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두 달 이상 지연되고 있던 2.13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될 수 있게 되었고 북한과 미국 모두 약속 이행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BDA 해결로 2.13합의 이행과 북핵문제 해결이 탄력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있음을 지적하며 BDA 이후를 우려하기도 한다. 물론 북핵문제 해결이 만만치 않은 과정이고 여기에 북한의 고집이나 미국의 무리수가 사태를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오히려 최근 BDA 해결과정은 다소 시간이 걸리고 애를 먹이긴 하겠지만 북핵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음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국의 '노력'
무엇보다 BDA 해결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이 상상 외의 정성과 노력을 들였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양자가 문제해결에 적극 나설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BDA 자금 동결해제를 정치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집행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3월 19일 대니얼 글레이저 재무부 부차관보가 BDA 북한자금 해제와 함께 중국은행(Bank of China)을 경유한 송금을 발표했지만 중국은행의 거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글래이져 부차관보는 2주 가까이 북경에 머물며 북한자금 송금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도 모자라 유럽과 동남아 소재 은행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시도했고 결국 미국 내 와코비아 은행을 경유해 자금이체를 시도하기도 했다.
다양한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은 BDA 경영진 교체를 전제로 재무부가 최종 결정한 '불법자금세탁기관' 지정을 철회하려고까지 했었다. 이는 사실상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정부의 공식 결정까지도 번복하려고 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은 갖가지 애를 쓰다가 중앙은행간 거래라는 특이한 방식을 통해 북한의 요구를 들어줬다. 이번 BDA 해결 과정에서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목표를 위해 미국이 적극적 의지를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의 '유연함'
미국 못지않게 북한도 상당한 유연성을 보였다. 북한이 BDA 동결자금 해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2005년 11월 5차 6자회담에서였다. 당시 북한은 BDA에 동결된 2400만 달러를 되찾는 게 우선 목적이었다. 그러나 북미 갈등이 심화되고 미국의 대북 압박이 강화되면서 미국은 스튜어트 레비 재무부 차관을 아시아에 직접 보내 북한의 정상적 금융거래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의 약점을 알아채고 대북 압박수단의 하나로서 간접적 금융제재를 강화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은 단순히 BDA에 동결된 자금을 되찾는 게 아니라 국제 금융체제에 정상적으로 복귀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금년 초 북미 베를린 회담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BDA 문제 해결을 약속받으면서 제3은행 경유 이체방식을 관철시킨 것은 바로 국제금융시장으로의 정상 복귀를 위한 것이었다.
미국이 BDA 동결자금 해제를 공식발표한 이후에도 북한이 정상입금을 확인한 연후에야 2.13합의 이행에 나서겠다고 고집한 것 역시 국제 금융시장에서 북한자금의 정상 거래가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술적 어려움으로 입금이 완료되지 못하는 과정에서도 북한은 과거와 달리 참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을 비난하거나 약속을 파탄내지 않고 정상적으로 송금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렸을 뿐 아니라 빌 리쳐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를 초청해 미군 유해를 송환하는 등 간접적으로 화해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이번의 BDA 해결 방식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중앙은행이 나서 일회성 '특혜'를 베푼 셈이기 때문에 북한이 원하는 민간 금융시스템에서의 정상거래는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다. 오히려 이번의 과정을 통해 북한자금의 송금과 이체가 국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함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결국 북한은 자신의 요구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BDA 해결방식을 수용했고 이는 북한으로서도 2.13합의 이행과 핵문제 해결에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자'
'포스트 BDA'를 긍정적으로 기대하게 하는 요인은 BDA 해결 이후 북한과 미국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양자협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노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북한은 자금 이체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미 원자력총국장의 서신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대표단을 초청했고, 이체가 완료되자마자 외무성 대변인이 나서 이체를 확인해 주기도 했다.
미국 역시 북한의 2.13합의 이행을 독려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IAEA 대표단을 초청한 북한에 대해 국무부가 호의적인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같은 긍정적 움직임은 결국 21∼22일 힐 차관보의 방북을 성사시켰고 이를 통해 북한과 미국은 BDA 이후 진전과정에 대해 진지한 양자협상을 가졌다.
사실 힐 차관보의 방북은 2002년 북핵문제 재등장과 북미관계 악화의 계기가 되었던 제임스 켈리 전 국무부 차관보 방북 이후 5년만에 있었던 역사적 방북으로 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의 극적인 계기로 자리매김될 만하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오랜 대북정책 원칙 원칙 중 하나가 '북미 양자협상 불가' 및 '악행에 대한 보상 불가'였음을 감안하면 이번 힐 방북은 이제 미국이 북한을 공식적이고 정상적인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평양 도착 이후 힐 차관보가 언급한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자'는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북미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핵실험과 유엔제재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고 말았다.
이제 미국이 북한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고 '행동 대 행동' 원칙의 주고받기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기로 나선 이상 그동안의 대결과 갈등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속도를 내야 함은 당연하다. 가깝게는 BDA 해결 지연으로 두 달 넘게 허비한 2.13 프로세스와 멀게는 부시 행정부 출범으로 7년 가까운 시간을 허송한 북미 관계정상화 논의가 더욱 더 속도감 있게 진전될 것임을 의미한다.
두드러지는 북미 양자협상
최근 드러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또한 북미 양자협상이 국면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베를린 회동이 사실상 2.13합의를 가능케 했고, 3월의 힐-김계관 뉴욕회담이 나머지 워킹그룹 회담을 활성화시켰던 것처럼 힐 방북과 평양에서의 양자회담 역시 BDA 해결 이후의 과정을 주도하는 주요한 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주요한 해결 통로는 6자회담이었다. 2003년 8월 1차 회담 이후 6차까지 진행되어 오면서 6자회담은 북핵문제로 인한 위기를 완화시키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공통의 모법답안을 도출하는 성과를 낸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핵심 당사자인 북미 양자협상이 병행되지 않는 한 6자회담은 문제해결의 방안은 제시할지언정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내는 데는 사실 한계가 있었다. 금년 들어 2.13합의가 도출되고, 난관이었던 BDA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분명 북미 양자협상의 힘이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핵포기의 당사자인 북한과 관계정상화의 당사자인 미국이 서로 협상하고 합의하지 않는 한 북핵문제는 실질적 진전을 이루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를 전제한다면 이번 힐 차관보의 방북과 북미간 평양 회담은 BDA 이후의 프로세스를 진전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양자협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북미 양자가 논의하고 합의한 것이라면 이후 6자회담에서 순서와 절차를 밟아 추인되고 이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힐 차관보가 평양에서 김계관 부상과 나눈 이야기는 당장의 관심사인 핵시설 폐쇄 및 봉인 여부에서부터 불능화 단계와 핵 프로그램 신고 및 핵폐기와 북미 관계정상화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의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번 평양회담에 대해 북한과 미국 모두 '포괄적 논의'였음을 인정한 것도 이를 반영한다. 포괄적 논의에 따라 힐 차관보는 당연히 북한의 2.13합의 이행 즉 당장의 핵시설 폐쇄·봉인 의지를 확인했고, 나아가 2.13 프로세스 2단계인 불능화 문제까지도 상당한 논의와 함께 일정한 의견접근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양자협상의 '생산성'
이번 평양 북미회담이 단순히 2.13합의와 관련된 의제만을 다루지 않았을 것임은 지금까지의 북미 양자협상의 진화과정을 돌이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1월 베를린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실천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3월의 뉴욕회담에서는 북미 관계정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논의했다.
따라서 이번 평양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2.13 프로세스는 물론이고 2.13 이후의 문제 즉, 비핵화와 북미 관계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체제 등에 대해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최근 북미협상의 생산성은 북핵문제 해결을 단순히 북한의 핵폐기만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비핵화 과정과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및 북미 관계정상화 과정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하는데 북미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단지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북미가 교전상태를 종료하고, 종전선언을 하고, 상호 적대관계를 평화공존의 관계로 정상화시키는 과정이 '멀티트랙'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데 북한과 미국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을 무조건 낙관해서는 안 된다. 당장 2.13 프로세스의 순탄한 진행을 위해서는 불능화 단계와 고농축우라늄(HEU)을 포함한 핵 프로그램 신고 등의 몇 가지 고비가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는 북한과 미국이 기술적으로 그렇게 어렵던 BDA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만큼 앞으로 예상되는 고비에서도 양자협상의 힘이 지속된다면 다소의 기복은 있겠지만 큰 흐름에서는 문제가 해결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북미간 생산적인 논의 진전과 함께 반드시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당연히 남북관계의 역할이다. BDA 이후 2.13 프로세스의 희망적인 진행을 위해서도 남북관계는 지금의 '갈등 속 현상유지'를 넘어 보다 질적인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
북핵과 연계되어 북핵의 진전에 맞춰 조금씩 나아가려는 남북관계는 사실상 북핵문제에 종속된 형국일 수밖에 없다. 북핵문제가 악화되는 국면에서 남북관계가 부정적 영향을 받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지금처럼 2.13합의 이후 문제가 호전되는 국면에서 남북관계가 잔뜩 움츠려 눈치만 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북핵문제가 단지 북한의 핵포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고 북미 관계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그리고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까지 포괄하고 있는 만큼 남북관계가 6자회담과 북미회담에 수동적으로 반응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한반도 정세에 대한 우리의 주도력과 개입력을 확보하기 위해 남북관계 영역은 반드시 우리 스스로의 요구에 의해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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