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산 카나파니를 몰랐을 때, 팔레스타인은 내게 어렴풋한 지리상의 기호였다. 티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처럼 좀은 실재감이 없는, 머나먼 옛날의 신화 속 지명 같기도 한. 내가 태어나 살아 온 한국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문화적으로도 구미(歐美)의 벽에 겹겹 둘러싸였다. 그러니 앎에서 평균을 넘지 못하는 내 중동(中東: 이 말 자체가 또 얼마나 유럽 중심적인가!) 코드는 구미 유통망을 통과해 시정에 떠도는 아라비안나이트, 석유부국들, 이스라엘 정도에나 연결돼 있었다. 내가 워낙 탐구심이 없고 과문한 탓이 크지만, 한국이 오랜 세월 '제 코가 석자'여서 먼 나라의 불행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다. 아마도 1980년대 들어서나 소수의 지식인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는 대다수 한국인들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속속 그곳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곳곳에 장벽을 치고 거기 검문소를 설치해 거주민들이 이웃동네도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게 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 못할 행태라는 걸 이스라엘 군인도 잘 아는지, 굳게 닫힌 얼굴로 경비견처럼 험악하고 냉담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직장에 시장에 병원에, 자기 집이나 부모님 집에 가려는 사람들이 길고 긴 시간 검문소 앞에서 기다리다 생트집을 잡히며 붙들려 있었다. 하루아침에 둘러 세워져 언제나 없어질지 모를, 부조리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그 장벽 앞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남녀노소 사람들이 쏟아지는 비와 모욕감과 불안과 공포와 분노로 막막히 젖고 있었다.
테러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라지만, '게토'에 대한 악몽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 걸까? 그들의 지금 행태를 보면 인간 종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네가 당한 뼈저린 고통을 힘 없고 죄 없는 이웃에게 겪게 하는 걸까? 참담한 경험 뒤에 내린 결론이 '힘! 힘! 힘센 놈이 제일!'이라면 그들이 겪은 고통은 비극이 아니고 그저 패배한 무용담일 뿐이다.
아다니아 쉬블리의 에세이 <제닌의 소녀들>을 뒤숭숭해 하며 읽었다. 제닌은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도시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1953년, 그곳에 캠프가 세워졌다 한다. 현재 제닌 인구는 3만4000명, 그 중 1만3000명(절반 가까이가 15세 이하 어린이)이 난민 후손으로 그 캠프에 살고 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 1995년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했으나 2002년 재점령했다. 그 재점령 과정에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전쟁, 전쟁, 또 전쟁…. 한국이 50여 년 전에 겪은 전쟁의 상흔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그보다 긴 세월 학살과 파괴와 총성의 일상이라니 끔찍하다. 그것도 가해자나 압제자가 아니라 침탈당하는 자로서 자기 땅에서 몰리고 쫓기며. 그들은 얼마나 쉬고 싶을까! 하지만 평화, 사랑, 화해, 이런 말들은 그들 귀에 속닥거리는 것조차 모독이며 폭력이겠다.
이 봄, 작품 낭독을 하러 제닌 난민촌에 가게 되면서 아다니아 쉬블리는 고향 마을 가까이 있어 자주 나들이를 갔던 어린 시절의 제닌과 그 뒤 오랜만에 방문했던 2002년의 제닌을 떠올린다. "아직도 내 코에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 냄새는 이 지역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2002년의 제닌은 그녀 가슴에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의 절망감을 남겨 놓았다. 근 5년 만에 그녀는 두려워하며 거리끼며 머뭇머뭇 제닌을 향해 간다. 그래서 '냉담함'으로 마음을 무장한다. 밀밭을 굽어보던 몇 그루 편도나무를 떠올리고 무사한지 걱정이 되자 "아직 거기 있든지, 아니면 없겠지 뭐" 중얼거린다.
"2000년 이후로는 봉쇄장벽과 늘어나는 검문소 때문에 팔레스타인 차로 제닌에 들르기가 불가능하다. 이 봄에는 독일 외교관 차에 타고 그 길을 갈 것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독일(!) 외교관 차라면 호락호락 통과시킬 것이다.
"행복은"으로 시작되는 짧은 에세이 <제닌의 소녀들>은 웃음기 한 점 없이 까칠하다. 아다니아 쉬블리. 갓산 카나파니 이후 처음으로 듣는 팔레스타인 작가 이름. 2004년에 두 번째 소설집 <우리는 모두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를 냈다고 한다.
갓산 카나파니의 소설들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었다. 하이파, 가자, 떠도는 사람들, 난민…. 팔레스타인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생생한 고통을 나는 그의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실감했다. 갓산 카나파니가 살아 있다면 아마도 아다니아 쉬블리의 딱 곱이 되는 나이일 것이다. 갓산 카나파니가 이스라엘 측 폭탄테러로 죽은 해쯤에 아다니아 쉬블리가 태어났다.
어쩐지 고통을 감추고 웃는 얼굴일 것 같은 카나파니. 종종 그를 둘러싸고 앉을 수 있었다면 젊은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아마도 더 강인하고 더 다감해졌을 것이다. 카나파니는 후배들에게 되찾아야 할 팔레스타인에 대해 샘물 같은 얘기를 들려줬을 것이다. 그들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자유 팔레스타인의 기억과 이상(理想)은, 참혹한 현실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지켜주었을 것이다. 달리 내가 알지 못할 뿐, 어쩌면 팔레스타인에는 카나파니 같은 작가가 여럿 있을 것이다. 문득 <우리는 모두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를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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