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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을 알면 '인간'이 보인다

[지상현의 Homo designans·6] 문화의 원형과 만나는 디자인

1년째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는 '컬쳐 코드(culture code)'의 저자 클로테르 라파이유는 원래 심리학자다. 그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00대 기업의 절반이 넘는 기업에 마케팅 자문을 해주고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이미지 메이킹을 도와주고 있지만 본래 소비자 심리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의 이면에 있는 원형(archetype)을 찾는 임상심리학자였다. 연구실에만 있던 원형에 대한 지식과 통찰을 이용해 기업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찾는 원형이란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의식적 심상을 말한다. 집단의 오랜 경험이 누적돼 나타나는 이 원형은 각 개인의 마음 속에 숨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인의 지프와 미국인의 지프는 서로 다르다"

원형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칼 구스타프 융인데 그에 따르면 우리 마음속에는 아니마(여성성), 아니무스(남성성)처럼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에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중요도가 다른 원형들이 삶의 다양한 국면만큼 있다고 한다. 예컨대 '입학식'과 '결혼'에 대한 원형도 있을 것이고, 둘 가운데는 결혼에 대한 원형이 더 중요할 것이다. 입학식이야 하루로 끝나는 행사여서 원형과 일치하지 않는 입학식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파이유가 원형 분석을 통해 기업에 자문한 내용 가운데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크라이슬러 사에서 나오는 '랭글러'라는 지프차도 그 중 하나다. 원래 프랑스인인 라파이유는 어린 시절이던 2차세계대전 중에 지프를 타고 파리로 입성해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을 뿌리는 미군을 보고 커서 미국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비슷한 경험을 한 또래의 프랑스인들의 마음 속에는 미군과 그들이 타고 온 지프에서 해방자의 이미지를 느꼈고 이것이 지프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됐을 것이다.

반면 미국인들은 지프에서 전혀 다른 원형을 본다. 말을 타고 산과 들, 심지어 강까지 건너며 서부를 개척했던 미국인들은 지프의 전천후 기동성에서 과거 조상들이 탔던 말과 같은 자유로움의 원형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판매되는 지프의 전조등은 그의 조언에 따라 말의 눈과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 본래 사각형이던 것을 둥글게 바꿨다고 한다. 반면 유럽시장에서는 초기의 사각형 전조등 모델을 그대로 하여 출시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 1987년 전 세계에서 출시된 4각형 전조등은 말과 같은 짐승의 이미지를 갖기는 힘들다. 미국에서 이를 둥근 전조등으로 교체한 후 판매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현재는 유럽에서도 둥근 전조등으로 팔리고 있다.

"행복한 패배자"

또 다른 사례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06년 10월호 "최강의 영업력"이라는 특집기사에 실린 "행복한 패배자"라는 그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팔고 계약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무수한 실패를 맛봐야만 하는 직업이다. 야구로 치면 3할대의 타자라도 7할의 실패를 맛봐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과정에서 세일즈맨들은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좌절도 할 것이다. 소위 성공한 세일즈맨이라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공한 세일즈맨들은 어떻게 이런 실패를 극복하고 씩씩하게 다음 영업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이들은 공통적으로 평범한 세일즈맨들이 갖지 않은 원형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행복한 패배자"라는 원형이다.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기업가, 운동선수, 과학자,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실패를 칭송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패를 해보면 이런 문화나 속담에 진심으로 기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순진할 정도로 영화 속 주인공의 실패와 성공스토리를 현실과 동일시하고 속담의 내용을 믿는다. 이들은 마음속에 "행복한 패배자"라는 원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원형을 가진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 결과가 실패일 때 거기서 나름의 행복감조차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약아 속담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조금 둔감하게 만들어 이런 원형을 갖고 사는 쪽이 성공확률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미국은 아직 사춘기>라는 저술에서는 세계의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의 정신연령은 아직도 사춘기 소년 정도라는 정치문화평론까지 하고 있는데 물론 그 평론의 바탕에는 미국인들, 특히 부시대통령의 행적을 통해 미루어 짐작한 몇 가지 원형이 있다.

'원형'을 통해 집단의 욕구를 파악한다

호모 데지그난스라는 제하의 글에서 원형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한 이유는 랭글러 지프의 사례에서 보듯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이 원형이 디자인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라파이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융의 원형이론에 기초해 소비자들의 행동을 이해하려 한다. 뉴질랜드의 포커스 그룹에서 개발한 "니드스콥(NEEDSCOPE)"도 그중 하나다. 이것들은 모두 융의 원형이론에서 출발했지만 개념을 단순화하는 등 실생활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원형이론이 이렇게 각광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집단 무의식을 말하는 원형에서 그것에 대응되는 욕구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터의 입장에서 원형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 집단의 욕구를 이해하는 셈이 된다.

예컨대 커피를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커피에 대한 원형 속에 '친교의 수단'이라는 특징이 포함돼 있다고 하자. 필자의 친구 중에 그런 사람이 몇 있다. 이들은 사람사귀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다른 동료를 찾는다. 이들이 커피와 관해 그리는 장면은 정다운 사람들과 담소하며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무슨 일 있어?"하며 다가온다.

반면 '커피 한 잔'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그런 부류에 속하는데 아마 어려서 자주 본 미국 드라마의 영향인 것 같다. 과학자나 교수가 커피를 마시며 사색을 하고 책을 읽는 장면을 인상 깊게 봤고 그것이 커피와 관련된 원형에 속하게 된 것으로 짐작한다. 하여간 이 부류에 속한 이들은 서재에 홀로 앉아 창 밖의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그릴 것이다. 물론 이 두 부류가 명확히 구분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장면이 뒤섞인 가운데서도 어느 한 쪽에 중심이 더 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두 원형은 깊이 감춰진 각기 다른 두 욕구를 대변하고 있다.

원형은 타고난 것이라 할 정도로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새로이 형성되거나 수정되기도 한다. 커피와 같은 것에 대한 원형은 새로이 형성되는 것일 텐데 이런 원형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TV를 통해 처음으로 급류타기를 보았다고 하자. "재미있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과 "무섭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이런 인상들이 급류타기에 대한 원형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재미있겠다"는 인상에는 "타고 싶다"는 욕구가, "무섭겠다"는 인상에는 "피하고 싶다"는 욕구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커피를 친교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교에 대한 욕구가, 마음을 가다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생각과 주변을 체계화하고 질서를 부여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고 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소비자의 욕구와 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동서식품의 맥스웰과 맥심의 광고전략은 확연히 다르다. 맥스웰은 안성기와 같이 친근하고 편안한 배우를 모델로 하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그대와~" 식의 메시지를 전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 맥스웰이 친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암시하는 것이다.

▲ 반면 맥심은 커피 향과 맛에서 유추한 분위기 위주로 광고한다. 예컨대 이미연의 고혹적 매력과 커피의 그윽한 향을 연결시키는 식이다.

우연인지 국내의 커피 광고 가운데 전자의 욕구를 핵심 메시지로 삼아 광고하는 곳이 있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를 필자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친교의 수단으로 커피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이 브랜드의 광고에서는 객지의 역에서 만난 두 청년이 커피를 통해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남편이 아내의 손님들에게 커피를 서빙하기도 한다. "함께하는 즐거움"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서 보듯 이 회사는 몇 년째 일관되게 해당 커피 브랜드를 친교의 수단으로 각인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반대로 마음을 가다듬는 수단으로 보는 소비자층을 위해서는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그윽한 커피향을 맡는 모습이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후자에 해당하는 광고는 아직 국내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소비자의 욕구와 이런 방식으로 만날 때 소비자와 브랜드의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마치 공통의 원형들을 가진, 다시 말해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끼리 이루어진 커플이 가장 오래 지속된다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마케터나 디자이너들이 소비자의 마음 속에 있는 원형을 이해해야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쉬워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소비자의 무의식적 욕구를 분석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자가 선호할 디자인을 예측하라는 말이 된다.

'원형'과 '리더십', 그리고 디자인

물론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세계적 디자인 회사 텐져린의 CEO인 마틴 다비셔는 디자인의 생명은 '리더십'이라고 했다. 디자인 트렌드는 예측하기보다는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얼핏 보면 라파이유와 다른 입장인 것처럼 보인다. 라파이유는 문화의 원형을 읽고 예측하라는 입장이고 다비셔는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두 말이 상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장의 '문화적 원형'과 어긋난 디자인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설혹 그 디자인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마케팅 비용이 들겠는가.

문화에 대한 분석과 예측이 우선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석된 제품과 관련한 원형은 구체적이지 않기 십상이고, 소비자들이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를 구체적으로 시각화시키는 것은 온전히 디자이너의 몫이다. 뭔지 모르지만 막연하게 느끼는 잠재된 욕구 혹은 원형을 구체화시켜 소비자에게 제시하는 디자인과정은 어찌 보면 예측이라 할 수도, 창작이라 할 수도 있다. 결국 다비셔가 말하는 리더십은 소비자의 마음 속에 흐르는 원형이라는 큰 물줄기를 한두 개의 시각적 이미지로 유도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모 전자회사의 휴대폰 사업부문에 자문을 한 적이 있다. 사전에 몇 가지 조사를 해봤는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의 결 속에 휴대폰, 노트북, DMB 등의 제품과 관련된 특정한 원형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것으로 삼성전자의 노트북 컴퓨터 광고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하다.
▲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헤드라인이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소비자들의 무의식적 욕구를 흡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소비자들이 가진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문화적 원형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민족답게 디지털 라이프를 즐기고 싶어 한다. 그리고 디지털 라이프를 즐기는 가장 전형적인 장면으로 어디서나 디지털 기기로 통신이나 게임을 하고 필요한 문서작업을 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디지털 유목민"이다. 필자가 조사한 내용만 놓고 보면 삼성전자는 우리 소비자들이 공유한 문화적 결과 딱 맞아 떨어지는 광고 캠페인을 하고 있는 셈이다(이런 분석이 휴대폰으로 가면 더 복잡해진다. 한정된 지면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 없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디지털 유목민"을 놓고 이것이 디지털 미디어와 관련된 원형을 정확히 읽어냈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그보다는 막연하고 포괄적이던 디지털 기기와 관련된 소비자들의 심상을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함축된 이미지로 응집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비셔의 말과도 통하고 라파이유의 주장과도 맞아 떨어진다.

디자인이나 마케팅이나 결국 요체는 '인간을 제대로 아는 것'

며칠전 모기업 경제연구소의 임원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디자인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컬쳐코드 이야기까지 화제가 옮아갔다. 얘기를 듣던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디자인이나 마케팅이나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면에서는 같은 일을 하는 셈이군요".

필자가 의식하지 못하던 것을 그 임원이 일깨워준 순간이었다. 감각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디자인에 대해 깊게 이해해준 것도 고마웠지만 디자인의 기본적인 과제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임을 새삼 돌아보게 해줬다. 소비자의 욕구와 깊게 만나야 한다는 말은 인간을 이해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디자인이 치유와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바로 이런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자! 이제 호모 데지그난스(디자인적 존재)인 당신의 컬쳐 코드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당신이 좋아했던 광고, 디자인, 가요의 가사를 통해 당신이 가진 막연했던 욕구나 삶을 거꾸로 이해해보는 것이다. 난해한 철학서를 통해서만 성찰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치던 광고나 디자인에서도 스스로를, 또 우리를 돌아볼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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