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윤자임이 칼을 찬 채 들어가려는 성운을 막았다.
"정원에 미리 알리지 않고 어떻게 내관의 말만 듣고 들어가려 하시오."
안정도 나서서 혼자 들어가려는 성운을 제지했다. 안정이 성운의 허리띠를 붙잡고 말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사관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어찌 감히 혼자 들어가려 하오. 잠깐 지체하시오."
성운이 안정의 손을 뿌리치자 내관이 문지기에게 호통을 쳤다.
"왜 잡인을 금하지 못하느냐."
안정이 문지기들 손에 끌려나오자, 심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듣건대 임금께서 노하신 듯하니,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잠시 후 의기양양하게 나온 성운이 소매 속에서 쪽지를 꺼내어 이장곤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어필(御筆)이오. 이 사람들을 즉시 금부에 가두시오."
쪽지에 적힌 사람들은 승정원에서 당직을 하던 승지 윤자임과 공서린, 주서 안정, 검열 이구 그리고 홍문관에서 숙직을 하던 응교 기준, 부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왕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종이 편전에 나오자 홍경주가 준비해 간 서계(書啓)를 들고 말했다.
"신 정광필, 홍경주, 김전, 남곤, 이장곤, 고형산, 홍숙, 심정, 방유녕, 유희인, 김근사, 성운 등이 보니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지어 자기들에게 아부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세력을 만들어 서로 어울리고 중요한 자리에 도사리고 앉아 임금을 속이고 사심을 부려 기탄함이 없고, 후진들을 꾀어 과격한 습관을 질러 젊은이로 어른을 누르고 천한 이로 귀한 이를 누르게 하여 국세를 기울어지게 하고 조정의 일을 날로 그릇되게 하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는 분통스러워하고 탄식하고 있으나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곁눈질하며 다니고 발을 포개고 서 있습니다. 사세가 이러하니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유사(有司)에게 붙여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으소서."
홍경주의 제의를 받은 중종은 곧바로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부제학 김구, 대사성 김식,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을 체포 구금토록 명했다.
그래도 홍경주는 마음이 놓이지 않은지 중종을 더욱 노하게 부추기고 난 뒤 말했다.
"일이 급하니 국문할 것도 없이 금위군을 통솔하는 선전관을 보내 조광조의 무리들을 잡아들여 때려죽이소서."
홍경주의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이장곤이었다. 이장곤은 바로 중종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전하, 임금은 도적과 모의하지 않사옵니다. 또한 국가 대사를 숨긴 채 행하지 않사옵니다. 대신들과 상의하여 죄를 주더라도 늦지 않사옵니다."
이장곤은 다시 홍경주가 중종 앞으로 나가 말하려고 하자,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공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이오."
그러자 중종은 이장곤의 말을 받아들여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정광필을 입궐하라고 명을 내렸다. 여전히 근정전 주위는 삼엄했다. 군사들이 부동자세로 호위하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무기들을 내고(內庫)에서 모두 꺼내와 사열해 놓고 있었다.
정광필이 입궐한 것은 삼경 무렵이었다. 그때 중종은 특명을 내리어 남곤을 이조판서로, 김근사와 성운을 승지로, 심사순(沈思順)을 주서로 삼았다. 중종은 심사순이 입시하기 전이므로 검열 채세영(蔡世英)을 시켜 조광조 등에게 죄주는 교지를 쓰라고 명하였으나 채세영이 붓을 잡고 극진히 간하였다.
"전하, 이 사람들의 죄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사옵니다. 헛말을 꾸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죽일 만한 죄가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성운이 채세영의 붓을 빼앗으려고 했고, 이에 채세영은 성운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역사를 쓰는 붓이오. 아무나 잡을 수 있는 붓이 아니오."
채세영의 한 마디에 자리가 숙연해졌다. 중종은 속전속결로 교지를 내리려고 했으나 잠시 멈추었다. 더구나 삼경 무렵 뒤늦게 입궐한 정광필이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전하, 젊은 선비들이 시대를 오판하여 헛되이 옛 일을 끌어다 지금에 시행하여 한 것뿐입니다.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어 삼정승과 함께 죄를 의논하게 하소서."
난감해진 중종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정광필이 어의(御衣)를 붙들고 눈물로 간하였다.
"전하,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어 삼정승과 함께 죄를 논하게 하소서."
중종이 마지못해 안당을 불러들이라고 승지에게 명했다. 그러자 남곤과 심정, 홍경주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졌다. 삼정승이 조광조 등을 논하게 된다면 그들의 죄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정광필을 원망스럽게 보자 정광필이 그들을 돌아보며 꾸짖었다.
"공들은 임금을 보필하면서 어찌 유자광 같은 일을 하려는 것이오."
정광필은 안당의 입궐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눈물을 흘리며 간했다.
"이 사람들을 어찌 다 죄를 주려고 하십니까. 승지들은 본래 본의가 아니라 다만 바른 의논에 따르기를 좋아한 것뿐입니다. 이자는 훗날 국가에서 크게 쓸 사람이니 단지 파직만 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 같고, 또 조광조 등의 경우에도 털끝만큼이라도 무슨 사심이 있었겠습니까. 한갓 옛 사람의 글을 보고서 지극한 정치를 기약하여 펼치는 동안 간혹 과격한 일이 있었을 것이나 심하게 치죄해서는 아니 됩니다. 바야흐로 지금 거룩한 때에 불행히 선비를 죽였다가는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정광필의 간언에 누그러진 듯했던 중종은 다시 서두르고 있었다. 체포되어 공석이 된 대사헌에 유운(柳雲)을, 대사간에 윤희인(尹希仁)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정광필의 간언에 홍문관 대제학만은 교체하지 않았으나 청류 사림이 일망타진된 조정은 텅 빈 듯 적막해져버렸다.
안당도 오경에 입궐하여 힘써 간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남곤이 중종의 전지(傳旨)를 받아쓰고 있었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 4인이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요직을 차지, 후진들을 유인하여 과격하게 비난함이 버릇을 이루도록 하였으며. 국론과 조정을 날로 그릇되게 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의 처열함을 두려워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한 일 및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이 이에 화부(和附)해서 궤격한 논의 등을 한 일을 추고(推考)하라.>
이는 피의자를 문초하여 죄상을 밝혀내라는 중종의 명이었다. 정광필과 안당은 기가 막혔지만 이제 더 이상 중종에게 매달릴 방법은 없었다. 정광필은 말없이 물러나와 빈청에 이르러 남곤과 마주쳤으나 그를 쏘아볼 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곤은 정광필의 눈을 피해 빈청을 나가더니 퇴궐해버렸다. 중종이 남곤을 불러 정사를 보도록 지시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병을 핑계대고 입궐하지 않았다. 권력이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화를 꾸며놓고 교묘하게 뒤로 빠지는 남곤의 간계는 모사를 계획한 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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