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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면접 보고 바로 다음 주 앵커로 발탁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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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금요일 면접 보고 바로 다음 주 앵커로 발탁됐죠"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7/24] 남미 최초의 한인 여성앵커 황진이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요즘 전 세계에서 우리 재외동포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데요 고국을 떠나 먼 타향에서 이방인이란 설움을 딛고 남미 최초의 동양인 앵커가 된 한인 여성이 잠시 고국을 찾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아르헨티나 여성앵커 황진이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무엇보다 황진이씨는 언어와 편견의 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면서 한국 여성이란 사실이 단점이 아닌 경쟁력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황진이씨를 초대해.. 남미에서 동양인 앵커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과 글로벌 경쟁시대 여성의 역할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남미 최초의 한인 여성앵커 황진이씨입니다. 황진이씨는 서울 출생으로 8살 때인 1986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 1999년 아르헨티나 국립방송대학을 졸업했고 2000년 아르헨티나 민영방송 '텔레페TV'에 입사해 국제뉴스국 팀장을 비롯해 뉴스 앵커로 일했습니다. 지난해 국립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이후 방송일을 잠시 접고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형 로펌에서 기업법 관련 소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아르헨티나의 교양 잡지 'RSVP'의 국제뉴스 에디터와 CNN 스패인어방송에서 아시아문제 분석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황진이 :안녕하십니까.. 너무 인트로덕션이 좋습니다.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영광스럽습니다.

박인규 : 우선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하고요. 한국에 얼마만에 오신 거죠?

황진이 :21년 만에, 21년 전에 이민을 갔고요, 5년 만에 온 겁니다.

박인규 : 5년 만에 오니까 좀 달라졌나요?

황진이 : 엄청 달라진 것 같아요.

박인규 : 뭐가 제일 눈에 띄던가요?

황진이 : 외국 사람도 많고 IT같은 것도 엄청나게 발전됐구요, 하여튼 모든 면으로 한국 도시라든지 빌딩 같은 것도 보면 훨씬 더 빨리빨리 바뀌는 것 같아요.

박인규 : 외국인이 많아졌다. 그런 부분이 또 있겠네요. 세계화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 분들은 황진이씨 이름을 한 번 들으면 안 잊어버릴 것 같아요. 요즘 또 우리나라에서도 황진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와서 화제인데, 본명이십니까?

황진이 : 예. 그렇습니다.

박인규 :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건가요?

황진이 : 예. 제 여권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박인규 : 황진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요?

▲ ⓒ프레시안

황진이 :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저희 아버지가 황희정승 21대손이세요. 그런 면은 좀 있긴 한데요 네가 황진이처럼 되어라.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박인규 : 황진이도 다재다능했다는데, 앵커도 하시고 변호사도 하시고 그런 면에선 비슷한 것 같습니다.

황진이 : 참 진이거든요. 그래서 하여튼 진실하게 살아라. 참되게 살아라. 그런 면으로 지으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신 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라는 대회에 참가하시기 위해서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대횝니까?

황진이 : 영어로 하면 KOWIN 이라구요, Korean Women's International Network. 그러니까 전 세계에 있는 한국여성분들이 모이는 거거든요.

박인규 : 말하자면 전 세계에 있는 여성리더들의 모임이다.

황진이 : 예. 이번에 제가 나이가 아마 제일 적었을 거예요. 적은 분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엄청나게 훌륭하신 분들, 독일에서나 러시아에서나 중국에서나 아주 한국 홍보를 많이 하신 분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분 개인 비즈니스로 엄청나게 하시고, 훌륭하신 분들, 크신 분들 많이 만났어요.

박인규 : 27개국 380명이 오셨다던데, 어떤 일들... 나름대로 한국 여성들이 해외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그런 얘기를 하신 건가요?

황진이 : 떻게 해야 한국 이미지를 그 나라에서 더 좋게 할 수 있냐. 해외에서는 한 130명이 오셨고요, 다른 분들은 한국에서 참여하셨어요.

박인규 : 혹시 만나 보신 여성 리더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신가요?

황진이 : 어떤 분이 독일에서 오셨는데 한 40년 전에 가셨대요. 그분이 간호사로 그때는 가족 없이 혼자 가셨고, 거기서부터 아무 것도 모르시는데, 일하시고 현지인 사회에서 결혼도 하시고 거기서 한국학교를 만드셨대요. 그래서 한국학교가 독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유럽 나라에도 있는데 매년마다 각 유럽에 있는 한국학교 모임이 있대요. 그런 것을 하시고

박인규 : 유럽 내 한인학교 네트워크를 조직하신 분이군요. 앞으로 황진이씨도 아르헨티나 가시면 그런 것도 하실 수 있겠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중 한 분으로 오시게 된 건데, 아무래도 한국분들은 관심있는 게... 한국사람들이 외국 나가면 전문직이라고 의사나 변호사를 많이 하시는데 앵커를 하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일찍 하셨어요. 22살. 방송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황진이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앵커가 되겠다는 것은 진짜 꿈이었죠. 이민자로서 말도 못하는데, 그 사회의 룰도 모르고 그것은 무리였죠. 그렇지만 제가 맏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들이 이민생활을 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것도 보고, 언어 때문에 많이 당하시는 것도 보고, 하여튼 사회의 법을 모르셔서 좀 어려우신 것도 보고. 그래서 제가 개인적인 도전감인가요? 그게 세졌나봐요. 딱 이민자의 첫 적은 언어인데, 내가 그 적에게 당하지 않겠다. 그래서 하여튼 말을 잘 배워야겠다. 그냥 배우는 게 아니라 프로로 배워야겠다. 하여튼 아나운서 스쿨이 있거든요. 거기를 도전해 봤어요. 참 웃긴 게, 경쟁률이 센 데거든요. 한 2500명 중에서 60명을 뽑는 데에요

박인규 : 아나운서스쿨이라는 게 우리말로 국립방송대학 말씀하시는 건가요?

▲ ⓒ프레시안

황진이 :
예. 그런 스타일인데, 딱 아나운서만 트레이닝하는 거예요 특별히. 제가 거기에 최초로 등록했고 최초로 수석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참 웃긴 게 뭐냐면, 등록하러 가니까 줄이 길죠. 다들 젊은 분들, 여성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예쁘시고 말도 훨씬 잘 하시고, 왜냐면 거기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참 기가 죽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안 되겠다. 제가 뭔가를 보여줘야겠다. 그게 뭐냐 하니까 차이에요. 제가 딱 상상을 한 거죠. 심판관들, 교수님들이 딱 볼 때 다 똑같잖아요. 예쁘시고 말도 잘 하시고 탤런트가 많은 분들 보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이 동양얼굴이 나와서 앵커가 되겠다고 하면 아무래도 관심은 기울이시지 않을까... 그 차이요. 그것을 믿고 제가 아마 딱 뛰어간 것 같아요

박인규 : 국립방송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동양인은 황진이씨 한 분밖에 없었나요

황진이 :그때 제가 입학했을 당시 한 명이었고 아직까진 없는 것 같아요. 한국사람은 제일 최초였구요.

박인규 : 그럼 이후로 한국사람이 국립방송대학에 들어간 게 전무후무한 거예요?

황진이 :아직까진 없어요.

박인규 : 그런데 저도 언론계에서 일해 봤지만 방송사 앵커라는 게 우리나라 앵커들도 보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무엇보다 경력이 대략 못해도 10년 20년 된 분들이 앵커를 맡는데, 방송사 들어가자마자 앵커를 했다구요. 그것도 동양인이기 때문에 된 건가요? 어떻게 됐습니까?

황진이 :기적적으로.. 제가 22살 때였는데요, 12월에 졸업하고 4월부터 앵커가 됐거든요.

박인규 : 1999년 12월에 졸업했고 2000년 4월에 앵커가 됐다.

황진이 :맞습니다. 저는 한국사람으로서 1.5세대로 빽도 없고 누가 알아요? 그러니까 다른 졸업생들처럼 데모에 테잎 하나 갖고, 경력.. 이력서 가지고 방송국을 다닌 거죠 다른 분들처럼.

박인규 : 우리처럼 입사시험을 보는 게 아닌가보죠 거기는?

황진이 :거의 그런 것도 있는데 별로 그렇게 없어요.

박인규 : 그냥 자기가 찾아가서 내가 한 번 여기서 일해보겠다. 그런 식으로...

황진이 : 아니면 빽이 있든지 아는 분이 있든지 그게 제일 빠른 길이지만 저는 그게 없었으니까, 하여튼 그렇게 했죠. 그런데 어떻게 기적적으로 그 테이프가 국장님한테 딱 가게 됐어요. 그게 참 어려운 거죠.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다른 손에 가버리는데, 그걸 보시고 제가 그 테잎에 어떻게 썼느냐면, 한국사람으로서 앵커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페니쉬, 여러 나라 말로 아나운서 하는 걸 보였어요. 그걸 보시고 아마 좀 특이하다고 보셨나봐요. 그게 목요일인데 딱 전화를 하셨어요 금방. 금요일에 인터뷰가 있었고 그때 딱 그러시더라구요. 너 여기서 일하고 싶니? 저는 그럼요 청소를 할까요, 뭘 할까요? 아무거나. 그랬더니 월요일부터 메인앵커 한다고. 그런데 참 웃긴 것은 그때 벌써 앵커가 두 분 있었죠. 기자들도 많고 다 있는데 저를 위해서 앵커를 세 명으로 바꾸겠다고... 구조를 다 바꾼 거죠.

박인규 : 거의 신데렐라 같은 얘기네요

황진이 : 그렇습니다.

박인규 : 메인앵커라면 몇 시 뉴스입니까?

황진이 : 딱 하나였는데, 오전 12시죠.

박인규 : 그 방송이 텔레페TV라는데 이게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방송사에요?

황진이 : 아르헨티나에서는 시청률이 제일 높은 데에요.

박인규 : 대단하군요. 그러면 텔레페TV에 황진이씨 말고 한국인이나 동양인 기자, 아나운서, 앵커 이런 분들이 있었나요?

황진이 : 아직까지 없습니다.

박인규 : 여러 가지 기록을 많이 세웠군요. 국립방송대학도 전무후무하고. 그 당시 방송할 때 잘 모를 것 같아서. 말하자면 남미방송인데 동양인 여성이 나오니까 꼬레아나라고 사고가 났다고..

▲ ⓒ프레시안

황진이 :
딱 제가 나타나니까 시청자들이 혼동을 하시는 거예요. 이 사람이 중국 사람일까 홍콩 사람일까 일본 사람이냐 말이 많아서. 하여튼 좋은 건 이거죠 화제가 된 것. 관심을 기울였다는 거죠. 그래서 국장님이, 그러면 네가 한국 사람이니까 교육도 시키기 위해서... 너무 길어서 황은 빼고 진이, 그 옆에 꼬리아나. 스페니쉬로 코리안이거든요. 그렇게 쓰셨어요 스크린에. 그래서 제가 길에 지나갈 때 보면 제 이름이 아니라 꼬리아나, 그렇게 부르시는 분도 있고.

박인규 : 그 당시 아르헨티나 방송에서는 남성들도 아시아계 앵커는 없었습니까?

황진이 : 제가 들은 것은 옛날에 어떤 일본 분이 남자분이신데, 그 일본 분은 일본에서 태어나신 게 아니라 거기서 후세, 2... 아니면 3세.

박인규 : 앵커로 발탁되시고, 목요일에 연락이 와서 다음 주부터 앵커를 해라. 어떻게 보면 벼락출세를 하신 셈인데 그것 때문에 방송사 안에서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황진이 : 많이 힘들었죠. 개인적인 싸움을 떠나서, 생각해 보세요. 딱 연습하던 학생이 갑자기 생방송 뉴스 한다는 게 진짜 충격적인 것인데, 아무래도 신데렐라 영향이 있어서 못 느낀 것 같아요 그때는. 하여튼 저 자신의 싸움과, 아무래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거기 방송국 안에서도 제일 어린 애, 동양인 애가 갑자기 와서 하니까 밀어주시는 분도 있지만

박인규 : 견제하거나 질시하는 분도 많았을 것 같아요.

황진이 : 엄청나게 많았죠. 어떤 분들은, 왜 아르헨티나에서 나온 아나운서도 엄청나게 많은데 완벽하게 말씀하시고 더 예쁘고, 그런데 하필이면 동양인이 뉴스 같은 걸 해야 되나. 뉴스라는 건 문화나 경제나 정치 같은 걸 잘 전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이민자가 그걸 해야 되냐. 그런 말을 들었지만 많이 힘을 주신 분도 많아요. 특별히 아르헨티나에 사시는 한국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이 얼마나 격려해 주시고 모임에 가면 저한테 한이 맺힌 것을 풀어줬다. 노인회가 있어요. 노인 분들이 12시가 되면, 스페니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냥 저만 보느라고 다 모이시는 거예요.

박인규 : 앵커로는 얼마간 일하셨죠?

황진이 : 2000년부터 한 3년 정도 하고 그 다음 국제뉴스팀장, 뉴스프로그램에서 했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작년부터 앵커를 그만 두시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계세요.

황진이 : 그만 두지는 않았고 조금 쉬는 거구요. 왜냐면 다는 못하니까. 제가 한 2년 전에 변호사 자격증을 국제법을 땄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 뉴스 속보 =

하여튼 책임있게 뉴스 같은걸 보도할 수 있고 좋았습니다.

박인규 : 혹시 국내 언론사, 방송사 같은 데를 접해 보셨나요?

황진이 : 예.

박인규 : 아르헨티나 방송국에서 한 7년 일하셨으니까 아르헨티나 방송에서 일하는 스타일하고 한국하고 차이가 혹시 있는지...

황진이 :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 KBS, 뭐 하여튼 방송국들을 가다 보니까, 참여도 하다 보니까, 솔직히 말해서 진짜 한국이 훨씬 더 프로 같아요. 모든 면으로

박인규 : 일하는 스타일이 좀 더 짜여져 있다

▲ ⓒ프레시안

황진이 :
짜여져 있고 훨씬 더 정돈돼 있고 규모나 빌딩이나 기술 같은 것도 훨씬 더 빠르고 발전된 것 같고. 그래서 와, 나도 진짜 프로 옆에서 일도 해보고 싶고. 옛날엔 조금 장난한 것도 같고.

박인규 : 혹시 국내 방송사에서 여기서 한 번 일해 보자는 제의 같은 건 없었습니까?

황진이 : 이런저런 말도 있지만 좋은 기회가 있으면 도전해볼 만하죠.

박인규 : 굉장히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계신데, 국제법 관련 변호사로 활동하고 계신데 재미있습니까? 보람있습니까?

황진이 : 재밌어요. 또 이 로펌에서 제가 하는 전공이 국제법에서 국제계약 같은 것, 투자 같은 것, 컨설팅, 그런 프로젝트를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경제적인 흐름을 보게 되고 배우게 되고

박인규 : 당분간은 변호사로 계속 활동하실 계획이다.

황진이 : 모르겠어요.

박인규 : 방송사도 휴직이 마냥 되진 않을 텐데

황진이 : 조금이죠. 결정을 빨리 해야 되는데, 제가 지금 방송국에서.. 텔레페에서는 많이 일했죠. 한 7, 8년간 일했는데 한국인으로서 조금 한계를 느끼고 더 발전감이 없는...

박인규 : 그 안에서 승진이랄까 발전가능성에 벽이 있다.

황진이 : 예. 아직까지 제가 최초니까 그런 걸 많이 느끼고, 아무래도 아르헨티나라는 나라가 땅은 크지만 방송, 언론세상은 아주 적어요. 자기들끼리하고, 친구, 콘택트 있는 분들, 하여튼 제가 열심히 아직까지 할 수 있는대로 했지만 제 꿈도 조금 더 큰 것 같아요.

박인규 : 남미 최초의 한인 여성앵커 황진이씨가 앞으로 어디로 튈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8살 때 이민가셨는데 한국말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시네요.

황진이 : 잘 봐주셔서 그런 거고 많이 연습해야 돼요.

박인규 : 8살 때 갔으면 우선 말, 문화가 달라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황진이 : 부모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박인규 : 본인은 어땠습니까?

황진이 : 저도 초등학교 2학년 때 갔기 때문에 말 같은 것도 처음엔 어려웠죠. 제가 3월에 딱 도착했어요. 3월에 아르헨티나는 수업이 시작해요. 도착하자마자 학교에 간 거예요. 그러니까 벙어리였어요. 그래서 수업만 하고, 그런데 그때 도와준 게 뭐냐면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딱 제가 갔을 때 학교에 뭐랄까 특이한 화제라든가 인형이 된 거죠. 그래서 선생님들도 많이 봐주시고 다른 친구들이 숙제 같은 것도... 국어 같은 건 해주고. 제가 한국에서 연필이나 학용품을 가져갔거든요. 아무래도 한국 것이 좋잖아요. 그때만 해도 아르헨티나가 많이 떨어졌어요. 제가 그런 걸 주면서 애들을 꼬신 거죠. 도와달라고.

박인규 : 지금 아르헨티나에 우리나라 교민들이 몇 분이나 살고 계십니까?

황진이 : 한 2만 명이요.

박인규 :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황진이 : 원래 한 3만 명까지 됐었는데 2001년 때 아르헨티나가 디폴트...

박인규 : 외채위기가 나서 냄비 두드리고

황진이 : 맞습니다. 그래서 좀 어려워서 많이 나가셨어요.

박인규 : 대개 아르헨티나에서 사시는 우리 교민들이 어떤 일들을 많이 하십니까?

황진이 : 주로 옷 관계... 의류를 만드시고 가게에서 판매하시고, 그쪽으로 한 95%가 일하십니다.

박인규 : 미국 같은 경우는 전문직이라고 해서 엔지니어, 의사, 변호사, 이런 식으로 나가는 분들이 많은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전문직으로 진출한 한국 교민들이 많지 않으신가 보죠?

황진이 : 1.5세대, 2세대에는 있는데 아무래도 1세대는 그쪽으로 많이 잡혀지시고. 또 문제가 뭐냐면 공부를 하셔도 아무래도 한국인으로서 어떤 분야에서는 진출하시는 게 사회적으로 어려우니까 그냥 편한 대로, 엄마 아빠가 가게 하시는 데에 들어가시는 분이 많아요.

박인규 : 아르헨티나에서 성공을 좀 했다 하면, 돈을 버시거나 하면 미국으로 많이들 가신다고 해요.

황진이 : 그러시는 분들도 있는데 또 많이 돌아오세요. 왜냐하면 한국이나 미국은 너무너무 빠르다고. 삶이 복잡하고 힘들기 때문에,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아직까지 살기는 편해요 경제적으로 잡혀 있으면.

박인규 : 한국인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이나 이런 건 없습니까?

황진이 : 딱 보이게 있진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계 같은 건 있는 것 같아요. 올라가다 보면  어디까지는 올라갈 수 있고 그때부터는 한계가 있다. 아직까지.

박인규 :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사실 2001년 외채위기 때문에 보도도 많이 됐고 아르헨티나가 굉장히 못 사는 나라처럼 돼서,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별로 좋지 않은 이미지 같은 게 있었는데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황진이 : 처음에는 거의 알지 못했죠. 코리아가 어딨는지. 중국, 일본은 알았지만, 왜냐면 이민 역사가 더 길기 때문에. 그런데 월드컵 이후에 참 많이 알려졌구요. 아무래도 아르헨티나는 축구의 나라기 때문에 그것은 진짜 많이 관심있게 보거든요. 그때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까지 모르는 면이 많고. 하여튼 그래서 우리들... 1.5세대들이 홍보를, 그런 일을... 가까이하게 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박인규 : 아까 유럽에서 한인학교 하시는 간호사분 말씀하셨는데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는 한국 교포 자녀들이 한국의 말이나 글, 문화를 알 수 있는 교육기관이랄까요, 그게 좀 돼 있습니까?

황진이 : 한국학교가 하나 있습니다.

박인규 : 하나. 그 부분에 대해서 정부의 지원 같은 게 필요하달까 그런 건 없습니까?

황진이 : 아무래도 있겠죠. 그리고 받으시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더 있으면 좋겠죠. 아직까지 규모가 작고, 하여튼 하실 수 있는대로 하는데, 아무래도 아르헨티나가 큰 나라기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밖에 없어요. 다른 도시, 지방에는 그런 게 없죠.

박인규 : 그렇다면 우리 교민들도 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시고.

황진이 : 많은 분들이 사시지만 또 다른 데에도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박인규 : 이번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여성들, 주로 선배들 되시겠지만, 보시면서 앞으로 이런 일을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황진이 : 그럼요. 또 언론인으로서 더욱더 참여를 해야지요. 언론을 하다 보니 그렇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 같아요. 언론에는 한국인이 없기 때문에, 제가 작년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메인앵커를 하면서 메인프로듀서를 했어요. 그 프로그램 이름이 스페니쉬로 아시아버즈라고요. 아시아를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다. 그런 프로그램이었거든요. 거기는 진짜 제가 한국 노래까지 방송하면서 한국 분들, 훌륭하신 분들도 초대하고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홍보하고 한국어로도 어떤 때는 하고 그랬기 때문에, 또 잡지에서도 국제뉴스 에디터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한국뉴스를 하고, 하여튼 언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박인규 : 지금도 변호사로 활동하시면서 언론일을 하시고 있는 거죠?

황진이 : 그렇죠.

박인규 : 언제 돌아가십니까?

황진이 : 이번 일요일이요.

박인규 : 하여튼 아르헨티나 돌아가셔서도 계속 많이 활동해 주시고, 특히 한국을 아르헨티나에 알리는 게 많은 역할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황진이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남미 첫 한인 여성앵커인 황진이씨를 초대해 남미에서 동양인 앵커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과 글로벌 경쟁시대 여성의 역할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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