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글은 14일자 <이코노미스트> 온라인판이 분석한 '크렘린의 세계관'의 일단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러시아가 에너지 패권을 기반으로 근육을 키우면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새로운 파워로 급부상했고 그 과정에서 워싱턴과 모스크바 간 갈등의 수위가 냉전 당시를 넘어섰다는 기본적인 판단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작년 연말부터 이미 서구 언론에서는 '신 냉전'이란 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긴장 기류가 잦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14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틀간의 방문일정에서 라이스 장관은 블리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을 만나 경색된 양국 관계를 타파하기 위한 돌파구를 모색할 예정이다.
최근 극한대립…"미국은 나치" VS "러시아 개혁 후퇴"
모스크바 공항에 내린 라이스 장관은 '신냉전'이란 용어에 도리질부터 쳤다. "미국과 러시아가 분명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더 이상 관계가 악화돼 새로운 냉전이 도래하진 않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라이스 장관은 "(양국 관계가) 복잡미묘하지만 무자비한 적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양국이 주고받은 비난의 수위를 감안하면 "양국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진 않을 것"이란 라이스의 판단을 그저 수긍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0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 연설에서 "모든 전쟁의 뿌리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나 극단주의에 있으며 오늘날 새로운 위협은 제3제국(독일 히틀러 집권기) 때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경멸과 차별대우, 강압정책에 기인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특정하진 않았지만 대립, 극단주의, 강압정책 등의 개념은 부시 정권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나치와 비교한 것은 부시 정권에 대한 더 없는 모욕이다.
이에 라이스 장관은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입법부 권력 강화, 언론 자유 확대, 사법부 독립 등 크렘린의 권력 분화를 가져왔던 러시아의 개혁 중 일부가 후퇴하고 있다"면서 "러시아가 최근 몇 년간 취하고 있는 내부 정책노선에 대해 유럽과 미국은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맞받아 쳤다.
실제 러시아 외무부는 지난달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 이행 중단을 선언하고 동유럽에 MD 배치와 코소보 독립에 반대하는 등 최근 국제현안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뚜렷이 내고 있다.
양국 간 대립은 기존에 나토 확대와 이란 핵문제에 그쳤지만 러시아가 이제 좀 더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그 접점에서 양국이 충돌하는 양상이다.
투르크메니스탄 가스 경쟁에선 러시아 선승
지난 12일 푸틴 대통령이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등과 3자 정상회담을 갖고 투르크메니스탄 가스를 러시아로 운송해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한 새 가스관을 건설하기로 합의한 것은 미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최대 가스 생산국인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가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가스의 유럽 수출망에 포함됨으로써, 카스피해 해저에 가스관을 깔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생산된 가스를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하려던 미국과 유럽의 계획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이를 '러시아의 도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소련 시절보다 더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최근 러시아의 반미 구호가 에너지 패권을 발판으로 드디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라이스의 방문은 미국을 향해 내달리는 '러시아의 엔진'을 식히기 위한 용도로 풀이된다. 미국의 화해 제스처가 크렘린에서도 화답을 얻을지 여부는 코소보 독립 문제에서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코소보 독립 여부를 결정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 열릴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안보리 이사국 중 러시아만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스는 이번 방문에서 러시아의 기권을 설득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오랜 우방이자 발칸반도 진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세르비아의 비난을 감수하고 서방과의 화해의 길을 택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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