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저녁(한국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부킷 잘릴 국립경기장에서 펼쳐진 한국 축구대표팀의 숙적 이란과 2007 아시안컵축구대회 준준결승.
'대표 수문장' 이운재는 '신의 가혹한 룰렛게임'이라 불리는 승부차기에서 무려 두 차례나 신들린 선방을 펼치며 다시 한번 태극호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과 8강전에서도 '거미손' 방어로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데 이어 비슷한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이운재는 이후 '한국에서 따라갈 수문장이 없다'라는 찬사를 들으며 대표팀의 붙박이 골키퍼로 활약했고 지난해 독일월드컵에서도 주전 골키퍼로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소화해냈다.
하지만 독일월드컵이 끝나고 잔 부상에 시달린 이운재에게는 시련이 다가왔다.
소속팀 수원에서 박호진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채 벤치를 달구는 시간이 많아진 것. 부상에서 회복된 뒤에도 이운재는 불어난 체중 때문에 골문을 지키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독일월드컵 이후 부임해 아시안컵 예선을 치르던 핌 베어벡 대표팀 감독은 이운재를 대표팀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리그 출전 횟수가 적다 보니 경기 감각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수 년 동안 한국 대표 수문장을 자처했던 이운재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악물었다.
훈련에만 집중하며 체중줄이기에 나섰다. 95㎏을 육박하던 몸무게를 80㎏대 후반으로 떨어뜨렸고 결국 소속팀 주전 자리를 되찾았다.
날렵해진 이운재에게 당연히 태극마크도 돌아왔고, 아시안컵 주전 자리까지 확보했다.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출전한 이운재는 이날 경기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은 무실점 방어로 골문을 지켜냈다.
후반 초반 공중볼을 펀칭하다가 상대 공격수와 머리를 부딪쳐 쓰러지기도 했지만 몸을 다시 일으키며 노장의 투혼을 발휘했다.
연장 후반 종료 휘슬이 울리자 벤치로 다가간 이운재는 생수 1병을 머리에 모두 들이부으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곧바로 이어진 승부차기. 골문에 듬직하게 서 있던 이운재는 두번째 키커로 나선 이란 주장 메디 마다비키아가 왼쪽으로 틀어 찬 슈팅을 벼락같이 몸을 날려 쳐냈고, 네번째 키커 라술 하티비의 가운데로 몰리는 슈팅마저 발끝으로 걷어내며 승리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이운재는 센터서클 안에 모여있던 후배 선수를 향해, 또 베어벡 감독을 향해 두 입을 꼭 다문 채 특유의 미소를 띄웠다.
'시련 속에서도 나는 죽지 않았다'라는 고요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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