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들의 인터넷 주소의 대부분이 러시아 소재였을 뿐 아니라 해킹이 본격화된 시점이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시내에 서 있던 2차대전 소련군 전몰자 동상 철거를 두고 양 국 정부 간의 갈등이 고조됐던 시기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과거사 앙금', 사이버 테러전으로 번져
에스토니아의 별명은 'e-스토니아'다. 인구 12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발트3국의 작은 나라지만 인터넷을 이용한 금융거래고객만 70만 명이 넘는 '인터넷 강국'이다.
실제로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전 세계 82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터넷 온라인 금융과 전자정부 등 분야에서 에스토니아가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탈린 시내에 들어서면 'Wi-Fi'란 딱지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임을 알려주는 표시다. 무선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장소인 '핫스팟'이 에스토니아에는 1000곳이 넘는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투표를 세계 최초로 실시한 곳도 바로 에스토니아다. 2005년 10월 열린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무선 인터넷을 통해 선거에 참여했다.
에스토니아 정부로서는 지난 3주간 몰아닥친 해커들에 의해 주요 사이트가 초토화된 것은 재앙에 가까운 일이었다. 에스토니아 총리실, 의회, 대부분의 정부 중앙부처, 정당, 주요 신문사 3개, 가장 거래가 활발한 은행 2곳의 사이트들이 해커 공격의 목표가 됐다.
사이버 테러는 소련군 전몰자 추모 동상 철거를 시도하는 에스토니아 경찰과 러시아계 이민자들과 충돌한 지난달 28일에 시작됐다. 소련군 동상 철거는 에스토니아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의 일환이었다. (관련기사: 에스토니아 유혈사태, '난동' 이면의 '증오의 역사')
현재 에스토니아 정부는 2차대전 직후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저질렀던 과오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정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고 소련군의 에스토니아 진주를 기념하는 동상도 같은 맥락에서 철거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사과 요구를 외면하며 오히려 에스토니아의 과거청산 작업이 러시아와 발트국들 간의 거리를 벌리려는 서유럽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고, 양 국 정부 간의 이 같은 마찰의 여파가 러시아 일반인들의 민족감정에도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사이버 공격이 극에 달했던 지난달 29일 집권 개혁당의 홈페이지 첫 화면에 "에스토니아 총리와 정부는 러시아에 용서를 구하고 동상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라"는 문구가 남겨진 것에는 이 모든 상황이 집약돼 있다. 이 외에도 공격을 당한 사이트들 중에는 첫 화면에 소련군 사진이나 "악과 싸우라"는 마틴 루터 킹 인용구로 바뀐 경우도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 내에선 러시아 정부가 이 같은 '사이버 테러'를 지시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이버 공격에 가담한 아이디를 추적한 결과 러시아 연방보안부(FSB)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최근 국가안보위원회(KGB) 후신인 FSB에 사이버전 전담부서를 두고 컴퓨터 바이러스 등 사이버무기를 개발해 실전배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러시아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수석 대변인은 17일 "러시아 정부는 관련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해커들의 주소와 관련해선 "아시다시피 IP 주소는 조작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러시아 정부 홈페이지 역시 하루에 수백 번식 공격을 받고 있다"고 받아쳤다.
마침 18일에는 러시아 사라마에서 양국 간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는 만큼 이번 사건에 대한 양국 정상 간의 논쟁이 예상되기도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