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비밀리에 여자친구에게 연봉인상과 승진 특혜를 베푼 것이 뒤늦게 알려져 결국 총재 직을 내놓게 된 사건이 아시아 국가들 간의 독자적 금융 협력에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블룸버그> 통신의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 주니어는 21일자 칼럼에서 "개발도상국에 부패와의 전쟁을 역설했던 울포위츠가 스스로 '지능적 부패'를 저지른 셈이 됐다"며 "울포위츠 총재의 퇴진은 아시아통화기금(AMF) 설립 움직임에 심정적인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주도 금융 체제의 '부패'와 '일방주의' 역설
아시아 국가들 간의 긴급융자 필요성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최초로 제기됐다. 외환위기 당시 유입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은 엄격한 재정긴축과 가혹한 구조개혁을 조건으로 해 오히려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일본이 아시아 국가 지원을 위해 1000억 달러를 내놓으며 AMF 창설을 시도했으나 즉각 IMF와 미국 재무부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IMF을 통한 국제 금융시장 내 영향력 유지를 원하는 미국은 미 재무부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새로운 금융 체제의 탄생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방해 공작에 10여 년간 제자리걸음을 해 온 AMF 창설 움직임에 진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 5일 한중일 3국과 ASEAN(동남아국가연합) 재무장관회의에서 8000억 달러 규모의 AMF를 조성해 역내 위기 발생 때 공동대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와 제반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세계 10대 외환보유국 중 아시아 국가가 7개국으로 이들의 외환 보유액을 모두 합하면 세계 외환 보유액의 3분의 2를 훌쩍 넘어서는 액수가 된다. 중국 한 나라의 보유액만 1조 달러에 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시아 국가들이 독자적인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에 울포위츠 스캔들이 터졌다.
페섹은 "울포위츠 스캔들은 울포위츠가 다른 나라들을 방문해서 늘어놓은 반부패 연설들의 신빙성을 갉아먹었다"고 진단했다.
아직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외환위기 당시 워싱턴이 만들어 낸 '정실 자본주의'란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아시아 국가들을 '부패국가'로 싸잡아 깎아내린 용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포위츠 스캔들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 금융 역시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몸소 역설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페섹은 이번 스캔들이 "2001년 엔론의 파산과 2002년 월드콤의 회계부정 스캔들 등과 함께 엮여서 '나쁜 경영'의 상징으로 회자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울포위츠가 공화당 지지자들과 결탁해 자리보전에 애쓰는 모습은 '미국만의 세계'에 회의를 느낀 아시아 재무 수장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계은행 내에서 미국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싸움에 "세계은행 앞에 붙은 '세계'에 아시아는 없다"란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울포위츠의 스캔들은 그의 사임으로 끝나지 않고 아시아 금융 독립에 촉매제 역할을 하는, 미국 입장에선 '꽤 나쁜 유산'을 남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유산이 미국 주도의 금융질서 붕괴로까지 이어질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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