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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살아남은 사람들 "고향 땅 밟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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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살아남은 사람들 "고향 땅 밟고 싶다"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47>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의 염원

내전이든 국제전이든, 전쟁은 대량난민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난민수용소는 현대 전쟁이 그려내는 우울한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1951년에 제정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The Refugee Convention)에 규정된 '난민'이란 전쟁 통에 국적, 종교, 종족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까닭에 주거지를 떠나 국경을 넘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지구촌 난민들을 돕는 국제기구인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자료에 따르면, 116개국에서 모두 2075만 명(2006년 현재)이 전란을 피해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다.

등록된 팔레스타인 난민만 430만 명

대부분의 난민들은 언젠가 포성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는다. 그렇지만 60년 가까이 난민촌을 떠도는 아픔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접경지역(요르단, 레바논, 이집트)은 물론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야, 알제리아, 이라크 등 근동(Near East)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정확한 통계는 재는 잣대에 따라 다르다. UNHCR에 공식 등록된 팔레스타인 난민 숫자는 35만 명뿐.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돕는 유엔기구인 UNRWA에 등록된 난민 숫자만도 무려 430만 명에 이른다. 대대로 살던 땅을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로 밀려난 사람들도 이 속에 들어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보면, 예전에 살던(지금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차지한) 땅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빛바랜 문서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흔하다. 올해 초 <한겨레 21>의 취재 건으로 시리아-레바논-이란 3개국에 갔을 때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마주쳤다.

집집마다 한권의 책이 될 사연들
▲ 사브라 난민촌의 낡은 건물 벽에 그려진 벽화엔 "고향땅 밟고 싶다"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절실한 소망이 담겨 있다.ⓒ김재명


특히 인상적인 곳은 레바논 베이루트 서남부 빈민지역인 사브라 난민촌과 샤틸라 난민촌. 서로 맞붙어 있는 이 두 난민촌의 1세대는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세우면서 폭력적으로 밀어낸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이다. 따라서 사브라와 샤틸라엔 눈물과 한숨 어린 슬픈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기록하면 집집마다 한권의 책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사브라와 샤틸라를 세계적인 분쟁현장으로 만든 것은 1982년 그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사건 때문이다. 이 두 난민촌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참극이다. 아울러 20세기 전쟁범죄사에 빼놓을 수 없는 부끄러운 기록으로 꼽힌다.

참극은 1982년 9월16일부터 사흘 동안 벌어졌다. 이스라엘군 탱크들이 난민촌 외곽을 둘러싼 가운데 150명 가량의 레바논 기독교민병대원(팔랑헤당 무장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른 아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비무장 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희생자 규모는 아직껏 논란거리로 남았다. 줄여 잡아도 800명, 많게는 3000명쯤에 이른다. 희생자 가운데는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

학살 책임자는 식물인간이 되고...
▲ 1982년 사브라-샤틸라 난민수용소 학살사건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공원 ⓒ 김재명

그런 학살바람에서 총상을 입고도 용케 살아남은 이들은 난민촌을 찾아온 필자에게 그날의 상처를 보여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사건의 배후인물은 학살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전 이스라엘 총리). 1982년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이끌던 야세르 아라파트를 비롯한 반이스라엘 무장세력을 없애겠다고 레바논 침공을 이끌었고, 사브라-샤틸라 난민촌 학살극을 뒤에서 연출했다.

난민촌 학살사건이 국제적인 비난을 받자, 이스라엘 정부는 샤론에게 학살사건의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며 장관직에서 몰아냈다. 그뿐이었다. 전쟁범죄자로 처벌 받기는커녕 레바논 학살 20년 뒤(2001년) 이스라엘 총리에까지 올랐다.

샤론은 이스라엘 총리로 있던 2006년1월 쓰러져 지금껏 의식을 되찾지 못한 상태다. 사브라 난민촌에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 난민은 1982년 자신의 배와 다리에 뚜렷이 남은 총탄 제거수술 자국을 보여주면서 "지금 샤론이 식물인간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것은 그가 저지른 벌을 이제야 받는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학살이 벌어진지 25년. 그날의 희생자들은 난민촌 한가운데를 따라 길게 뻗은 시장통 길가의 자그만 추모공원에 누워 있다. 그 지역 밑바닥에 흐르는 강한 반이스라엘 정서는 뒷골목 곳곳에 나붙은 포스터와 벽화에서 묻어난다. 골목길 담벼락에는 2004년에 숨을 거둔 팔레스타인의 전설적인 두 지도자(자치정부 대통령 야세르 아라파트, 하마스 창립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와 '순교자'들의 포스터들이 그득하다.

귀환의 '귀' 자도 들리지 않는다
▲ 1982년 학살에서 총상을 입은 채 살아남은 한 난민은 그때의 상처를 평생 지니고 산다. 그의 꿈은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다. ⓒ 김재명

난민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들을 했다. 그들의 귀환 소망을 되비추듯,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을 담은 벽화들을 난민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팔레스타인 귀환은 주요의제가 아니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에서도 귀환문제는 그저 훗날 협의할 사항으로 미뤄졌다. 2000년 제2차 인티파다(봉기) 뒤 중동평화협상은 아예 실종 상태라 귀환의 '귀' 자도 들리지 못한다. 고향땅 밟고 싶다는 사브라-샤틸라 난민들의 염원이 이뤄지려면, 그들이 베이루트로 쫓겨온 60년 세월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까.

일제 식민지 시절에 만주로, 시베리아로 떠나갔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따지고 보면 난민들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외국군(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좌절을 겪고, 의병전쟁에서 패한 뒤 국권을 빠앗기자, 벼랑끝 목숨을 건지기 위해 보따리를 꾸렸으니 난민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런 쓰라린 역사적 체험을 지녔기에 우리 한민족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강 건너 불처럼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는가 보다.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최근호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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