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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FTA는 한미FTA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미FTA 뜯어보기 538 : 창비 주간논평] '국내협상과 민주적 정책결정 결여' 더는 안돼

며칠 전 한·EU FTA 1차 공식협상이 끝났다. 지난 14개월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어 온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 지 불과 한 달 만이다. 우리 정부가 미국만큼이나 경제규모가 큰 EU와의 초대형 FTA를 또다시 추진할 준비와 여력이 있다면 경탄할 일이다. 현재 캐나다, 인도, 멕시코와 공식 협상중이고 중국과 공동연구를 진행중인 사정을 고려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엄청난 소모전을 치러 온 한미FTA 찬반 양 진영은 여전히 한 치 물러섬 없이 대립하고 있다. 미 하원 자문위원회가 협정안을 정밀 검토하여 일부 재협상안이 나오는 속에서 우리는 검토는커녕 협정안도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이 시점에서 한미FTA 찬반논쟁을 접어두고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한미FTA가 주는 교훈이다. 한국에게는 EU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대형 FTA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 FTA 후발국의 처지에서 지난 1년 한미FTA 협상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차분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 점검이 끝난 이후에 EU와의 FTA를 본격적으로 추진해도 결코 늦지 않다.

FTA란 통상협상은 대외협상과 대내협상이란 양면게임을 치르는 작업이다. 특히 대내협상이 체결에 대단히 중요한 관건임은 과거 한·칠레FTA 협상, 한일FTA 협상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과거 협상단의 대내협상 부족을 격렬히 비판했던 이익집단이나 시민사회단체는 한미FTA 협상에서도 여전히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 상대국과의 협상과정에서 국내 이해당사자와의 협상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FTA 협상, 비밀주의를 넘어 내부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첫째, FTA 협상상대국 선정과정에서의 비밀주의다. 선진적 관행을 보면 정부는 국내 이해당사자와의 협의를 거쳐 상대국을 선정한 후 협상개시를 선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후 상대국과 협상과정에서 국내 행위자들과의 협상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 협상상대국 선정과정에서 국내 이해당사자와의 협의가 생략되었을 경우, 차후 대외협상과정에서 국내협상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정부는 한미FTA 협상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깜짝쇼 하듯 내놓았고, 차후 국내 이해당사자들을 협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교정과 계몽의 대상으로 보아 왔다. 한미FTA 체결지원위원회의 활동이 그러하였다. 한·EU의 경우 역시 당초 예정된 공동연구 없이 곧바로 공식협상에 진입했으며 형식적인 공청회 한번으로 넘어갔다. 민주적 정책결정은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다.

물론 정부가 국내협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나서더라도 국내 이해당사자들과 효과적인 협상을 위해서는 사회집단이 잘 조직화되어 있어야 한다. 즉 부문별 대표성을 지닌 파트너가 존재할 때 의미있는 협상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결사능력은 원활한 대내협상에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 정부는 결사능력이 낮은 사회세력과 협상을 해야 하는 힘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정부 스스로도 거버넌스 능력, 즉 다양한 사회세력을 조정, 관리하는 능력의 한계를 노정해 왔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결사능력 부족, 정부는 거버넌스 능력 부족이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FTA처럼 대단히 많은 이해당사자가 개입되는 정책이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수행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기적 과제를 풀어야 한다. 물론 이들을 풀기까지 차후 FTA협상을 유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념과 정서 과잉을 넘어 현실적인 로드맵을

둘째, 한미FTA 대립에서 보듯이 이념과 정서의 과잉이 적절히 통제되어야 여느 선진국처럼 이득과 손실을 계산하고 손실을 적절하게 보상하는 협상의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념과 정서의 과잉은 FTA의 의의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FTA는 문자 그대로 자유무역을 하자는 것이다. 자유무역, 즉 시장기능에 대한 일정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한 FTA정책은 성립될 수 없다. 이런 전제 없이 FTA를 추진하는 것은 이를 중상주의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 즉 상대는 더 많이 열게 하고 자신은 더 적게 열겠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또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이 시대에 통하는 전략이 아니다. 한편, 반세계화론자라면 모든 FTA를 거부해야 한다. 시장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화시대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지속가능한 반세계화 생존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만일 한미FTA의 반대가 FTA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개방의 수순에 대한 반대라면 일정한 합리성을 갖는다. 우리 사회가 대형 FTA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덜 되어 있다면 말이다.

이런 입장을 설득적으로 제시하려면 차가운 이성적 판단과 계산, 그에 근거한 현실성 있는 로드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미FTA 공방이란 양극화된 이념·정서의 지형 속에서 우리는 정작 필요한 장기비전 구상, 차가운 손익계산을 제대로 해보지 못하였다.

FTA는 독약인가 만병통치약인가

끝으로, FTA의 가치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한미FTA에 있어서 보수진영의 '개국 대 쇄국'론, 진보진영의 '자주 대 종속'론은 공히 현실을 과대포장하고 있다. 미국과의 FTA로 팔자 고친 나라도, 망한 나라도 없다. 시장개방 없는 세계화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시장개방은 대세지만 무역은 부를 창출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협정체결 직후 다수 언론, 방송매체들이 앞다투어 한미FTA를 제2, 제3의 개국으로 의미부여한 것은 분명 과장된, 나아가 시대에 뒤진 행태다. 한미FTA가 개방으로 우리 사회에 강고한 소수 기득권과 생존권을 공히 파괴할 수 있는 결정이란 점에서 획기적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 국운을 결정하는 획기적 사건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사고는 20세기 통상국가(trading state) 모델을 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유럽의 경우에서 보듯이 시장개방이 반드시 사회복지의 축소를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또는 미국식 모델로의 수렴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FTA 전도사들의 말처럼 개방으로 인해 해외투자의 유입과 경쟁력 향상이 크게 촉진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양질의 노동력, 고수준의 인프라와 지식수준, 통치능력이 갖추어지고 그 위에서 개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얻어진다. 번영의 21세기 모델은 통상을 넘어 지식을 축적하고 지구적 수준에서 산업, 금융, 기술, 문화적 네트워크를 촘촘히 짜 부가가치를 높이는 국가이어야 한다.

한·EU FTA,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추진하자

요컨대, 한미FTA는 국내협상 부족 혹은 민주적 정책결정의 결여란 문제점을 노정했고, 극단적인 찬반대립 속에서 FTA의 효과에 대한 이성적 계산을 저해했으며, 통상에 집착하는 20세기적 사고를 강화시킨 유산을 남겼다. 한-EU FTA는 이상의 교훈을 새기면서 차분히, 천천히 추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조속한 체결을 추진하는 자세는 지양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제도개혁의 문제다. EU와의 협상에서 대내협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이를 공식협상 이전-중간-이후의 세 단계로 나누어 좀 더 정교한 제도틀을 모색해야 한다. 협상 이전단계에서는 현행 공청회 개최 수준을 넘어 상시적인 민관 정책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하고, 협상 중간단계에서는 대외협상능력 제고를 위한 민간의 협조체제가 요구되고, 협상 이후는 협상안에 대한 정밀한 평가를 위한 (즉 대통령의 비준 이전 단계에서) 민관 심의체제가 필요하다.

둘째, 이러한 제도 만들기 노력은 거시적 수준에서의 기왕의 FTA전략과 로드맵 재고, 그리고 관념과 철학적 비전에 의해 지지되어야 한다. 세계화에 기반하면서 사회적 가치와 시장경쟁을 함께 담는, 통상으로부터 지식으로의 21세기 자본주의 모델을 모색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EU국가들은 우리에게 협상파트너인 동시에 세계화의 파도를 넘는 모델의 고려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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