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된 지 23일로 닷새째로 접어든 가운데 이번 사건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탈레반은 현재 한국인 인질 석방을 위한 협상 연장 시한을 23일 오후 7시30분(한국시간 오후 11시30분)으로 24시간 연장한 상태다.
당초 탈레반 측은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수감자 23명을 맞교환하자며 협상 시한을 22일 오후 7시30분(한국시각 22일 오후 11시 30분)으로 제시했다가 이를 다시 24시간 연장한 것이다.
탈레반이 협상 시한 연장을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 협상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언급한 것은 탈레반 역시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협상의 진행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게 우리 정부와 관련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현재까지 탈레반이 요구한 2개 사항 가운데 한국군 철군은 이미 우리 정부가 연말 철군 일정을 재확인한 상황이어서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탈레반 수감자들을, 그것도 무더기로 교환 석방해주는 일을 아프간 정부가 선뜻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 아프간 정부가 일정 수준에서 이를 수용하더라도 우리로선 여러 차례 다차원의 협상을 벌일 수 밖에 없어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
◇ 사태 해결의 열쇠는 아프간 정부 = 탈레반 무장세력이 한국인 인질 석방을 위한 협상 시한을 2시간 연장한 가운데 아프간 정부는 현지 부족장 등을 중개인으로 내세우며 밤샘 협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측 대표단과도 긴밀히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정부 협상단 관계자는 "탈레반은 정부 측에 탈레반 수감자들의 석방을 확인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며 "이번 협상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와 한국인들이 안전하게 풀려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아프간 정부가 인질 석방을 위한 협상에 적극적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의 수감자 석방 요구를 순순히 들어 줄지는 불분명하다.
AP 통신은 아프간 정부가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를 맞교환하는 '거래'에 동의해줄지는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지난 3월 이탈리아 기자의 석방을 위해 탈레반 수감자를 풀어줬다가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은 아프간 정부로서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탈레반 수감자를 선뜻 석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이탈리아 기자의 석방을 위해 탈레반 수감자를 풀어주면서 "이번 한번(one-time deal)뿐"이라고 못박기도 했다.
◇ 탈레반이 제시할 교환 수감자 명단 주목 = 탈레반은 현재 한국인 인질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아프간 정부에 제시할 수감자 명단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뉴스통신사인 아프간 이슬라믹 프레스(AIP)는 탈레반 지휘관 대변인을 인용해 "석방 요구 대상 수감자 명단이 완성됐다"며 "이 명단은 정부측에 건네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명단의 내용이 이번 협상에서 중요 변수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이 지도자급 인사의 석방을 요구할 경우 아프간 정부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탈레반 대변인이 한국인 인질 23명과 동일 수를 제시한 상태지만 실제 제출 명단에 포함될 인원 수도 관심거리다. 이탈리아 기자 1명과 탈레반 포로 3명이 교환석방되기까지 15일이 걸렸다.
이럼 점들을 감안할 때,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최대 규모의 외국인 피랍사건인 이번 사태에서 우리 정부가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양측을 설득, 인질들을 석방시키기까지는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 고위당국자도 이번 사태와 관련, "시간을 좀 늘려서 볼 필요가 있다"면서 "당장 급박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다른 정부들은 어떻게 대응했나 = 외국인을 납치한 탈레반의 요구는 아프간 주둔 외국군 철수와 수감자 맞교환 등 크게 두가지.
이번 한국인 납치사건에서도 탈레반은 처음에는 한국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21일 밤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죄수 23명의 석방을 우선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따라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의 맞교환 성사 여부가 한국인 인질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대 관건이 되고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2003년 이후 탈레반 등 아프간 무장세력에 의해 자행된 외국인 납치사건은 모두 15건.
본국의 대응 방식에 따라 외국인 인질들의 생사가 엇갈렸다.
이번에 발생한 한국인과 독일인 납치사건을 제외한 13건 중 8건에서 인질들은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지난 3월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에서 통역사, 운전기사와 함께 납치된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 기자 대니얼 마스트로쟈코모의 경우 이탈리아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무사히 풀려난 대표적 사례.
당시 탈레반은 아프간 주둔 이탈리아군 철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탈레반 공격 중지, 카불 교도소에 수감된 3명의 탈레반 수감자 석방 등을 요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아프간 주둔 이탈리아군의 철수를 무기로 아프간 정부를 압박, 인질과 수감자 맞교환을 성사시켰다.
탈레반은 1천여명의 프랑스군 철군을 인질 석방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는 철군 가능성을 밝혔다. 인질들이 무사히 풀려난 뒤 사르코지는 "아프간 재건을 위해 프랑스군의 아프간 주둔을 늘릴 필요가 있다"며 말을 바꿨다.
한국인 납치범들과 동일한 세력인지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채 논란거리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독일은 이번 납치사건에서 협상에 미온적인 태도로 대응하다 인질 한명을 잃는 화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