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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소격서를 혁파하소서"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道'] 제14장 지극한 정치를 향하여 <71>

작년 겨울부터 주청사(奏請使) 대사를 바로 선정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끌어 왔던 것은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경하사(慶賀使)와 함께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주청사는 관례대로 1월에 중국으로 떠날 계획이었으나 명나라 황제의 생일에 맞추어지는 경하사와 함께 다녀오기로 해 7월까지 미뤄졌던 것이다.
  
  조광조 등에게 계속해서 수모를 당하던 남곤은 주청사 대사로 뽑히어 모처럼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심신이 자못 지쳐 있던 터라 뒷날에 축하모임을 가지려 했으나 형조판서 심정 등이 재촉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술자리를 가졌다. 공을 세운 사신 일행에게는 관직에 따라 임금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므로 낙점된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다. 더구나 남곤이 기쁜 것은 일마다 조광조 같은 신진 사림에게 밀리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남곤이 한천을 부른 것은 심정이 미리서 한천을 통사(通事) 보조원으로 추천한 까닭이었다. 한천은 남곤의 집에 들러 대신의 집치고는 너무 화려하여 어리둥절했다. 남곤은 이조판서에서 대제학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남곤의 집은 마치 궁을 축소한 듯했다. 기와집이 ㅁ자 형태로 들어서 있었고, 드물게 정자가 있는 연못이 조성돼 있었다. 정자에는 초대받은 대신들이 이미 좌정하고 있었다. 남곤은 한천을 보더니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심정 동지가 자네를 통사 일행으로 특채해 달라고 부탁했다네. 자네야말로 앞으로 나를 수행하느라 고생이 많을 것이야. 그래서 오늘 자네에게 술을 한 잔 주고 싶어 불렀다네."
  
  "제가 어찌 어르신들 틈에 낄 수 있겠습니까."
  
  "어허, 자네는 늙은 나를 위해 내 수족이 되어야 할 사람이네. 그러니 어려워 말고 이리 올라와 앉게나."
  
  정자에는 좌참찬 홍경주, 형조판서 심정, 예조판서 권균, 예조참판 조계상, 좌찬성 김전, 병조판서 장순손, 병조참지 이행 등이 앉아 있었다. 아무리 남곤이 권유한다고 해도 품계가 엄연하므로 중인인 한천은 벼슬아치들 사이에 낄 수 없었다.
  
  "자리에 앉는 대신 술심부름을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리와 앉게나. 대제학께서 자네를 가까이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여기 모인 대신들도 이해할 걸세."
  
  심정이 남곤의 말을 받아 한천이 정자에 오르도록 명했다. 그래도 한천은 정자 밖에서 차수(叉手)를 한 채 고개를 나직하게 숙이고 있었다. 홍경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남곤을 타박했다.
  
  "남대감, 손님을 불러놓고 술잔을 돌리지 않으니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 같소이다. 어서 술잔을 돌리십시다."
  
  홍경주 한 마디에 술잔이 돌아가고 술자리에 흥이 일었다. 요즘 자신의 딸 홍빈(洪嬪)이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어 날로 위세가 높아가고 있는 홍경주였다. 남곤이 큰소리로 초대의 말을 했다.
  
  "저를 주청사로 밀어주신 여러 대신들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초대했으니 마음껏 마시고 대취하여 시름이 있거들랑 오늘 이 자리에서 풀고 가시오."
  
  과천 기방에서까지 불러온 기녀들이 대신들 사이사이에 앉아 수청을 들었다. 한 기녀가 거문고를 타니 술자리는 더욱 무르익었다. 한천은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아랫것들에게 지시를 하며 술동이에 술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최근 들어 몸이 약해진 남곤이 불콰한 얼굴로 이행에게 다가가 사과를 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내 힘껏 전하께 충청도관찰사로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미안하오. 조금만 기다리시면 좋은 날이 올 것이오."
  
  "대감, 병조참지 자리도 감지덕지입니다. 지금은 조광조의 세상이 아닙니까. 조광조의 말 한 마디에 전하의 마음이 움직이니 말입니다."
  
  "조광조의 위세는 전하를 믿고 잠시 그러는 것이니 그것은 물거품 같은 것이오. 그러니 이런 때 건강이라도 챙기시고 분을 잘 참아야 합니다."
  
  취기가 오르자 술자리는 어느새 젊은 대간들을 비난하는 자리로 돌변해버렸다. 대간들 중에서도 조광조가 가장 많이 욕을 먹었다. 장순손이 큰소리로 말했다.
  
  "김굉필이 누구입니까. 조광조의 스승이 아닙니까. 정몽주를 문묘에 제사지내자는 것까지는 눈을 감고 봐줄 수 있지만 김굉필까지 제사 지내자는 것은 조광조 무리들이 붕당을 만들어 그들의 영수로 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렇소. 김굉필을 문묘에 제사지내기 위해 정몽주를 끌어들인 것이오."
  
  심정은 홍문관의 대간들을 의심했다.
  
  "아마도 성균관 유생들이 문묘종사 문제로 상소를 올린 것은 홍문관의 몇몇 대간들이 사주해서 한 짓인지도 모르지요."
  
  김굉필의 문묘종사가 대신들의 술자리에 안주감으로 오른 것은 당연했다. 안당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육조의 대신들이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의 대간들과 사사건건 맞서 있었던 것이다. 화해를 주선해야 할 삼정승들은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면서 원칙적인 입장만을 고수했다. 그러니 대신과 대간, 어느 쪽에서 보건 간에 정승들의 입장은 소극적이고 무책임하게 보였다.
  
  조광조 등이 현량과를 설치하려는 것도 대신들의 비판거리가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 그리고 사헌부를 장악하고 나서도 성에 차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현량과를 설치하여 조광조의 무리들로 조정을 꽉 채우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무리 중에 이자가 앞장서고 조광조가 뒤에서 전하를 움직였던 결과입니다."
  
  이자가 지난 3월 경연에서 처음으로 거론하고 조광조가 뒤따라 직언하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조광조가 이렇게 아뢨던 것이다.
  
  "이자가 전하께 아뢴 말은 신 등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방의 경우는 감사와 수령이, 경중(京中)의 경우는 홍문과, 육경(六卿), 대간이 모두 함께 재행(才行)이 있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대궐의 정원에 모아 친히 대책(對策)으로 시험을 보이시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종께서 하지 않던 일로, 한(漢)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덕행은 여러 사람들이 복수로 천거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헛되거나 잘못되지 않을 것이고, 또 대책으로 그 당사자가 하려는 앞으로의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니, 두 가지 모두 손실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이조판서를 오래하여 인사에 경험이 풍부한 남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현량과 실시할 때 나타날 부작용을 말했다.
  
  "천거과(薦擧科)의 의논이 나온 뒤로 신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까 하여 널리 고사(古事)를 참고해 보았습니다. 향리에서 천거하여 선발하던 삼대의 제도가 폐지된 때로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현량, 방정, 역전(力田) 등의 과(科)가 있어 20만호를 기준으로 2,3 인을 취(取)하였으나, 이 역시 고제(古制)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여 9품중정(九品中正)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부정하게 함부로 남발되어서 진(晉)나라 때는 당시 사람들이 <상품(上品)에는 한미(寒微:가난하고 집안에 배경이 없는 것을 말함)한 가문이 없고 하품에는 세족(世族:대대로 권세 있는 지위를 가진 집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호명(糊名:답안지의 응시자 이름을 풀질한 종이로 붙여 가리는 것)의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공정을 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 때는 삼례(三禮), 동자(童子) 등의 과(科)를 만들었으나,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최고로 쳐서 당시의 큰 인물이며 착한 선비들이 모두 이 과의 방목(榜目:합격자의 이름을 적은 책)을 거쳐 나왔고, 송(宋)나라 때의 소위 진사라는 것 또한 천거해서 뽑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천거를 거쳐 대정에서 책(策)으로 시험을 본다면 예전의 현량과며 방정과와 가까운 듯합니다만, 그러나 부득이 지방에서 모두 천거하게 하자면 반드시 남발될 것이고, 사람들이 같이 천거할 수 있는 사람인즉 지극히 적을 것인 데다 또한 잘못 천거한 사람을 아울러 죄 준다면 이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과거로 사람을 뽑는 법은 단지 우리나라만 이러한 것이 아니고, 수나라 때 이후 모두 그러합니다. 비록 과거로 사람을 뽑더라도 선(善)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의 도리를 다할 것입니다. 향거리선지법(鄕擧里選之法:향리에서 천거하여 선발하던 제도)를 비록 오늘날 다시 시행하려고 합니다만, 그 사람을 천거하는 자들이 어찌 삼대의 사람들과 같겠습니까? 천거로 사람을 뽑는 것은 비록 한 번은 할 수 있겠지만, 늘 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자와 조광조가 현량과를 제의한 지 1달 동안 강혼, 장순손, 김전, 고형산, 이유청(李惟淸), 손주(孫澍) 등이 차례로 나서 반대했고, 최숙생과 안당, 그리고 신진 대간들이 조광조를 옹호했다. 그러나 중종은 이미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시행해도 무방할 것이니 이를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결국 지난번 정초 인사도 남곤의 추천을 무시하고 단행했지만 이번에도 남곤의 의견은 또 다시 무시되고 만 셈이었다.
  
  "조광조의 무리들이 좌상 김응기를 교체하자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의정부까지도 장악하자는 속셈일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현량과를 그자들 뜻대로 하고 나서는 곧 소격서(昭格署)를 없애자고 할 것입니다. 소격서를 없애자는 것은 제사를 주관하는 왕실까지도 무력화시키자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한천은 누군가가 얘기할 때마다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이들 모두가 조광조를 저주하고 증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조광조는 지치를 위해 동지들과 계획한 것을 앞만 보고 밀고 나갈 뿐 이들에 대한 방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정을 군자들로 채우면 소인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만 예나 지금이나 하고 있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난 뒤 심정이 한천을 보면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남곤 대감을 잘 모시게. 앞으로는 남곤 사람이 되어야 출세할 수 있을 것일세. 조광조가 힘쓰는 세상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야. 오르다 보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거든. 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네. 하하하."
  
  한천은 등골이 오싹하여 심정이 나간 뒤 몸을 떨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가슴이 쿵쾅거리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조광조에게 달려가 자신이 들은 얘기를 다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예전에도 명경에서 심정에게 들었던 얘기를 했다가 '소인배를 닮으려 한다'고 심하게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한천은 집으로 돌아와 지난 몇 달을 떠올려보았다. 스승 조광조의 주장이 하나하나 실현될 때마다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좌의정 김응기가 물러나자, 그 자리를 정광필 등이 김전을 추천하였으나 중종은 조광조가 추천하는 안당을 임명했다.
  
  그런데 이때 지진이 일어나 이번의 인사를 두고 시비가 일었다. 때마침 안당이 우의정에 임명된 날 저녁에, 또 이틀 뒤 심정이 형조판서가 된 날에도 강진(强震)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심한 지진으로 땅이 움직여 대궐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조각배가 물결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말이 넘어지고 성과 집들이 무너졌다. 강진의 여진은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시비는 조정에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영의정 정광필은 어느 쪽도 편을 들지 못하고 자신의 부덕 탓으로 돌렸다.
  
  "요즘 재변은 참으로 큰 재변으로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제 지진은 옛날에는 없던 것으로서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은 사실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억울한 좌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습속이나 혹은 인재 등용이 타당치 못해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틀림없이 신이 음양을 조화롭게 하지 못한 탓입니다. 신의 벼슬을 해임시켜주기 바랍니다."
  
  안당은 자신이 우의정에 오르자마자 생긴 재변이라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여러 번이나 반복해서 사임을 요청했다.
  
  "나라에서 정승을 임명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재주와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온 나라의 기대가 걸려 있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서도 신과 같이 가장 암둔하고 용렬한 사람을 정승 자리에 올려놓았으니 이러한 큰 재변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오니 신을 사임시켜주소서."
  
  그런데 중종은 재변의 원인을 소인의 입궐에서 찾았다. 이것은 군자와 소인이라는 새 논란거리를 만들어 신하들끼리 서로의 탓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의 급선무는 군자가 조정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인을 용납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군자를 등용하는 것이 하늘의 변고에 보답하는 것이며 재변을 막는 방도치고 이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중종의 논리는 조광조와 흡사했으나 군자와 소인의 논리는 엉뚱하게 확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광조 등은 남곤의 무리를 소인이라 하고, 남곤 등은 조광조 무리를 소인이라 하여 격렬하게 다투었다. 심정이 말하는 소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조광조 등을 가리켰다.
  
  "이번에 생긴 지진은 음이 성하고 양이 미약한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지당한 의논입니다. 오늘이라고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 다스려진 세상이라 하더라도 소인이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조참판 조계상은 조광조 등이 소인이면서 군자인 체 한다고 몰아붙였다.
  
  "소인들이란 거의 다 재간이 많습니다. 어찌 행적을 드러내어 자기 정체를 나타내겠습니까. 그들이 하는 짓들은 다 옳은 것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임금이 옛날 것을 좋아하면 그 의향을 눈치 채고 임금을 그때로 인도하는 체하면서 실지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 듭니다. 그러나 이런 무리들은 사람들의 화를 받지 않으면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되는 법으로서 결국 실패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곤 등에게 조광조가 피해를 본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남곤 사람들 중에 병조판서 장순손이 높은 벼슬을 할 인품이 못되는 소인배라고 하여 사임을 요청 당했고, 조계상도 대간들에 의해 끊임없이 탄핵을 당했다. 특히 조계상은 사리사욕에 눈이 먼 탐관(貪官)으로 지방 고을 원들에게 악평이 나 있었다. 틈만 나면 자녀 혼수감을 고을 원들에게 요구하여 도대체 조계상의 자식이 몇이나 되냐는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휴가를 마치고 조정에 복귀했을 때까지도 장순손과 조계상의 사임 문제로 시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분개한 조광조가 중종에게 직언함으로써 대간들이 너도 나도 그들을 논박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중종은 그들을 사임시키기로 결심했다. 결국에는 심정까지도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하였다. 조광조가 휴가를 받아 용인에 가 있는 동안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때 조광조는 심정이 형조판서로 임명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 "지진이 일어난 것을 보니 심정이 형조판서가 된 게로구나"하고 탄식했을 만큼 그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시비가 일 때마다 조광조 등에게 밀리니 남곤 등은 계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심정의 말마따나 중종의 마음이 변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수시로 무시당하고 끝내 파직 당하기까지 하니 분노가 부글부글 치밀었다.
  
  그러나 남곤 등이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정도의 무른 위인들은 아니었다. 폐주 때부터 목숨을 연명한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들이었다. 그들은 현량과의 시행을 가능한 한 지연시켰다.
  
  그러자 조광조 등은 소격서의 혁파로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소격서란 별에 제사지내고 비는 곳인데,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기 때문에 조광조는 이를 폐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격서 혁파는 훗날 사람들이 '기묘년의 화가 이 일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만큼 중종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무인년 7월 말이었다.
  조광조 동지들 간에 그동안 소격서의 존재가 유가의 법도에도 맞지 않고 때때로 제물을 대는 백성들이 고달팠으므로 눈엣가시 같았는데 마침내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간원 모두가 연명으로 합계를 올린 것이었다.
  
  <대체로 도교는 이단의 하나입니다. 괴이하고 허황하며 세상을 속이고 하늘을 업신여겨 우리의 도를 심하게 해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 뿌리를 잘라버리려 하지 않겠습니까.(중략)
  
  지금이 소격서 역시 고려의 나쁜 제도를 따라가면서 폐지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폐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거기다가 관리까지 두어서 지키고 있으며 또 재상들 보내어 해마다 향과 폐백을 바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 때마다 정성을 바치고 빌거나 액막이를 하여 이른바 복을 구하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하늘이 재변과 땅의 변괴, 물건의 괴변과 사람의 변고가 있는 데다 서쪽과 북쪽에서 변란까지 일어나고 있으니 하늘이 전하를 경계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는 어찌하여 이단을 청산하고 올바른 도를 추겨 세워 하늘의 의사에 보답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번의 소격서 혁파에는 언제나 신중했던 정승들도 적극 동의했다.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정 등도 명분이 뚜렷했으므로 마지못해 찬성했다. 조광조는 모처럼 정승과 대신, 대간들 모두에게 동의를 받아 중종을 압박했다. 중종은 "조종조에서 하시던 일이니 나로서는 가볍게 고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사방으로 포위된 형국이어서 고단하고 외로웠다. 처음으로 중종은 조광조가 원망스러웠다.
  
  왕을 위로하는 사람들은 왕실의 비빈(妃嬪)들뿐이었다. 비빈들은 소격서로 나아가 지친(至親)의 병을 나아달라고 빌거나, 불당(佛堂)에서처럼 소원성취를 기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궐 안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의지해 오던 소격서를 폐지한다고 하니 불안하기조차 하였다.
  
  "전하, 왕실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 불당을 없애더니 이제는 소격서마저 혁파한다고 하니 참으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나이다. 소격서를 폐지하지 말아 주소서."
  
  좌참찬 홍경주의 딸 홍빈(洪嬪)의 읍소는 중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중종은 2달을 고군분투하며 끌었다. 그러나 대간들은 모두 사직하고 물러난 상태였으므로 양사가 텅 비어 국정이 반은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조광조를 비난하는 화살이 의정부와 사간원의 대문에 날아와 꽂히기도 했다. 화살에는 조광조 무리를 비난하는 글쪽지가 달려 있었다. 반대세력이 쏘아댄 화살이겠지만 그것은 그만큼 조광조가 독주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마침내 9월 들어 중종은 인내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조광조가 예문관 봉교(奉敎) 조언경(曹彦卿)과 승정원에서 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아침에 시작한 농성은 모든 관리들이 퇴청한 밤에도 계속되었다. 중종은 괴로웠다. 승정원은 중종이 업무를 처리하는 비현합(丕顯閤)과 지근거리였으므로 중종은 이들이 '전하, 소격서를 혁파하소서!' 하는 소리를 하루 종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침전으로 돌아간 중종은 잠을 편히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이 아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전하! 소격서를 혁파하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중종만이 아니었다. 내시와 비빈들도 짜증을 내며 조광조를 향해 불평을 터뜨렸다.
  
  이윽고 중종은 입직하고 있는 승지를 불러 홍문관과 예문관에 교지를 내렸다.
  
  "지금 국시(國試: 예정된 식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 대간이 취임하지 않으니 이런 작은 일 때문에 어찌 국시를 물리겠는가. 대신이 입궐하면 내가 물어서 처리하겠노라."
  
  입직 승지를 통해서 중종의 뜻을 전해들은 조광조는 크게 감격하여 아뢨다.
  
  "비록 벌을 받더라도 반드시 성상의 뜻을 돌리기로 목표를 삼았는데, 이제 전교를 들으니 정말로 감격이 큽니다."
  
  그런 뒤 조바심이 들어 또 아뢨다.
  
  "지금 밤이 깊었으나 대간을 불러서 그러한 뜻을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그러나 중종은 아침이 되어 의정부 정승들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대신들 모두가 환영했다. 그러나 조광조 등 신진 사림에 의해서 주도된 것을 꺼림칙하게 받아들이는 대신도 있었다. 물론 조광조의 앞날을 걱정하는 김안국 같은 대신도 있었다.
  
  "잘된 일이오만, 상감을 그토록 강박하다시피 하여 목적을 달성한 것이 좀 마음에 걸리오. 장차 무슨 화라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오."
  
  이 일로 중종은 조광조에 대해서 거리감을 느꼈다. 왕권을 강화하고자 조광조 등을 끌어들여 소신껏 일하도록 신임해 주었는데 이제는 왕권에 도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를 꺾지 못하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소격서가 혁파된 그 자체보다도 왕권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중종을 더 가슴 아프게 했다.<계속>
  
  *[정찬주 연재소설] "하늘의 도"는 화순군 홈페이지와 동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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